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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놀랬잖아!

by 무량화

아침나절 딸내미로부터 전화가 왔다.


16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늘 그렇듯 퇴근길에 거는 전화다.


간밤 뉴스마다 미 서부가 산불로 온통 난리 났다고 야단이던데 괜찮냐고 물었다.


미국에서 살아보고도 그래? 여름철만 되면 해마다 나는 산불 아냐? 바로 옆동네까지 바짝 다가온 산불로 집에 재티 날아들던 거 기억 안 나?


과거를 잊은 자에게 역사는 되풀이된다, 란 경고가 있듯이 뼈아픈 일은 물론 심각한 사건도 곧잘 망각하는 우리다.


편리하게도 인간은 지독한 산고를 겪고도 애를 또 낳는 걸 보면 속성상 잘 잊어버리게끔 프로그램화되어 태어난 모양이다.


딸내미 다그침만이 아니라도 전에 써둔 글을 찾아보니 서부의 산불, 거의 연례행사에 준한다.


몇 년 전 나파밸리가 온통 불길에 휩싸였을 적에도 한국에선 아마도 호들갑스러운 뉴스 제목이 뒤따랐을 터다.


특히나 와인 애호가가 넘쳐나는 한국이니 와인 주산지인 나파밸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 화재소식에 발 동동 구른 사람도 적잖았으리라.


비자금으로 와이너리 굴리는 전 씨 일가는 더했을 테고. 흠!


올해 데스밸리는 54도에 육박하는 수은주 기록을 세워 서귀포의 35도쯤은 소꿉놀이 같았다.


각설하고, 어제 국내 메이저 언론사의 뉴스 기사 헤드라인은 아래와 같았다.


기후변화로 더 쎄진 산불 확산일로, 미 서부 해안 휩쓴 역대급 산불, 화마로 수십만 긴급 대피, 불타는 미 서부에 주정부 비상사태 선포, 마치 화성처럼 하늘은 주황색, 화염 휩싸인 美 서부, 지구 종말이 닥친 듯, 미 서부 사상 최악의 산불, 미 서부 3개 주 동시다발 산불, 확산일로인 산불 요세미티 위협 등등.


네 시간 전에 내보낸 뉴스 제목은 '美 서부 산불 12개 주로 확산' 온통 불바다를 만든다던 깡패집단처럼 자극적이다 못해 공포스럽다.


뉴스 기사도 기사지만 더 겁먹게 하는 건 맹렬하게 타오르는 숲과 사방천지가 벌겋게 변한 사진들이다.


연합뉴스가 전한 사진은 진화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의 모습이다.


그 사진을 보고 나서 안 그래도 미국에 전화하려던 참인데 때마침 걸려온 딸내미 전화였다.


샌프란 가까이 사는 조카애 근황은 어떠한지 묻자, 엊그제 이사해서 보내온 아파트 사진을 보니 잘 지내고 있더라며 걱정도 팔자라고 또 쿠사리.


이번 역시 뉴스 사진에 속아 소심한 사람 놀라서 밤잠 설쳤는데 과도한 스트레스로 불안장애를 입은 정신적 손배는 어디다 청구해야 하나?


아서라, 뉴스고 뭐고 호들갑 떠는 언론매체 과장법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허풍 과한 기사들 무조건 외면하기, 사기도 미끼에 관심 보여야 걸려든다.




2018년 일지이니 불과 몇 해 전 일이다.


해마다 치르다 시피하는 반갑잖은 8월 캘리포니아 산불은 곤욕스러운 불청객.





올여름을 나려면 유별을 아니 떨 수가 없는 상황이다.


대비책은 서늘한 설산 아래 발 시린 빙하 계곡으로 내빼는 수밖에.


연일 이어지는 세 자릿수 폭염에 딸내미는 일찌감치 피난처로 비숍을 택했다.


캠프장 대신 이번엔 물가에 있는 캐빈을 예약해 뒀다.


휴가가 시작되던 출발일 역시 105도를 찍는다기에 이른 시각부터 서둘렀다.


