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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at myself 그리고 아비 아비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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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화
Sep 1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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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덜도 말고 날마다 한가위만 같아라, 란 옛말이 허사일 리 없다.
나 어릴 적 엄마는 포목점에서 물색 고운 갑사를 떠다 추석빔을 지어주셨다.
붐비는 대목 장날 엄마 따라 가선 꽃무늬 자잔히 핀 화사한 꽃고무신도 사가지고 왔다.
그래서 한 달 전부터 명절은 기다려졌으며, 명절 삼 일 전에는 앞동산인 남산에 올라가 솔잎을 따왔다.
솔잎 깔아 송편 찌는 가마솥 옆에서 전 부치는 기름내 진동할 즈음이면 동산 위로 둥근달 둥두렷 떠올랐다.
설레던 중추절이 지나고도 한동안은 차례상에 올랐던 주전부리감이 찬광에 쟁여있어 푼푼했던 시절.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우연찮게 물설고 말도 설은 태평양 너머로 건너와 살게 됐다.
이역에서 맞는 한가윗날은 꼭 집어 표현하기 어렵지만 암튼 기분이 뜹뜰하다.
그럭저럭 이력이 날만도 한데 여전히 심곡 한구석이 그러하다.
이번 추석은 9월 15일 평일이니 더군다나 미국에선 그저 그런 덤덤한 예삿날의 하나이다.
마켓에서 한 팩 사다 먹는 송편도 헛헛하고, 토란국인들 여럿이 먹자고 끓여야 제맛이 나지 냄비에 조금 해봐야 맛도 허술하다.
그럴 바엔 별식이고 뭐고 다 생략하고 명절은 잊기로 한다.
하지만 해마다 민족 대이동이 이뤄지는 고래의 큰 명절만큼은 소홀히 넘기기가 어렵다.
아무리 미국 땅에 살지라도 추석 정도는 챙겨가며 그냥 태무심하게 지내진 않아야지 싶어 생각을 궁그려 본다.
가족들 명절 인사 전화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백을 메울 겸 우선 자신부터 대접해 줄 방법을 찾아보기로 한다.
하여 나를 위한 멋진 선물, 나자신에게 셀프로 근사한 추석 선물 한 가지를 준비해 뒀다.
그렇게 예매해 둔 게 추석인 15일 자 Hollywood Bowl 음악회 티켓이다.
Los Angeles Philharmonic이 펼치는 VIVALDI: The Four Seasons과 BRAHMS: Serenade No.1이다.
비발디와 브람스에 대한 군더더기 설명은 사족에 불과하리라.
어느 신부님이 강의 도중 가벼운 우스개로 꺼냈지만 새겨들을만한 얘기는 이러했다.
안노인네 한 분이 날씨가 무더워지자 냉면 생각이 났다. 마침 자녀들이 방문했다.
딸에게 넌지시 옆집 딸내미를 끌어다 견주어서 의중을 전한다.
앞집 모녀가 냉면 먹으러 옥류관 다녀왔다 더라며 슬쩍 간을 본다. 응, 그래? 대꾸가 영 심드렁하니 시원찮다.
이번엔 아들에게 옆집 며느리는 시어른 모시고 옥류관 갔다더라고 운을 떼 본다. 예, 잘했네요~ 그러고는 끝이다.
자식들이 가고 난 뒤 생각 사록 노인네는 섭하고 서운하고 괘씸하기만 하다.
진심을 그리 몰라주다니.....허나 그들은 마음속을 읽어내는 독심술사가 아니지 않은가. 신부님은 제발 그러지 말란다.
냉면이 먹고 싶으면 어느 자식이 사주려나? 기대할 거도 없고 누구 눈치도 볼 거 없이 자시고 싶은 분이 직접 가서 사드시란다.
까짓 냉면 한 그릇이 십만 원을 하나 백만 원 하냐면서.
혼자서 식당가 사 먹기 청승스럽다 대꾸하자, 둘이 가면 서로 음식 떠먹여 주냐면서 청승맞게 혼자 어찌 돌아가실 거냐 해서 폭소.
맞다, 무언가 원하는 게 있으면 생각난 즉시 직접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대접해 주는 거다.
자기 자신부터 자기를 하찮게 홀대하면서 누군가가 자신을 소중히 여겨 융숭히 대우해 주리라 기대한다는 건 무리다.
집에서 귀염 받는 아이가 나가서도 귀히 사랑받듯, 자신을 대수롭잖은 존재로 만들지 말고 격을 세워줘야 한다.
흉중에 품은 뜻을 혹시 자식이나 배우자가 알아서 풀어주겠지, 막연히 기다리지도 말자.
