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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Sep 26. 2024

타임머신 타고 간 1930년대 가옥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로 298번 길 3-6에 있는 양금석 씨 가옥에 들렀다.

1930년대 초반에 지은 이 마을 양 씨(梁氏) 종가(宗家) 댁이라고 한다.

제주도 민속자료 제3-45호로 문화재 지정을 받은 초가집이다.

 ‘민속적 가치’를 인정하여 민속자료로 지정해 이처럼 개방한 공간이 있는가 하면 민속촌 내에도 이런 가옥들이 있다.

통상 알기로 민속촌은 전통 기와집이나 초가집을 이전·복원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관광 목적의 마을이다.

원래 제 자리를 지키는 민속자료 가옥도 있는 반면 민속마을로 옮겨 복원시킨 집도 있다는 얘기다.

민속자료 또는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은 일 년에 한 번, 원형 보존을 위해 문화재 관리청의 관리를 받는다고 한다.

따로 존재하는 가옥은 후손이 생활하는 거주공간인 경우가 많은 듯 하나 문화재청에서 매입한 예도 있다고.  

아무튼 그 방면에 과문한 탓이겠지만 정확한 구분은 여전히 애매하다.


우연히 이 마을을 지나다가 도로변에 큼직하게 세워진 안내판을 보고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큰길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올레는 야트막한 돌담이 아늑하게 둘러쳐져 있었다.

덩굴 무성한 담쟁이 비슷한 송악이 풋열매를 달고 돌담을 감싼 채 제법 길게 푸른 길을 이끌었다.

가옥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약간 휘어져 있는 올레를 거의 다 들어서자 촘촘 엮은 지붕을 얹은 초가가 드러났다.

새(억새)로 덮은 지붕은 거센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띠를 꼬아 만든 엉(새끼줄)으로 망을 만들어 지붕 전체를 덮었다.

처마 아래에는 긴 대나무를 엉으로 묶어 일정 간격을 두고 단단히 고정시켜 놓았다.

양금석 가옥 안마당에 버티고 선 자동차가 초가와 어울리지 않지만 시대가 변했으니...

그러려니 인정하고 오른쪽에 자리 잡은 사랑채 같은 밖거리에 시선을 돌렸다.

위치로 보아하니 방문인듯싶은 문이 마치 부엌문이나 광문같이 통 나무판으로 만들어져 특이했다.

두드려보니 쿵쿵거릴 정도로 견고한 재질이라 무슨 나무일까 궁금했는데 가시낭(가시나무) 통판을 다듬어 달았다고.

제주식 전통 가옥은 중앙에 마루가 있고 좌우로 방과 곡물 저장고인 고팡이 겹으로 위치해 있다는 것도 후에 알았다.

세커리(세칸 집) 가옥인 이 집의 밖거리(바깥채)는 결혼한 자녀가 사는 집으로, 한 울타리 안에서 살지만 부모와 분리돼 따로(별도로) 경제생활을 해나간다.

6백여 평의 대지 한가운데 들어앉은 안거리는 동남향으로 자리 잡았으며 맞은편에는 밖거리, 그 사이 동북쪽에 모커리가 배치돼 있다.

안거리는 안채로 집주인 부부와 결혼 전의 자녀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며 모커리는 곡물을 찧고 보관하는 방앗간 기능과 창고를 겸한 장소다.



지금은 귤밭이 된 텃밭 ‘우영’과 화장실인 ‘돗통시’ 옆에서 인기척이 나기에 사진을 찍겠단 양해를 구한 뒤 이런저런 얘길 나눴다.


양금석 씨가 시아주버님 되신다는 할머니는 여기서 살지는 않고 드나들며 귤 농사만 짓는다고 했다.

통시 안에 생강 비슷한 식물이 자라기에 이름을 물으니 양하(양애)라 했다


제주 특산물이라 첨 보는 식물인데 곁뿌리로 나물이나 장아찌를 만든다고.


추석 즈음되면 양애 본 줄기 옆 땅에서 새로 돋아나는 죽순 같은 검자줏빛 순을 식재료로 쓴다.


딸내미가 내 체질에 잘 맞는 식물이니 제주에 살 때 많이 드셔~했기에 데쳐서 나물로도 먹고 간장 초절임도 만들어 두었다.


미묘한 향이 나며 섬유질이 많은 식물로 일본에서 살던 제주사람들이 귀향하며 챙겨 온 식물이라더니, 딸내미도 동양마켓 중 일본 식재료 파는 데서 양애를 구했다고.



제주 가옥은 특이하게도 집집마다 굴뚝이 없었다.

바람 심한 제주라 아궁이로 들이치는 역풍 때문인가 했는데 연유 또한 독특했다.

원래 취사와 난방을 분리해 ‘정지’(부엌)에서는 화덕을 이용해 조리하고 난방은 ‘글뚝’(난방용 아궁이)을 통해 해결한다는 것.

육지에서는 응당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데 여기서는 서로 따로이 뒀다는 게 희한했다.

안거리 정지 앞에는 물팡이 있었다.

아낙네들이 물을 길어 나르던 물허벅을 올려놓는 물팡은 오래전부터 있던 그대로라고 했다.

물허벅이 없는 편이 오히려 인위적 냄새가 덜 나는 것이, 즉 일부러 소품으로 꾸며놓은 티가 나는 것보다 한결 나았다.

한 가계의 경제력을 과시하는 항아리들을 죽 늘어놓은 모커리를 보나 따나 큰 살림 운영한 전형적인 부농의 가옥구조 같았다.

ㄷ자형 집을 둘러싼 귤밭엔 감귤 노르스름 익어가고 방풍림처럼 동백나무 청청히 에워싼 가옥은 참 편안해 보였다.

모커리 옆에 자리한 돗통시는 현무암을 쌓아 만든 원형 그대로 보존이 잘 돼 있었다.

원래 용도를 훤히 유추해 볼 수 있는 돌의 구조가 흥미로워, 작대기 하나 세워둔 상상을 하며 설핏 웃었다.

꿀꿀거리는 돼지가 살고 있을 듯한 통시 안 돼지집의 새로 엮은 뾰쪽 지붕도 햇 거라 산뜻했다.

다만 출입문인 정랑이 따로 없어 정주석에 걸어둔 통나무가 안 보이는 점 고개 갸웃거려졌다.

대가족이라 문단속을 할 필요가 없었던 걸까.

타임머신을 타고 간 1930년대의 살림살이 넉넉한 제주인 생활상을 둘러보는 쏠쏠한 재미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선 육지와 너무도 다른 삶의 양식들이라 마치 다른 나라 가정의 안자락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제주어 사전이 나와 있듯 한글이라도 통역이 따라야 할 만큼 쓰는 말의 이해도가 낮은 것도 사실이다.

그뿐 아니라 풍습과 문화가 달라 낯선 감이 들기도 하는 제주와 언제쯤이나 스스럼없이 친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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