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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24. 2024

놀잇감

블로그놀이

아이가 놀고 있다. 아이는 소꿉질을 하고 있다. 엄마가 나들이 준비를 한다. 혼자만 옷을 갈아입고 보따리도 꾸린다. 아이를 떼놓고 먼 길 가는 채비다. 철부지라도 낌새가 이상한 걸 눈치챈다. 아이는 불안해진다. 소꿉질도 뒷전, 엄마 치마꼬리를 잡고 슬슬 동심원을 좁힌다. 치마 감은 손끝이 저려온다. 그래도 절대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위기로 봐서 짐작된다.


울음보 터지기 전 미리 다독여야 한다. 엄마는 아이에게 사탕 봉지를 통째로 안긴다. 평소 아이가 좋아하는 사탕이다. 어느새 슬그머니 놓아버리는 치맛자락. 아이는 입을 헤벌쭉 벌리고 색깔 별로 맛을 본다. 딸기 맛도 있고 살구 맛도 있고 귤 맛도 있다. 입에 넣으니 눈이 스르르 감기게 달콤하다. 엄마가 먼 길 간다는 생각도 잠시 잊는다. 아이는 사탕 맛에 취해 엄마가 살짝 대문을 나서는 것도 모른다. 요것조것 입에 넣고 맛보기에 골몰한 아이. 아이는 단순하다.


나도 그 짝이었다. 일 년여 만에 다니러 온 딸내미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날. 필라델피아 공항에서 가벼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외진 곳에 홀로 남겨진 듯 쓸쓸하니 헛헛하던 다른 때와는 달랐다. 무언가 미진해 아쉽고 그래서 짠하니 걸리는 게 보내는 마음이다. 그럼에도 서운해할 겨를 없이 단맛에 빠져든 나. 내가 집은 사탕은 디카와 블로그였다.


디지털카메라와 인터넷 블로그, 알고 보니 둘 사이는 진작부터 찰떡궁합. 피차 상호보완 정도를 넘어 필수적 관계 수준이다. 서로는 상대를 위해 존재하며 빛을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요즘 들어 바닷가 모래알만큼 많고 많은 블로그. 한눈에 강렬한 이미지나 메시지를 전달하려니 저마다 착상이 기발하다. 인터넷상에선 열심히 공부한다, 가 ‘열공’이다. 그만큼 급하다. 전광석화 같은 찰나에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긴 설명이 아닌 한 컷의 영상 이미지다. 헌데 주로 산문을 올리는 내 블로그를 끈기 있고 관심 깊은 블로거가 아니면 누가 시간 끌며 머물겠는가. 더러는 내가 사는 곳의 색다른 풍물도 곁들이기로 한다.


먼저 디카 공략이다. 태생이 문명 지진아에 기계치인 내게 있어서 기능을 활용 못하니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었던 디카였다. 애들도 단박 익히는 성능이건만 내겐 우주선 조종 정도로 복잡하게 여겨지는 무수한 기능들. 영문으로 된 설명서를 돋보기 끼고 콘사이스 펴보며 조작 기술 익히려니 더디기도 하려니와 행여 잘못 다뤄 고장 낼까 봐 손대기 저어했던 터. 자신의 휴대폰조차도 송수신 기능만 이용할 뿐인 천생 미개인 수준이다.


딸내미가 오자 기회는 이때다 싶어 얼른 디카를 꺼내 적극적으로 따라 배운다. 조작법의 기초부터 시작한다. 꽤 까다롭다. 최신형이니 모든 걸 알아서 척척해줄 것 같지만 첨단 기능이 첨가되면 될수록 나이 든 사람 꽤나 주눅 들게 하고 헷갈리게 만든다. 두 번 세 번 반복학습은 기본이고 핀잔은 양념이요 면박은 고명이다. 방금 전에 설명 들은 것도 또 다른 기능 숙지시키는 동안 뒤죽박죽, 어느새 뇌 속 지능 회로가 엉켜있곤 한다. 사진 찍기에서 삭제시키는 방법뿐만이 아니다. 메모리칩 갈아 끼우기, 건전지 바꾸기도 익힌다. 그다음 디카를 인터넷에 연결하는 법이며 저장시킨 문서 찾아 필요한 곳에 이동시키는 일까지 온 신경 곧추세우고 차례로 입력해 둔다.


또닥또닥, 딸내미가 새 블로그를 개설해 놓았다. 신바람 나서 새집들이를 했다. 오 년 전 두어 해에 걸쳐 홈페이지 운영을 해봤기에 블로그 관리는 만만하게 여겼다. 그러나 아니다. 도무지 새삼스럽다. 더듬더듬 헤매는 어설픈 솜씨가 답답한 딸내미. 지시어를 잘못 읽는 바람에 저장된 파일을 몇 차례나 날려버린 전력이 있는지라 살얼음판 딛듯 조심하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컴맹에서 조금 진보한 컴퓨터 사용 미숙자. 요사이 이메일보다 더 쓰기 편하다고 마련해 준 메신저 창은 아예 열어도 못 봤다. 고양이 머리통만 한 두뇌라 용량 초과, 과부하에 걸려버릴 테니 말이다. 메신저까지는 욕심, 일단 접어 두고도 새로이 맛 들인 사탕의 달콤함에 흠씬 빠져 있는 나.


우리 집 가장의 놀잇감이 낚싯대와 골프채라면 디카와 블로그는 내 놀잇감. 주중에는 ‘미국 어거지로 살아가기’가 우선 시급한 일인지라 블로그 돌아볼 짬이 별로 없다. 대신 주말을 이용해 블로그를 운영하며 이제 슬슬 나들이도 다닌다. 흔전만전한 시간이 아니라 촌음 아껴 쪼개 쓰는 판이니 감질나며 더 땡기지만 절제 또 절제. 재미 진진하던 오 년 전처럼 다시금 “먼 데서 벗이 찾아오니 이 아니 반가운가.”하며 풍류 놀음 기대하는 나. 이처럼 나는 물색없이 나이만 든 채 여전히 철 안 든 아이다.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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