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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삽화

by 무량화

<1993>

유럽에서 한글판 관광 안내서를 대할 수 있었던 곳은 뮌헨이 처음이었소. 바이에른 주 수도 뮌헨시 관광국에서 발행한 안내 카탈로그의 또렷또렷한 한글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어여쁘던지. 감격스럽기조차 한 해후의 순간, 문득 알퐁스 도오데의 <마지막 수업>이 생각나더이다. 모국어에 대한 애정의 확인이라는, 핏줄의 당김과 흡사한 특별난 경험을 뮌헨에서 한 셈이요. 맛진 과자를 아껴가며 조금씩 입에 넣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는 심정으로 그 익숙한 단어며 발음, 한눈에 전달되는 내용을 찬찬히 음미하듯 읽어 내려갔소. 띄어쓰기까지 정확한 긴 설명문에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뮌헨의 공원, 정원, 강과 그리고 하늘이다.’ 란 구절도 있었소. 한글을 갓 깨친 학동처럼 또박또박 안내문을 끝까지 읽어보았소. 로코코와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들, 제후의 장원들, 수많은 박물관과 바이에른 국립극장을 비롯한 크고 작은 극장 이름이 문화 예술의 도시 뮌헨을 장식하고 있었소만 여기에 할애된 시간은 단 하룻밤뿐이었소.


뮌헨에 닿았을 때부터 날씨는 아주 고약스러웠소. 보리수 잎새를 할퀴는 바람은 거칠었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은 우중충했소.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유태인 포로수용소에 들어가니 효과음을 넣듯 천둥번개마저 요란했소. 촘촘한 철조망, 높은 감시탑, 간략히 지은 수용 막사는 여러 동이었소. 자료 전시실에 사진으로 남겨진 나치의 잔학상은 끔찍했소이다. 일제 만행에 처절하게 죽어간 우리의 선열들이 떠올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소. 극한에 달한 가학성, 그 잔인함에 절로 몸서리가 쳐지더이다. 피골이 상접한 포로의 퀭한 눈, 무더기로 쌓인 시체 더미, 그것을 형상화시킨 조각이 막사 중앙에서 인간에 내재한 악을 고발하고 있었소만 요즘 들어 일단의 독일 젊은이들 사이에 번지고 있는 신나치주의 망령은 어떻게 설명돼야 할지요. 물론 파괴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과격한 방법이 문제이지, 어쩌면 이는 당연한 몸부림일지 모르오. 통독 이후 높아진 실업률에 제 밥그릇 챙기기 위한 수단의 하나이니 무조건 독한 민족이라 규탄할 수도 없는 일. 생존의 위협 앞에 성자 아닌 담에야 나눔의 미덕을 기릴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하리까.



회오리치는 모래바람에 등 떠밀려 수용소를 나온 다음 올림픽 스포츠 공원과 BMW 자동차 박물관을 대충대충 거치는 동안 부슬거리던 비는 드디어 장대비로 변해 있었소. 뮌헨의 라틴 거리라는 슈바빙도, 마리엔 광장의 인형 시계도 비 때문에 생략하고 호텔로 직행했소. 푸른빛 일색의 정갈스러운 침상에서 모처럼 느긋이 쉬고 있는데 차츰 창밖이 밝아지며 날씨가 개어왔소. 길 건너 교회 유리창에 반사된 석양은 눈부신 금빛이었소.

