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힘찬 악수. 충북과 경북, 강원도가 다정스레 이마 맞댄 곳. 부석사는 그런 자리에 위치했소이다. 굽이굽이 감돌아 오른 첩첩산중. 눈 아래 깔린 높고 낮은 봉우리들. 태백산 큰 줄기에 가지 친 봉황산 품섶 과수원 길 깊숙이 일주문 지나 또다시 천왕문. 거기서도 한참 올라 안양루 다음에 석축 쌓아 올연 솟은 무량수전이외다.
이제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란 책 이름이 자연스레 겹쳐지는 부석사. 이는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선생이 쓴 책 제목으로, 한국의 미와 얼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분 덕에 배흘림기둥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오. 원형 기둥의 허리부분 직경이 그중 굵고 밑동쪽과 머리쪽으로 갈수록 점차적으로 직경이 좁아지는 기법. 큰 건물의 기둥일 수록 구조상의 안정을 고려해서 뿐 아니라 보기에도 한결 듬직한 느낌이 드는 기법이라 하오. 개심사는 자연목 그대로의 곡선을 살려 기둥을 삼았기에 배가 나온 기둥이 많았지만 부석사의 경우, 원체 중후한 건축물이라 일부러 배흘림기둥 기법을 빌렸다고 하더이다.
언제적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느해 가을, 서리 내려 고춧대 시들어 누운 시골길 내쳐 달려서 부석사에 간 적이 있다오.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잘 알려진 유명사찰이나, 구경가고 싶다고 맘 내키는대로 수월하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소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가려면 길편이 하도 상그러워 하루종일 버스에 시달렸지 싶다오. 오후 늦게야 도착해서 절 입구에 이르기까지, 양쪽에 사과밭 거느리고 고샅길로 꽤 한참 걸어올라가 일주문에 닿았던 생각이 나오. 사과가 가지 휘도록 열려 빨갛던 그때의 정겹고 소박한 농촌 풍정은 사라졌으나 다행히 부석사만은 고전의 얼굴 그대로를 고스란이 간직하고 있어 고맙더이다.
번잡한 일상을 떠나 절을 찾을 때는 고요와 느림의 미학을 찾고자 함이고 마음 정화를 위해서인데 오히려 정신 수란케 만드는 절도 적지 않은 요즘입디다. 울굿불긋 성황당이나 당집도 아닌, 명색이 경건한 사찰임에도 단청 요란스런 대형 건물에 청기와 얹어 마구 들어앉히는가 하면 석물 전시장처럼 온갖 형상의 조각물 유행처럼 세우는 작금. 돈 칠갑도 유분수지 여늬 관광지 꾸미듯 해놓은 겉치레 단장이 영 마뜩찮더이다. 그런 추세와는 달리 무엇 하나 변함없이 옛 모습 그대로를 고수, 섣불리 손대지 않은채 현상유지 잘 해온 부석사이기에 반갑고도 고마웠던 거라오. (다만 부석사 초입의 상가 인근 거창한 인공폭포가 옥의 티이나 부석사 경내는 아니므로 그나마 다행)
일주문 현판에 영주 봉황산 부석사도 아니고 소백산 부석사도 아닌 태백산 부석사라 써있어 고개 갸웃거리다가 걸음 잦추게 옮겨 천왕문 통과하고 경사로 끝에 나있는 석층계 올랐소이다. 단정히 앉아있는 삼층석탑에 목례 보낸뒤 처마선 허공을 차고 날아갈듯한 범종각 위용에 눌려 수굿이 계단 오르면 마침내 극락에 이르는 안양문. 그 너머로 언뜻 호젓한 무량수전 일부가 보이더이다. 일곱 차례 심판 끝에야 열리는 천국문처럼, 구중궁궐에 들어가는 애기 나인처럼, 첩첩산중으로 빨려드는 심마니처럼, 옷깃 여민 다음 삼가 조신한 자세로 올라야 만나는 부석사의 화룡점정 무량수전. 역시나 명성은 괜히 따라붙는 게 아닌 법, 층층이 단을 쌓아 적재적소에 올린 가람 배치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사찰이 부석사이더이다. 더욱이 자연과 가람이 이리도 편안스레 하나된다는 게 경이로울 따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의 표 날듯말듯 부푼 배
서기 676년에 삼국의 뭇백성들 마음을 아우르고자 했던 문무왕의 명에 따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 종찰인 부석사. 뜬 돌이 있다고 해서 ‘부석사’라 명명되었다오. 이 한곳에 옹골차게도 국보 5점, 보물 6점이 있다니 명실상부한 대가람임이 틀림없었소이다. 안양루 돌계단 오르면 국보 17호인 석등이 마당을 지키고 대스타는 맨 나중에 등장하듯 부석사를 대표하는 건축물,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이 비로소 자태 드러낸다오. 황금비율로 잘 짜여져 건축학적으로 완벽한 무량수전은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물로 꼽히외다. 특히나 소백산 능선이 품은 사찰 건축미의 백미인 무량수전 뜰에 서서 이윽이 자연을 관상하노라면, 굼실거리며 물결이는 먼 산봉우리들이 펼치는 조망권 또한 압권이라오. 겹겹이 층층이 깊고 낮게, 푸른 빛 짙고 옅게 엎딘 소백산 자락들 무심코 바라보면 어지러이 일던 심상들도 고즈넉히 가라앉아지더이다.