여러 날 묵을 예정이라 짐칸이 꽉 찼다.


집에서는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을 보고 떠났다.


모하비를 지나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평소와는 달리 흐릿한 시야, 대기가 아주 요상스러웠다.


차가 북쪽으로 달릴수록 창밖 하늘이 뿌옇고 불그레해졌다.


한번도 본적없는 괴이쩍은 현상이었다.


창공 아래 웅자 드러낸 예봉의 장관은, 하얀 화강암과 대비 이룬 쪽빛 하늘이 배경으로 받쳐줄 때 더욱 돋보인다.


브런치 장소인 휘트니 포털에 접어들었으나 숫제 휘트니 영봉은 모습조차 감춰버렸다.


요세미티 산불의 여파로 온통 연기에 가려져 자태 희미해진 시에라 네바다.


비로소 요세미티 산불의 위세를 실감했다.


이미 지난달 25일 요세미티는 퍼거슨 산불로 폐쇄조치됐으며 조만간 재개는 불가할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로 본, 퍼거슨 산불이 퍼지는 요세미티는 군 작전지역을 방불케 했다.


진화작업에 투입된 수천에 이르는 소방관들 행색은 마치 격전장의 병사 모습 같았다.


바싹 건조해진 수목, 폭염, 강풍... 산불은 걷잡을 수 없이 계속 확산됐다.


급기야 5일, 트럼프 대통령은 그곳을 주요 재난지역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국립기상청(NWS)은 낮기온이 100도를 상회하는 기간에는 화재 발생에 각별히 주의해 주기를 당부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또 요세미티 쪽에 불티가 날아가 어느 산기슭엔가 산불이 발생했던가 보다,


이처럼 서부 산불은 거의가 자연 발화로 시작돼 강풍 타고 불길이 불화살 날리듯 엉뚱한 데로 튀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간다.


오래전 옐로스톤 산불은 몇 달에 걸쳐 타올라 공원의 36%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나무끼리 부딪혀 발생한 엄청난 화마는 결국 늦가을 들어 냉하고 습기 가득한 기상에 힘입어 자연 진압됐다.


하도 넓고 넓어 광활하다는 표현 절로 나오는 미대륙이라 어느 한 귀퉁이에서 이처럼 자연재해가 일어나도 무감각한 사람들.


더구나 해마다 다반사로 겪는 산불이다.


그 모든 일이 청산에 깊이 묻혀 누항사 잊고 지낸 며칠 동안 산 넘어 저쪽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비숍에서도 푸른 하늘은 어쩌다 간간 만났을 뿐이다.


그보다 더 자주는, 잔뜩 골난 사람처럼 잿빛 짙었다 옅어졌다 하며 찌푸린 하늘빛 내동 불안스러웠다.


날씨 영향을 받아서인가, 가뜩이나 심란하다 못해 우울감마저 덮치는데 때론 소낙비 종일 퍼붓기도 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우르릉 쾅 뇌성 들리고 하늘 장막 쪼개는 비수이듯 번개 번쩍댔다.


억수 같은 이 비가 산불지역에 집중적으로 세차게 내려준다면 오죽 좋을까만은...


비숍에서 며칠 지내는 동안, 스모그에 가려 달빛 어둡거나 희미했고 영롱한 별빛 또한 드문드문 밖에 구경 못했다.


돌아와서 알았지만 인근 매머드 레익의 라이언스 산불까지 겹쳤으니, 비숍 역시 시계 흐릴 정도로 연기 심했을 수밖에.


공기가 나빠진 기상 덕인지 탓인지 하여간 산간에 머무는 동안 트레킹이나 야외활동보다는 책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무슨 선견지명이 있었던가, 미리 집에서 여러 권의 소설집을 챙겨갔기에 책만은 알차게 읽었다.


캐빈에서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독서삼매에 잠기다 스르르 잠들기야말로 최고의 힐링법이자 피서법.


더구나 낮에도 선선한 날씨, 특히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 히터를 켜야 했던 비숍에서의 며칠간 돌이켜보니 괜찮은 휴가였군.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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