자신 스스로 나서서 해결사가 되면 만사 간단해진다.
운치 어린 가을맞이 음악회에의 특별 초대장이 아닌 들 어떠며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은 귀한 티켓이 아니면 또 어떠랴.
여름내 불볕더위의 기승에 엄두를 못 낸 야외음악당으로의 외출을, 가을이 오는 초입인 추석날 저녁 그렇게 가기로 한 것이다.
나 자신에게 고운 추석빔 한 벌 선사하듯 마련한 티켓을 들고, 밤 나들이라 옷 따뜻하게 차려입고는 두툼한 숄도 챙겼다.
약간의 간식거리도 준비해 보온용 방석과 함께 별도의 가방에 넣었다.
저녁 여덟 시 훨씬 이전에 미리 하이랜드에 도착했다.
좌석에 찾아들기 전 피크닉 부스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어둠이 내렸다.
무대조명이 환해지며 팡파르가 울리자 곧이어 청중들은 사계의 선율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특별한 뮤지션인 Avi Avital, 그는 Mandolin 연주자로 비발디의 사계를 LA 필과 협연하며 거의 무대를 홀로 장악하다시피 했다.
이스라엘 태생인 아비 아비탈은 예루살렘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국립음악원에서 만돌린 고유 레퍼토리를 연구한 정통파.
그는 바로크와 민속 음악의 연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던 적이 있다.
만돌린이란 악기가 구사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기교의 정수를 그 밤 아비탈은 아낌없이 펼쳐 보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 내내 그와 만돌린은 혼연일체가 되어 서로 어르고 조응하며 종횡무진 현란한 선율을 직조해 냈다.
때로는 미지의 세계로 나지막이 침잠해 들어갔다가 갑자기 솟구쳐 격정적으로 휘몰아가는 호흡.
그의 손놀림은 더없이 부드럽고 섬세한가 하면 금세 폭풍처럼 격렬하게 몰아쳐 어느 결에 황홀한 엑스터시에 빠지게 했다.
꿈결같이 환상적이면서도 사계와 완벽하게 하나 되어버린 한 시간, 몰입도 최고의 연주회였다.
늦은 시각이라 브람스의 여운에 오래 잠길 겨를 없이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일어나 우러러본 하늘.
중천에 뜬 한가위 보름달은 유달리 푸르고 맑았다.
날씨도 별로 싸늘하지 않은 데다 신기하게도 발밑 어디선가 귀뚜라미 여린 소리가 줄곧 들려왔다.
아아~ 모두 모두 다 무지 좋구나, 란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운동화 체질인데 모처럼 굽 있는 구두를 신었더니 다리가 묵직해 엘리베이터를 타기로 했다.
여느 때 같으면 당연히 썰물처럼 밀려내려 가는 인파에 섞여 언덕길을 걸어 내려갔을 텐데 아픈 발을 핑계로 편히 가고 싶었다.
두 번째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막 너른 길로 나서려는데 바로 눈앞에 비발디 연주에서 낯 익힌 얼굴이 마치 대기하듯 서있다.
서너 사람과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고 있을 뿐 유명세에 따라붙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도, 주위를 에워싼 혼잡 역시도 전혀 없다.
유명인에 구름떼처럼 극성스레 따라붙는 열혈 팬심, 특히 한국 아이돌 공연장의 광태에 가까운 장면을 보아온 터라 진짜 만돌린의 거장 맞나?처음엔 헷갈렸다.
한 사람이 다가가 악수를 나누고 사인을 부탁했다.
연이어 두엇이 악수를 교환하며 자신의 폰으로 셀프 사진을 찍었다.
그제사 사인받을 종이를 찾았으나 메모용으로 가방에 넣어둔 이면지만 손에 잡혔다.
겸연쩍었지만 슬쩍 종이를 내밀자 그는 선 굵은 안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사인을 해주곤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느낌이 비단실 같은 감촉일 줄 알았는데 그의 손길은 예상외로 힘차고 억셌다.
조금 전 현 위에서 그리도 정교하면서도 미묘하게 춤추던 그 손이 틀림없나 싶을 정도였다.
신들린듯한 연주솜씨는 완전 얼을 빼놓게 했더랬는데...
접신한 무녀의 춤은 뼈도 살도 없는 율동이었다던... 소설 무녀도가 겹쳐졌더랬는데.
기대 이상의 감동이었던 음악회에 더해 뜻밖의 선물까지, 만월보다 더 풍요로워진 서정.
마음 밭 가득 달빛 흥건히 젖어들며 주체할 수없이 가슴이 벅차올랐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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