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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아침을 열었던 기억

카페 아르바이트를 마치며...

by 알미

새벽부터 비가 내려서 31층에 있는 카페의 큰 창들은 안개가 한가득이다.

마지막 겨울의 인사처럼 차분하고도 쓸쓸하다.


커피 그라인더에 "촤악-" 원두를 붓는다.

"내는 이 소리가 꼭~ 어릴 때 쌀 씻는 소리 같더라고."

청소 반장님이 경상도 사투리로 말씀하신다.

"네. 정말이네요."

카페 오픈을 하면서 가장 좋은 순간이다.

잘 말려진 행주를 개고, 원두를 쏟으며 맡는 진한 원두향.

처음 뽑은 에스프레소를 반장님에게 드린다.

"이거 받아도 되나?" 하시면서 늘 웃으신다.


"연한 아메리카노요. 뜨겁게요."

파일을 옆에 끼고 천천히 잔걸음으로 문을 여시는 분은

단골 어르신이다. 그는 오픈 시간인 10시부터 1시까지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원고를 교정하시고 글을 쓰신다.

중간중간 꼬마 손님들이나 가족단위 손님들로 카페 안이 소란스러워져도

살짝 구부정한 등은 움직이지 않는다.


토요일. 카페 주문이 잔잔한 파도 같다.

적당히 템포를 가지고 들어오고 나간다.

이 정도면 꽤 좋은 출발이다.


오후쯤 되면 귀여운 커플이 방문한다.

콘센트 옆 창가 자리에 노트북을 연결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킨다.

도토리처럼 나란히 붙어 앉은 모습만으로도 참 예쁜 젊음이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이 카페는 계절메뉴가 있다.

여름에는 팥빙수가 인기 만점이다. 가격에 비해 실한 팥의 양과 맛으로

작년 내내 큰 팥통 뚜껑 따기로 애를 좀 먹었다.


살짝 우유를 깔고 잘게 간 얼음을 쌓고 연유, 팥, 떡을 얹고 콩가루를 듬뿍 뿌리면 완성이다.

주문이 많아 거의 기계적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세팅에 완벽 적응이 될 무렵 가을이 찾아왔다.

가을부터는 붕어빵처럼 굽는 커피콩빵을 판다.


카페 출근 이후 주말 오전에는 루아와 4시간 떨어져 있는데

아침마다 가지 말라고 성화이면서

어린이집 친구들에게는 우리 엄마 팥빙수 가게에서 일해~ 하며 자랑했다고 한다.


포스기 옆 구석진 테이블은 구경 온 루아 전용석이다.

손님이 없을 때 초코라테를 만들기 위해 초코시럽을 슬슬 저어보거나

폼밀크 만드는 것을 저만치 떨어져 구경하는데

스팀 소리가 꼭 치~코오~~~ 키! 하는 것 같다며

"엄마 치코치~ 멋있어!!!" 한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잠들기 전 누워

치~~~~ 하며 끌어안고

코오~~~하면서 코를 비볐다가

키! 손동작과 볼뽀뽀로 마무리하는 치코키 퍼포먼스로 잠이 든다.

따뜻한 라테 음료를 만들 때마다 루아가 생각난다.




지난해 1월, 이사를 오기까지 마음 고생한 것들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는데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버린 듯 몸상태가 엉망이었다.

뚜렷한 원인이 없는 몸살과 기침은 밤마다 잠 못 이루게 했다.

삶의 의욕과 질이 바닥에 떨어졌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하기 싫었다.



여름아,

이제 나는 먼 것을

멀리 두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내가 나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으로


- 안희연, <당근밭 걷기> 중 시 '야광운'에서


그렇게 봄이 지나고 여름에 엘리베이터 벽에 관리사무소 구인 글을 봤다.

주말 오전 4시간 카페 아르바이트였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시작하는 것.

'먼 것을 멀리 두고' 나를 돌봐야 했다.


밀려드는 주문과 긴장감에 몇 주 월요일은 한의원에서 보내기도 했지만

주말 오전, 빈 공간을 깨우는 일은 두고두고 기억이 날 것 같다.


영화 <마담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서 보면

"기억은 약국이나 실험실과 비슷해서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는데

먼 훗날, 이 카페에서의 기억은 마음속에 어지럽던 것들을

단순한 노동으로 열을 내려준 해열제로 기억될 것 같다.


이제 주말 아침, 아이가 아무리 얼굴을 문질러도

끝까지 자는 척할 수 있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 설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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