한번 이곳 전망에 취하면 채근이 있기까지는 한정없이 시선 먼데로 향한채 무념무상에 들게 됩디다. 그만 가자, 소리가 나와야 그제사 정신줄 챙겨 돌아설 수가 있었다오. 무명 중생 어둠 덜어주려 네 면 모두에 창을 낸 석등이 지키는 마당에서 낮은 계단 몇 오르면 중후한 대불전이 자리하고 있소이다. 무게감있는 건축물답게 고려 공민왕의 어필이라 전해지는 큼직한 무량수전 편액을 단 부석사 주불전 안에는 무량수불 아미타여래좌상이 동쪽을 바라보며 좌정하고 있다오. 금빛에 싸인 여래불 외의 닷집이나 천정들 단청빛 바래 아주 희미하기에 왜 단청불사를 안하느냐고 물었더라오. 안타깝게도 이제는 옳은 단청을 할 수있는 전통 단청장이 없기 때문이란 답이 돌아오더이다. 빛의 속도로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는 21세기, 더디고 힘든 수작업을 통해 전통을 이어가던 장인들의 맥이 하나둘 끊겨가는 모양입디다.
현재 자신의 종교가 무엇이든 불교의 정수이신 부처님 전이니 두손 합장하고 공손히 물러나 무량수전 서쪽편에 있는 크고 펀펀한 바위더미가 쌓인 곳으로 향했더이다. 부석사란 이름을 짓게 된 '부석'은 선묘낭자의 전설이 담긴 바윗돌이라오. 의상대사를 연모해온 당나라 처녀 선묘낭자가 의상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자 용으로 화해 바닷길을 인도했다는 얘길 들은 적 있었소. 선묘의 헌신은 한번으로 끝난 게 아니라 의상이 부석사를 지을 때는 큰 바위로 변해 인근에 들끓는 산적떼를 쓸어냈다는 전설도 있더라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애태우기 보다는 오롯한 연정지켜 죽어서라도 끝끝내 님 보필하고자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바친 여인 선묘. 영영세세 그녀의 넋이 지극정성으로 부석사를 지키고 있을 것 같더이다.
이번엔 동쪽 언덕 위에 있는 조사당으로 걸음을 옮겼소이다. 산길 오르는데 가랑잎 위로 툭! 툭! 알밤이 떨어져 내려 다람쥐 양식일 산밤 몇 톨 주워 주머니에 넣기도 했다오. 때는 풍요로운 가을, 지천인 감이며 밤이 한창 제철을 맞았던거라오. 쉬엄쉬엄 오른 조사당은 아주 자그마한 건축물이나 고려조인 1377년에 지어진 국보 제19호라 하였소. 의상대사 초상이 모셔져 있으며 해가 잘 들지 않는 공간이라 여전히 음습하기 그지없더이다. 조사당 토방에 자라고 있는 선비화(골담초)는 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자 잎이 돋아 푸른 나무로 자랐다는 또 하나의 신화를 간직하고 있다오, 헌데 신라시대부터 뿌리 내린 나무치고는 행색이 영 옹색스러웠소. 하긴 전설이나 신화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도 드물긴 하외다만.
되짚어 내려오는 길, 겹겹의 잿빛 지붕 위로 푸르스름하게 어리는 가을 기운이 소슬했소이다. 스카프로 둘둘 어깨 감싸고도 한기가 느껴져 오를 때의 템포와는 달리 줄곧 종종걸음치게 되더라오. 그래도 아쉬움에 길섶에서나마 인증샷 한컷 얼른 담고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더이다. 아직은 시기가 일러 은행나무 물들지 않았으나 상수리나무 눗누렇게 단풍들어 부석사 뜨락에 돌 대신 낙엽 떠다니는 오후녘. 뉘엿뉘엿 저무는 해가 하늘 한자락 홍시빛으로 물들이는데 먼 산기슭에는 슬며시 이내빛 젖어들고 있더이다. 그때 불현듯 시장기가 들어 가까운데서 따끈한 묵밥 한대접씩 비우고 가기로 했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