비로 인해 말짱 놓쳐 버리고 헛되이 지워 버린 오후 일정. 남은 시간이나마 호텔에 그냥 죽치고 앉아 허비하기엔 너무 아까왔소. 고등학교적 막연한 동경의 꿈을 꾸게 한 전혜린, 그녀의 환영을 찾아 거닐고자 했던 슈바빙은 덮어두고라도 소문난 뮌헨 호프 맛을 안 보고 갈 수는 없는 일. 마리엔 광장 가로등에 기대선 장발의 남자가 부는 트럼펫 소리에 공연히 가슴 두근거려 가며 호프 브로이 하우스의 왁자한 불빛 속으로 들어갔소. 술을 즐긴다기보다 무작정 좋아하는 남편과 이십 수년 생활하다 보니 자연 술과 친해졌고 평소 맥주를 사이에 두고 가벼이 대작하기 예사였기에 맥주쯤은 별 스스럼도 없는 터였소. 사실 신경 마디마디가 노곤해지며 핼랑하게 풀리는 약간의 취기는 기분을 아주 근사하게 하지 않던가요.


호프 브로이 하우스의 운동장같이 드넓은 홀에는 밴드의 음악에 맞춰 경쾌한 노랫소리가 출렁이다 못해 넘쳐나고 있었소. 활기 넘치는 생동감에 절로 신명이 차올랐소. 아무에게나 고개 끄덕이며 아는 체하고도 싶어졌소. 밤의 뮌헨에서야 첫 손꼽히는 명소답게 거기에서도 한국인은 눈에 띄었소. 유럽 여덟 나라의 명승지를 지날 적마다 거의 빠짐없이 한국인 여행객을 만났듯 유럽 천지 곳곳에서 여행객 외의 유학생과 교포 등도 다양이 스쳐 지나갔소. 나라 밖에서 우리말을 쓰는 동양인을 만난다는 것은, 안면 많은 한동네 사람이라도 만난 듯 악수 나누고 싶도록 반가운 게 사실이라오.


벤치처럼 긴 나무 의자에 역시 꾸밈없는 장방형 탁자, 벽면 장식조차 소박한 호프 브로이 하우스는 옛날 궁정의 맥주 양조장이었다 하오. 현재 규모가 7천 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다 하니 가히 운동장 만한 넓이 아니겠소. 테이블마다 빈틈없이 자리가 차있었고 거품 넘치는 커다란 맥주잔이 연신 날라지고 있었소. 무덤덤한 소시지 외에는 따로이 안주가 없는 술집. 대신 대화와 노래가 곧 그들의 술안주였으며 옆자리에 앉은 누구와도 금방 격의 없이 친구 되어 어깨동무를 하곤 했소.


그 분위기에 거나히 젖어 한 잔의 맥주에도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았소. 술집이되 술 취한 사람이나 주정꾼이 전혀 없는 곳. 각자 적당히 마시고 유쾌하게 끝내는 음주습관이 몸에 밴 듯 어디에서도 무리하게 술을 권하는 추태 따위는 찾을 수 없었소. 곤드레만드레, 삼차 사차까지 이어지는 우리 식 음주법이 고쳐야 할 병폐요 고질이라면 뮌헨은 술의 본향답게 일찍이 옳은 음주문화를 확립했구나 싶어 슬그머니 샘도 났더랬소.



호프 브로이 하우스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자물쇠가 일일이 채워진 맥주잔 수납대였소. 그것은 우리네 골프나 헬스클럽 회원권 비슷한 제도로 종신제 회원이 되면 자기 전용의 맥주잔을 갖게 되며 열쇠는 각자가 지닌다 하오. 숫자가 한정돼 있는 관계로 예약 후보가 끝없이 줄을 서 있다는데 이 맥주잔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뮌헨인에겐 여간한 긍지가 아니라 하더이다. 맥주와 인연 깊은 국민인 만치 술잔 하나에도 그만한 풍류와 격을 부여함이 당연하지 않으리까.



광장 주변 보행자의 구역도 어느덧 인적 드물고 도시 전체가 깊은 휴식에 잠겨드는 시각. 흥얼흥얼 노래라도 낮게 한자락 끌며 걷고 싶었지만 낯선 이국의 밤거리라 발걸음이 절로 빨라지고 있었소. 이후 아무래도 뮌헨은 호프 맛으로 남게 될 것 같아 깜깜한 하늘 보고 씩 한번 웃었소.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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