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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무량화
Sep 10. 2024
사는 맛
신년 모임을 가졌다.
거창하게 파티 혹은 예를 차릴 정도의 하례연까지는 아니고 조촐한 저녁식사 자리였다.
재작년 가을, 멀지 않은 이웃에 새로 이사 온 한인 부부가 있었다.
한인이 귀한 동네라 무작정 반가웠다.
갓 60에 접어든 연배라 만나자마자 별 스스럼없이 우리는 자주 어울렸다.
거북이 마라톤도 같이 참가하고 더러는 외식을 하거나 쇼핑몰도 함께 누볐다.
다른 레벨이긴 하나 부인과는 같은 영어 클래스에도 다녔다.
그 댁에 지난 연말 한국 사시는 시어머니가 다니러 오셨다. 여든다섯의 연세라 했다.
날씨는 계속 춥고 구질거렸으니, 마땅히 구경 다닐만한 데도 없어 퍽 답답해하신다는 말을 들었다.
인사도 드릴 겸 어른을 모시고 와 저녁식사를 하자며 세분을 초대했다.
처음엔 떡국대접을 할까 하다가 아무리 연초라지만 무성의한 거 같아 다른 메뉴를 골랐다.
노인이시라 국물 있는 음식이 좋을 거 같아 시원하고 칼칼한 꽃게탕을 끓이기로 했다.
음식을 준비하다 보니 또 다른 분이 걸렸다.
벌써 전에 와인을 들고 와서 언제건 간단한 안주만 마련해 호젓한 시간 나눌 수 있게 연락 달라던 영어선생 생각이 났다.
이왕 상을 편 김에 그녀와 그녀 언니도 청했다.
둘 다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다섯 시에 시간을 내겠다 하였다.
'여우와 두루미' 우화 속 식탁도 아니고 그녀들에게 순한식 매운 꽃게탕만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닭가슴살을 곁들인 샐러드를 볼 넉넉하게 준비하고 채끝살 쇠고기와 갖은 채소를 큼직하게 썰어 샤부샤부 거리를 챙겨놓고
밥솥도 눌러뒀다.
밑반찬으로 배추김치와 동치미 칼큼한 물미역 초고추장무침도 상에 올렸다.
먼저 멸치 다시물부터 냈다.
손질해 포장된 꽃게를 꺼내 깔고 대하 문어 피망 양파 버섯 마늘 할라피뇨를 넣어 한소끔 끓인 다음에 마무리로 진공포장된 홍합탕을 첨가시켰다,
간을 본다고 떠먹어보니 손수 만든 음식이지만 재료가 많이 들어가서인지 맛이 기찼다. 흠!
식탁 중앙에 개스 불판을 약하게 켜고 전골냄비를 덥혔다.
잡탕식 상차림이 푸짐해서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인 게 아니라 그릇만 커 차린 것도 없이 식탁이 비좁았다.
시간 맞춰 초대손님들이 도착했다.
할머니는 연세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얼굴이 맑고 참 고우셨다.
걸음새도 바르시고 등도 꼿꼿하시며 아주 정정하셨다.
그분을 뵈니 건강만 받침 되면 여든 넘어 사는 일도 아무 문제없겠다 싶었다.
연세 높으신 분이 오시기에 실내에 국악을 잔잔하게 깔아놓았는데 그보다는 나훈아나 설운도가 더 적격일 거 같았다.
시어른을 모시고 온 가정에서 돼지갈비찜을 요리해 들고 왔다.
상은 더욱 풍성해졌다.
양념 알맞게 된 돼지갈비찜은 깊은 맛이 배어 있어 맛나게들 들었고 샤부샤부는 집에서 처음 먹어본다며 신기한 눈으로 지켜봤다.
식탁에서 즉석으로 야채와 고기를 익혀 땅콩소스에 찍어먹는 방식이 미국인에게는 퍽 흥미로웠던가보다.
한국 전통의, 화롯불에 끓여 먹는 된장찌개나 신선로 요리를 본적 없으면 그럴 법도 했다.
칭기즈칸이 대륙을 평정하던 시절, 투구에 물 끓여 양고기와 야채를 익혀 먹던 야전형 요리가 기원이라고 아는 체도 해가며 화기애애한 식사시간을 즐겼다.
의외였다. 맵고 비릿한 국물의 꽃게탕을 미국인은 입에 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빗나갔다.
양손으로 뜨거운 꽃게를 찢어 속살까지 발라 먹으며 맛있다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새우야 물론이지만 문어 홍합도 낯설지 않게 먹으며, 꽃게 가슴은 특히 와작 아작 소리 나게 씹으면서 단맛을 음미했다.
국물을 떠먹을 땐 우리처럼 아~ 시원하다란 표정도 지었다.
음식 끝에 정난다는 옛말이 괜한 소리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즐거운 만찬이었다.
저마다 포식을 했다며 샐러드나 후식은 거의 손도 안 댔다.
와인을 대신해 슬로우쿠커에 인삼 대추 생강 계피를 넣고 푹 달인 건강차는 할머니께 안성맞춤이었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할머니까지도 분위기를 부담 없이 즐기면서 맛난 저녁 드셨다며 진한 허그를 풀고 돌아간 다음.
널브러진 설거지감 대충 쌓아두고 적당한 노곤함을 핑계 삼아 달달한 꿈나라로 직행했다.
정신 수란스런 뒷설거지 미뤄놔도 흉될 거 없고 만판 게으름을 부려도 괜찮은, 이게 나이듦의 행복이다.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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