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생활과 묘한 평행이론이 공존했던 어느 날
"그냥 좀 입을 수 없어?!!!"
기분 좋게 일어나 사랑스러운 말들을 주고받다가도
옷 입을 때만 되면 아오! 뒷목 잡게 만든다.
분명 어제 입을 옷을 정해놨건만 생각보다 밝아진 봄날씨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청반바지를 꺼냈다가 스타킹을 찾고, 재킷이 마음에 안 든다며 겉옷 꺼내기 여러 벌.
이번엔 여름 원피스를 입겠다고 난리다.
루아는 다른 아이들보다도 일찍 공주 드레스며 샤스커트를 겹쳐 입기로 유명해서
어린이집 선생님과 동네 엄마들에게 일찍이 눈도장을 찍었다.
여름날, 건조기 대신 써큘레이터 앞에 주르륵 드레스를 말리는 나에게
육아 보살이라고 위로해 주었다.
외출복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내복 위에 입던 하얀 레이스 드레스는 뽀로로의 안경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문신처럼 잘 때도 입어서 그 옷을 세탁하려면 몇 날 며칠 작전을 세워야 했다.
드레스가 샤워하고 싶다고 우는 척도 해보고,
옷장의 드레스들이 자신을 픽! 해주지 않음에 화가 나 있는 잠자리 이야기를 지어냈었다.
아이에게 단호하지 못한 면도 있지만 그까짓 거~ 드레스쯤이야 라는 생각이 컸다.
한 번도 입고 싶은 새 옷을 입었던 기억이 없던 어린 시절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대가족 속에서 자란 나는 입고 싶은 옷이나 내 방을 몰래 상상하기만 했지 속마음을 강하게 주장한 적이 없다.
그런 내가 낳은 루아는 늘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
특히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대한 기준이 명확해 신기하게 보게 된다.
강도가 좀 남달랐던 일화가 하나 있다.
어린이집에서는 '키즈노트'라고 하는 앱으로 교사와 학부모가 소통한다.
아이의 놀이 사진과 교사가 본 아이의 행동, 말 등을 적어주는데
특히 아기 때는 매일 자세하게 적어주신다.
루아가 3살 때, 새배 행사가 있어서 드레스 스타일의 한복을 입었는데 퍽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내 생애 가장 큰돈 들인 한복이긴 했다)
선생님이 보내온 키즈노트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어머님 루아가 늘 밥을 두 그릇씩 먹는데 어쩐 일로 몇 숟가락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기운이 없다고 하네요. 눈물도 조금 글썽여서 아픈 줄 알았는데 열은 없었고요.
혹시나 해서...
"아침에 입은 한복 다시 입고 싶어서 그래?"
물으니 끄덕여서 다시 입혀주었습니다. 방긋 웃으며 밥도 잘 먹었어요.
긴치마 때문에 어머님이 늘 미안하다고 하시는데 루아는 예외로 할게요.
마음껏 입게 해 주세요.]
삼손의 머리카락이 이보다 더 강력할까. 밥맛까지 제압한 루아의 옷부심은 대단했다.
7살이 된 지금은 핑크가 치렁치렁한 레이스, 긴치마는 딱 질색이라고 말한다.
대신 프레피룩이나 아이돌 언니들 같은 짧고 콘셉트가 확실한 '언니미'를 추구하고 있다.
안 입던 바지도 종종 입는데 요즘엔 청바지나 테니스 치마를 선호한다.
아침마다 루아에게 A안, B안, C안까지 보여줬지만 컨펌에 실패했다.
어느 순간부터 A 안이 단박에 컨펌이 되고, 거울 앞에서 말도 안 되는 귀여운 포즈를 취하면
그날 하루가 다 즐겁다. 오늘처럼 반대인 날은 집안일을 하다가도 생각나고
요즘 트렌드는 어떤가 아동복을 찾아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방송작가 8년 차 정도 되었을 때 좋은 기회로 기업에서 2년 정도 카피라이터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주요 업무는 직원들이 로그인할 때 보이는 로그인 화면을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구성하고 카피를 쓰는 일이었다.
매일 컨펌을 받았는데 상무님 컨펌이 나지 않으면 집에 갈 수 없는 서바이벌 같은 생활이었다.
(그 마저도 방송작가일보다 규칙적이어서 즐겁게 했던 기억이 난다)
나를 증명하고자 매일 많은 양의 콘텐츠를 흡입하고, 치열하게 노력했다. 1안, 1-1안, 2, 3, 4안까지
대비했었는데 지금이 꼭 그 상황 같아 갑자기 웃음이 터져버렸다.
회사생활이던 양육이던 웃전 모시기는 쉽지 않다.
'제발 그만 좀 하라!'라고 아이에게 한바탕 쏟아부은 날은 유난히 마음이 어렵다.
빨래를 널고 옷을 개키다가 문득 언니들에게 내림받은 청바지가 생각났다.
밑단을 자르고 쪽가위로 쓱쓱 긁어 올을 풀러 보았다.
회장님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