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노벨문학상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생각 없이 살아도 되는 건가?’
들숨에 놀란 아침 찬 공기처럼,
이게 맞는 걸까. 맞는 삶이란 있는 걸까.
불안이 몰려온다.
“넌 너무 생각이 많아.”
나무라듯 말한 그의 한마디.
생각이 많아서 피곤하던 시절. 그런 때가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에 의하면
생각하다(cogito)의 어원이 '흩어져 있는 것들을 한데 모으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모으다'라는 뜻의 cogo에 어떤 행동의 빈번함을 나타내는 접미사 -into가 붙은 것.
cogito의 원래 뜻은 '자주 모으다'인데, 사람들이 어떤 것을 한데 모으는 마음의 행위에만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생각하다'라는 의미로 고정되었다는 거다.
-이승우, <고요한 읽기> 서문 중에서
생각을 모아 사유하고 글을 쓰는 일.
언젠가부터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저 하루하루 흘려보내는 것만 같다. 생활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하나씩 해결하고 지나감에 안도하는 단순한 삶. 한때 꿈꿔왔던 소박한 일상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애써 뇌를 쓰지 않고 고만고만 이만하면 됐지 머... 하는 인일한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약속을 청해올 때도 발동한다. 서울과 떨어져 있다는 핑계로 모험하지 않고,
주말엔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무리하지 않는다.
시간보다, 누구를 만난다는 마음의 문제이다.
"어떻게 지냈어?" "왜 이렇게 살쪘어."라는 물음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얼마 전 친구로부터 네이버 속보보다 0.1초 빠르게
"노벨 문학상 한강이래!"
뭐어? 네이버에 검색하고 로딩이 되는 순간까지 꿈인가 싶었다.
단 한 줄의 기사를 보고서도 믿지 못했다.
와... 와... 입이 떡 벌어져서 책 읽기 좋아하는 몇몇 친구들에게 소식을 나누고
가슴이 콩닥콩닥 하는 와중에 부끄럽기도 했다.
한강 작가님이 대단한 건 알았지만 부끄럽게도 그의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대학 때 읽은 시 몇 편과 문학상을 받은 단편 소설 정도.
<채식주의자>는 도저히 읽을 엄두가 안 났고, 다른 작품들도 제대로 마주하기보다 피하는 편에 속했다.
몇 장 읽다가 몸이 아픈 느낌이었다.
노벨 문학상이 주는 위엄에 시집 한 권과 소설 한 권을 샀다.
일주일 후에 도착한 47쇄 본 시집에는 짧은 작가 이력이 있었다.
'노벨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노벨문학상을 타지 않았을 때도 작가 한강은 여전히 한강이었겠지만. 그래도. 시크하다.
앙드레지드, 아니 에르노, 한강!
외국 작품이 고고하게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다. 원서로 읽는 자부심.
그것을 이뤄준 것이다. 그녀의 말과 출간 인터뷰, 이십 대 등단 후 한 프로그램을 통해 떠난 여수여행까지
아이돌과 K팝만이 오르던 SNS 피드에는 한강 작가님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내 마음도 덩달아 둥둥 떠다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글 쓰는 일과 삶에 대해 한 말을 들었다.
글 쓰는 것보다
사는 게 훨씬 더 힘들어요.
글 쓰는 것은 목소리를 주고
세상과의 통로를 주고
누군가에게 어떤 충일감을 주고
자유를 느끼게 해 주니까요
사는 것보다 더한 일은 없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 괜스레 안도한다.
쓰는 것보다 살아내는 일.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태초에 사념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들.
어릴 적에는 생각이 많고 호기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 방송작가의 미덕이라며
우쭐댔던 것 같다. 지금은 생각의 끝에 자괴감과 허무함이 생겨버리는 탓에 생각을 중단하고 만다.
더 마주하고 살아낼 것. 쓰면서 자유로울 것. 내게 필요한 두 가지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네가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서사' 중에서
*박상영 에세이,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