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논에서 우렁이랑 잠자리와 놀다

by 무량화

올여름의 폭염 기세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그 바람에 아주 오랫동안 산행을 갖지 못했다.


날씨가 시원해 영실 윗세오름 지나 남벽분기점을 돌았던 그다음 날.


전에도 백록담 다녀온 후 종아리 근육에 피로물질이 쌓여 뻐근한 적이 있긴 있었다.

일명, 종아리에 알이 배겨 딴딴해지며 약간 불편을 느끼는 증세다.

산 오르며 종아리에 계속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후유증으로 생긴 근육통이겠다.

황선생은 슬그머니 파스를 붙였다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서 첫날 온찜질만으로 그쳤다.(냉찜질이 훨 낫다는데)

보통 이삼일 지나면 완화되는 현상이라 이튿날 볼일 마친 다음 시공원을 돌아 하논까지 걸었다.

뻐근한 다리를 걷기 운동으로 풀어주기 위함이었다.




하논 들머리 공터 무성하던 무궁화 지는데 연분홍 부용은 커다란 화판을 활짝 열었다.

갈대가 피어나기 시작하는 물가에 작은 꽃 귀여운 가시여뀌 초록 카펫을 깔아놨다.

모리모리 이마 맞댄 마을 어느 집 맨드라미 시들어가고 홍시 매단 감나무 이파리 어느새 성글다.

수초 담뿍 자란 못 가에 왜가리 엉거주춤 서있고 눈 꿈뻑대며 나앉은 개구리 뒷다리 매우 통통해졌다.

논과 수로 사이에 난 흙길을 걷는데 하늘거리며 날던 실잠자리 물가 마른풀에 사려 앉았다.

실잠자리를 찍어보려고 쪼그리고 앉자 물속 수초에 붙어 움찔대는 우렁이가 보였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인근이 숫제 우렁이 놀이터다.

아마 가을철이 되면 우렁이도 살이 찌는 모양이다.

여기도 저기도 굵다라니 실한 우렁이 천지다.

물에다 손만 넣으면 쉽게 잡히는 그런 위치에 옹송거리고 모여있는 우렁이들.

원시 수렵채집인의 DNA가 무의식 저변에 면면이 살아있었던가, 무심코 우렁이를 잡았다.

잡아서 뭘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우렁이를 건져 풀섶에 올려놓았다.

정확히는 얼른 건져 풀숲에다 던졌다.

물이끼가 푸르게 껴 미끈한 감촉이 좀 징그러웠다.

어릴 적 외가에 가 추수 끝난 논배미에서 우렁이를 잡아본 적이 있다.

잡았다기보다는 우렁 여기도 있어! 소리치면 외사촌이 냉큼 다가와 주워 담았다.

그때 본 우렁이 껍데기는 약간 두꺼웠던 거 같은데 이번에 바짝 보니 달팽이 껍데기처럼 얇은 반투명체다.

기억의 왜곡인가, 아니면 어째 토종 우렁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저항할 능력 하나 없이 고스란히 포로가 되는, 그게 왠지 짠하다.

잡았던 우렁이를 본디 살던 물속에 다시 던져주었다.

하긴 우렁이를 싸가지고 갈만한 건 전무하며 어찌 반찬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먹어본 기억도 아득한 데다 맛이 어떤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지금은 폭우로 수로가 씻겨내려 맑고 깨끗하지만 고여있을 적엔 물이 여간 혼탁한 게 아니었다.

더구나 얼마 전 태풍 지나 물 그득 찬 수로를 S자로 헤엄치던 물뱀을 본 적도 있으니 으익~ 무시라!




벼 이삭 고개 숙이며 황금벌판 이룬 하논은 요 근래 들어 생선 그릇에 고양이 발 넘나들듯 자주 드나들었다.

단순한 내 셈법으로는 추석 때 이미 햅쌀로 송편을 빚으니 늦어도 추분 무렵엔 추수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계산 착오였다.

하긴 논농사래야 어쩌다 외갓집에서 본 게 전부다.

게다가 농촌 근처에서는 살아본 적도 없으니 추수 시기를 제대로 알 턱이 없다.

서귀포에 와서 하논 분지를 통해 가로 늦게 논에 흥미 느껴 관심 가지면서 뻔질나게 하논을 찾았더랬다.

삼월 논갈이 때부터 시작해 오월 싱그런 못자리도 보았고 이앙기로 하는 유월 모내기도 죽 지켜본 하논 논농사다.

칠팔월 초록으로 술렁대던 벼포기가 구월 초 노오랗게 변하면서부터 발걸음 잦아졌다.

그러나 9월이 다해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추수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조바심이 나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하루 걸이로 다녀오는 하논인데 아직껏 소식이 없다.

벼 이삭은 차츰 더 무거워지고 벼포기 차츰 더 금빛으로 익어가는 요즘.


일찍 모내기를 한 논은 어느새 벼 이삭 고개 숙인 채로 묵직이 나붓거렸다.

이앙기로 늦게 모내기를 한 논배미는 아직 꼬투리 여린 벼 이삭인데 낱알 여문 벼도 있었다.

바람이 불어 제킬 때마다 벼는 자로 모로 휘청대며 물결처럼 일렁댔다.

흠흠, 가능한 만큼 코 평수를 넓혀도 구수하게 익어가는 벼내음 가늠하긴 아직 이른가.

한 주 만에 다시 찾은 하논은 어느새 빛깔조차 풍요로운 가을 기운 완연했다.

마음까지 절로 넉넉해지는 추석도 지나갔다.

미국 사는 동안 내도록, 제대로 챙길 수 없었던 우리 고유의 명절인 추석.

그러나 차례 모시느라 분답던 명절 느낌 잊은 지 어언 오래이고.

갑사 치마저고리에 꽃신 같은 추석빔 기억이야 아득한 옛일이라 더 빛바랬으며.

그럼에도 어제 하논 풍경은 문득, 유년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실잠자리 장수잠자리 홍잠자리 밀잠자리 물잠자리...

낮게 창공 선회하면서 익어가는 벼 내음 즐기다가 잠자리는 가끔 물가 풀잎에 앉아 쉬곤 했다.

마른풀 대궁에 앉아 까닥까닥 한들한들 위태위태 안쓰러울 정도로 조심스런 몸짓이다.

예민한 실잠자리나 왕눈이 장수잠자리는 살푼 앉는가 싶다가도 금세 자리를 뜨니 그나마의 쉼조차 어렵다.

오금 저리도록 쪼글 뜨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걔네들 하르르 바람 같은 자태 사진에 담기는 역부족이다.

에메랄드와 터키석 닮은, 보석같이 멋진 눈을 가진 장수잠자리는 설핏 스쳤는가 싶은데 어느새 하늘가로 스며들었다.

잠자리는 모기나 하루살이를 먹이로 삼는 익충이다.

그래서 마냥 살가운 걸까.

마음 이리 끌리는 건 아마도 투명한 날갯짓 때문일지도.

추수 풍경은 다음으로 미뤘지만 하논에서 오후 한때, 우렁이와 잠자리랑 해찰 부리는 햇살 더불어 잘 놀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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