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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판 Aug 26. 2021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코로나 시대를 사유하는 지젝의 두 번째 책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는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진단하는 책이다. 시기상으로 봐도 『팬데믹 패닉』의 후속이라 할 수 있다. 장마다 짤막하지만 지젝 특유의 재기가 엿보이는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책은 한 늙은 공산주의자 철학자가 팬데믹 시대에 이르러 깨달음을 촉구하는 내용이라 요약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요약으로만 얄팍한 면이 있으며, 세계를 굽어보는 지젝 특유의 성찰이 현 시대와 어우러져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강점이다.


지젝의 주장을 살피기 위해서는 미국과 유럽을 살펴야 한다. 지젝의 진단에 따르면 미국와 유럽은 코로나 초기와 그 이후에도 자유를 위한 명분을 내세워 시위를 했으며, 이로 인해 각 국가는 다소 개방적인 정책을 취했다. 이는 두 번째 감염병 유행 이후 방역적으로는 코로나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트럼프 같은 우익 포퓰리스트의 실수를 덮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테면 봉쇄를 반대하는 우파 포퓰리스트(일론 머스크, 이방카 트럼프)와 일부 급진 좌파(조르주 아감벤)의 생각이 일치했고, 이것은 미국과 유럽 사회의 큰 혼란을 초래했다(10장). 또한 그레타 툰베리와 버니 샌더스가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했기에 코로나 시국에서 잊혀 졌다고 지적한다(9장).


특히 지젝은 제논의 역설을 통해 민주주의 운동이 결코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이상’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비유한다. 이는 그동안 지젝이 주장해온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한계가 드러났음을 다시 한 번 환기하는 것이다. 한편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공산주의를 유추하며, 사회적 거리두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사이먼 : “노동자가 스스로 생산수단을 휴대한다. ~ 사회적 거리두기는 공산주의다.”, 지젝 : “맞다. 공산주의다. 그게 바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한 이유다.”).


한편으로 지젝은 '상호접촉의 중단'을 권고하는 아일랜드의 보건서비스집행국의 코로나 시국의 섹스 지침을 통해 현 시대의 섹스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비대면 접촉이 강해졌고, 이에 따른 비대면 데이트도 성행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접촉이다. 적어도 지젝은 접촉을 통한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에 이를 수 있다고 분석한다. 지젝의 고약한 예시를 따른다면, 코로나 시대의 비대면의 사랑은, 포르노 배우가 사랑 없이 이뤄지는 섹스에서 오르가즘에 이르기 위해 포르노 사이트를 틀어놓는 행위와 흡사하다. 이것은 섹스와 성 외에도 디지털로 연결되는 행위(그리고 이와 관련된 전망과 유토피아)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지젝은 일상생활로의 완전한 복귀를 바랄 수는 없지만 지나친 포스트 휴먼의 미래를 낙관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분석한다.


자유와 통제,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와 디지털 디스토피아 사이에서 우리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에 지젝은 새로운 공산주의의 도래를 주장하며, 이를 위한 각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안은 제시되어 있지 않으며 대신 여러 대상을 비판하며, 예시를 통해 현 상황을 짚어준다. 특히 이는 발리에르에 대한 비판으로 잘 나타난다. “모든 ‘투쟁’들이 잠재적으로 하나의 독특한 혁명적 운동으로 합쳐질 거라는 관념은 내 생각엔 다소 순진하게 느껴진다. ~ 사람들은 먼저 살아 남아야 한다.”라는 발리에르의 주장에 지젝은 “우리가 정말로 살아남고자 한다면 새로운 공산주의와 같은 일이 등장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지젝은 같은 맥락의 다양한 사례를 농담처럼 제시하며 강박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자처하지만 그럼에도 현안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며 현실적인 입지를 갖고 있다. 지젝에게 어디까지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당면한 현실로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이지만, 동시에 시스템의 문제도 존속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렇기에 ‘코로나가 비참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비참한 것이다.’라는 예시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젝의 주장이 곧장 와닿지는 않는다. 우리나라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일별로 백 명대라는 비교적 낮은 확진자를 이어오고 있다가 지난 7월부터 폭발적으로 늘어 2천명을 웃돌고 있는 중이다. 이 와중에 우리는 더 철저한 통제를 원하거나 혹은 한계를 인식하고 그저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었다. 세계적으로도 한국은 방역 모범국으로 평가받았지만, 결국 지젝의 진단대로 세계적인 협력이 없으면 이마저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북방에 북한을 두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남아 있는 시점에서 과연 지젝의 새로운 공산주의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히려 한국은 다른 선진국의 부진으로 인해 양극화는 더 심해지더라도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 윤택해질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뜬금없는 비판은 지젝 특유의 고집처럼 느껴진다. 지젝은 통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정치적 올바름과 연결지어 정치적 올바름도 역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하지만 지나치게 느껴진다. 이는 연대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말 정치적 올바름이 연대를 방해할까? 지젝의 방식대로 거꾸로 뒤집으면 연대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정치적 올바름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주장에는 어디까지나 연구자적이고 지젝적인 끼워 맞추기가 있는 셈이다. 이런 부분을 유의하면서 읽는다면 현 시대를 사유하는 데에 충분히 음미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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