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찾아내려 애쓰는 것들

나만의 구덩이를 파고 있을 때

by 알미

일요일 밤이 되면 기대한다.

내일 아침, 아이를 등원시키고 창문을 활짝 열고 가장 급한 정리만 끝내고.

몸에 가장 안 좋은 점심을 사 와 입 한가득 넣고 드라마를 보며 와구와구 씹으며

혼자임을 만끽하리라. 다음 끼니, 사는 걱정, 아이 교육 모두 로그아웃하고 오롯이.


아이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셔틀버스를 마중하면서 희망에 부푼다.

'잘 다녀와. 우리 서로 재밌게 놀다 만나자!'

창문을 사이로 가장 밝은 표정과 제스처로 아이를 보내고 돌서는 순간,

다른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커피 한 잔..."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과 지쳐 보이는 표정, 핏기 없는 입술색이 내 마음을 잡아 끈다.


작정하고 뒹굴거리기로 했지만 왠지 짐을 좀 덜어주고도 싶었다.

각자의 킥보드를 집에 두고 나는 노트북 가방을 챙겼다.

그래 나간 김에 뭐라도 쓰고 오자.


하얀 테이블에 큰 사이즈의 아이스 카페 모카와 라테가 처음으로 마주했다.


"많이 힘들었죠. 주말도 내내 보내고."


일주일 동안 독감으로 등원하지 못한 연년생을 돌본 터라

잠을 못 잔 상태인데 어디든 털어놓고 싶었다고 한다.

독일에서 생활하다 처음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게 된 사연부터

연년생 형제를 둔 엄마의 고충,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간과할 수 없는 문제들을 나누다 보니

몸에 소름이 돋았다가 마음이 힘들었다가 웃었다가 안쓰러워 짠했다가

3시간 동안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 와중에 통화를 하며 해결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 스케줄을 듣고 나니

운동회를 다녀온 듯 몸이 노곤해졌다.

그녀를 보내고 잠시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아이를 기르면서, 아니 살면서 매번 끊임없는 고민에 머리 아파하고

생각지 못한 위기, 내 상식으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는 사건이 생긴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결국 나의 중심을 잡고 단순화시켜보는 거다.


그리고 신산한 마음이 가시지 않을 땐

기어이 위로의 위트를 동냥해 본다.

이를테면 이런 것.


나의 집에서

대접할 만한 것은

모기가 작다는 것


마쓰오 바쇼, <바쇼 하이쿠 선집>



허기가 돈다.

아침에는 기름진 토스트를 먹고 싶었는데

갑자기 채소를 잔뜩 넣은 건강한 샌드위치가 생각난다.

씩씩해져야지. 흔들리지 말아야지.

다른 사람들은 성큼성큼 앞서나가고 잘 해내는 것만 같은데

제자리걸음으로 한 없이 깊은 구덩이를 파고 있을 때면

이렇게 작은 다짐을 해본다.

한 땀 한 땀 바느질 해 가다 보면

여름을 견딜 수 있는 기운이 생길 거다.






희망은 문이 아니라 어느 지점엔가 문이 있으리라는 감각,

길을 발견하거나 그 길을 따라가 보기 전이지만

지금 이 순간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길이 어딘가 있으리라는 감각이다.

때로 급진주의자들은 문을 찾지는 않고

벽이 너무 거대하고 견고하고 막막하고

경첩도 손잡이도 열쇠 구멍도 없다고 벽을 비난하는데

안주하거나, 문을 통과해 터벅터벅 나아가면서도 새로운 벽을 찾아낸다.


-레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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