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세살 루아

가장 좋은 건 쓸 수 없다

한 달 매일 글쓰기 도전기 D+12

by 알미

로맹 가리의 소설 <흰 개>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책을 쓸 때는, 이를테면 전쟁의 처참함에 대해 쓸 때는 처참함을 고발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을 떨어내려고 쓰는 것이다.



책을 만드는 거창한 글쓰기는 아니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시작한 건

덜어내고 싶어서였다. 밀려드는 불안함과 나 자신이 희미해지는 상실감.

스스로 열심히 살아온 건 같지만, 특별히 명징하지 못한.

대충 만들어서 부서질 것만 같은 느낌인데 아이를 낳고 큰 사고 회로가 바뀌어 버렸다.

무력감과 갈증이 공존하면서 마음이 괴로운 날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가장 좋은 건 쓸 수 없다. 진짜인 것, 불의 핵, 어둠의 씨앗, 사랑의 시발점 같은 것.


어디선가 이런 문장을 읽었다. 써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쓰지 못한 '그 장면'

'찢어진 페이지'라고 불린단다. 누구나 인생에서 찢어진 페이지 몇 장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삶의 찢어진 페이지를 글로 이어가 보자 싶어 일기 같은 부끄러운 글을

썼다 지웠다 한다.




한 독립서점에서 주최하는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다. 오늘로 꼭 12일 차가 되었다.

'아이와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정해 매일 던져지는 질문에 대해 200자 내외로 짧은 글쓰기를 한다.

쉽다고 생각했는데 하면 할수록 어렵다. 대주제에 소주제를 또 나누니 글쓰기가 루즈해질 때도 있었고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글자수의 제약에 하루 종일 고군분투하다 결국 메모장에 쓴 문장을 조합해 만족스럽지 않을 때도 많다. 장점도 있다. 생각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주는 것. 매일 어떤 것에 대해 고심하는 것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30개의 조각이 모이면 무엇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더 다듬어서 시리즈로도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단 몇 가지만 모아보았다.



# 나에게 사랑의 모양은?


채워지지 않는 구멍하나가 있었다.

사랑받을 때조차 채워지지 않았던 결핍의 모양.

부풀어 오르는 빵처럼 오르락내리락 리듬을 타는 잠든 아이의 두 볼,

모서리 없이 통통한 두 팔로 내 목을 꼭 끌어안는 둥근 마음,

참새처럼 부지런히 쫓는 동그란 입.

나의 결핍을 채워준 가장 강력한 원.



# 내 삶에 큰 영향을 준 사랑은 어땠나?


매일 새벽 묵주알을 돌리던 뒷모습.

손가락에 묻힌 바셀린을 입술에 바쁘게 발라주던 손.

매 순간 함께 있을 수 없음을,

내가 해 줄 수 없는 것들이 많기에 두려웠을 그 마음.

‘안녕, 너로구나!’ 눈 맞춤 한 순간, 고스란히 전해져 울컥했다.

이내 무서워 도망치고 싶었다.

사랑받기만을 바라던 나를 기어이. 사랑 한가운데 우뚝 세워놓고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준 사랑.



# 사랑이 언어가 아니었다면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럼 같이 그림 그리자!” 눈만 뜬 휴일 아침.

아이에게 사랑을 묻자 ‘안아주는 것?’이란다.

볼을 비비고 코를 맞대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 오동통 짧은 팔다리, 동그란 엉덩이와 배가 치명적인 내복자태.

움직이는 사랑이다.

말보다 더 크게 품어주는 포근함. 한겨울의 입김.

네잎클로버인 줄 알았는데 저마다 사랑이었던 세잎클로버.

IMG_5478.heic 휴일 아침. 루아가 그린 사랑 3부작


# 상처를 안고도 사랑할 수 있을까?


깨지지 않은 마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이 있다.

음 누군가의 전부가 되어보았다.

힘들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서로 울부짖으며 할퀴어댔다.

상처를 주고도, 상처를 받고도 사랑이 깊어질 수 있다는 걸.

미안함과 애틋함이 겹쳐진 마음은 상처 없이 말간 얼굴보다 더 깊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봄날씨처럼 맞추기 어려운 컨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