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마공신 김만일의 후광 제주에 대대로

by 무량화

-衣貴里라는 특이한 마을 이름-


전국 최대의 목장 지대였던 한라산 일대에서 말을 기르던 대목장 주가 있었다.

오로지 말이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시대에 그는 많은 말을 소유한 제주의 부호였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의 위기에 처한 조정에서는 군마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에 자신 소유의 말 중에 상당수를 국가에 바친 이가 있었으니 그가 서귀포 의귀리 사람 김만일이다.

김만일은 광해군에서 인조 때까지 왜란으로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조정에 수천 필의 말을 바쳤다.

광해군 12년에 그는 정 2품의 오위도총부도총관 겸 지중추부사에 임명됨과 동시에 '헌마공신' 칭호를 받았다.

또한 인조로부터 제주사람으로는 역대 가장 높은 벼슬인 종 1품 승정 대부에 제수받았다.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준 그에게 영조는 관직뿐 아니라 비단옷을 하사해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리하여 이후 마을 이름이 의귀리(衣貴里)가 되었다.

김만일의 향리인 의귀리에 자리한 <헌마공신 김만일 기념관>에는 그와 관련된 사료 및 말과 연관된 다양한 자료가 비치돼 있다.


-이제부터 공을 '헌마공신(獻馬功臣)'이라 부르겠노라-



오랜 전란으로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들 살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피폐했던 시절.

전쟁에 필요한 군마를 육성하던 국영목장의 말만으로는 도저히 수요를 채울 수가 없었다.

이에 부족분을 충당하고자 백성들이 기르던 말까지 징발해야 했다.

조정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이태 후 김만일에게도 말을 조달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기꺼이 조련마 500여 필을 전마로 나라에 바쳤다.

이후에도 김만일은 칠 년이나 끈 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조정에 수많은 말을 군마용으로 올려 보냈다.

광해 임금으로부터 그는 '이제부터 공을 헌마공신(獻馬功臣)이라 부르겠노라'라며 특수 칭호를 부여받게 되었다.

제주마는 진작부터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했던 용어다.

천연기념물 제347호인 제주마는 성격이 온순하고 체질이 강건하며 체형이 다른 지역 말보다 작은 편이다.

제주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말이 살았던 것으로 유적을 통해 고증되나 사육하기는 고려초부터라 추정한다.

무엇보다도 고려 원종 때 몽골군이 지배자로 제주에 들어와, 말 키우기에는 최적의 조건임에 눈독을 들이면서다.

제주의 드넓은 초지와 사방이 바다라 자연 철책 구실을 하니 실제 말 사육지로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라 아예 목마장을 설치했다.

대몽항쟁을 편 삼별초의 마지막 저항지였던 제주에 원나라 군대가 들어와 삼별초를 와해시킨 후 1세기 간 무슨 일이?

몽골의 직할령이 되었던 섬은, 흑심 품은 원나라가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로 여겼다니 굴곡 심한 제주 역사에 탄식 절로....


-한라산 중산간은 목장의 최적지-


한 마리 말에서 비롯된 설화 같은 말과의 인연은 호사가의 전설 따라 삼천리로 남겨두고.

헌마공신의 후광 덕에 작금까지도 제주 한라 산록 너른 초원은 마방목지라 하여 문화재보호구역으로 관리되고 있다.

그뿐 아니다, 목축문화가 뿌리내린 제주 곳곳에는 말들이 평화로이 풀을 뜯는 야초지와 승마장이 흔해 말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운만치 그 정신에 걸맞은 벼슬과 칭호를 제수받았던 헌마공신 김 공.

김만일은 인조 때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선대의 후광으로 후손들은 무려 230여 년 동안(1659~1895) 제주산마감목관직을 맡아 산마장을 운영해 왔다.

위화도 회군으로 세워진 조선은 군마 육성의 중요성을 알기에 개국초부터 말 관련 업무인 마정을 중시해 왔다.

더군다나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군마 확보가 국정운영에 있어 그 무엇보다 최우선시되었다.

나라에 필요한 준마를 대다시피 한 제주의 김만일과 그 후손들이니 실제로 막중한 책임과 역할을 떠안은 가계였다.

아들들과 손자 증손자 고손자까지 왕이 타는 어승마와 군마를 비롯해 양마 육성에 진력해 가문의 맥을 계승했다.

뒷날 대대로 이어지던 세습제가 폐지되자 후손 하나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궁궐 밖 신문고를 울려 신원되었다.

김만일 공으로부터 전수된 탁월한 양마기술을 이어받은 자손들은 218년 간에 걸쳐 준마 2만 여 마리를 나라에 헌납했다.

후손들은 조정의 처우에 걸맞게 전심전력 말 사육에 정성을 다해 제주마 육성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한라산 중산간 이상에 위치한 산장(국방의 기초인 군마를 육성하는 국영목장)은 지금도 그 자취 곳곳에 남아 있다.

말 축제를 열고 승마교육장이 있는 의귀리는 물론, 녹산로(예전 국영목장인 녹산장 터) 가시리에는 아직도 갑마장 길이 현존한다.

제주말의 명성은 고려 때부터 이미 소문 자자한 바 문종실록에 이렇게 적혀있다고 한다.

“제주말은 그 값이 원래 비싼 데다가 나주에 오면 이미 한 곱이 되고, 다른 도에 가면 또 한 곱 더하므로, 사람들이 사기 어렵다.”

광해군 12년 일기를 살피면 "김만일이 말 5백 필을 바쳐왔으니 벼슬의 품계를 건너뛰어 올리고..." 란 구절도 보인다.

왕조 실록의 기록을 통해서 나타났듯, 제주마의 우수성과 김만일의 행적이 오늘날에 이르도록 이에 생생히 뒷받침된다.

그래서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라'라는 속담까지 생긴 모양이다.



#본 포스팅은 상기 기념관 내부 전시실의 여러 패널에 쓰인 안내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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