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 기차가 칙칙 떠나간다. 과자와 설탕을 싣고서~"
10살 소녀 셋, 골목에서 고무줄놀이가 한창이다.
그 시절 나는 동네 친구들과 골목에서 매일 고무줄놀이를 했다.
그날도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하려고 골목에서 만났다.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고 막 시작하려는 무렵, 화창했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불안한 마음이 스쳤지만, 우리는 놀이에 집중했다.
줄을 잡은 친구들은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뛰는 친구의 발끝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한여름 무더위를 식혀주는 반가운 비였지만, 10살 소녀 셋은 울상이 되었다.
우리는 황급히 우리 집 대문 앞 지붕 아래로 몸을 피했다.
쪼그리고 앉아 하늘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에게 방에서 조용히 놀겠다고 말씀드린 뒤, 친구들과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셋 중 한 명밖에 고무줄을 하지 못해 김이 샌 우리는 방에서 조용히 고무줄놀이를 이어가기로 했다.
엄마는 안방에서 전화 통화를 하느라 우리가 방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지 몰랐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무릎 높이에서 시작했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점점 대범해졌고, 허리, 가슴 높이까지 도전했다.
그러다 내 차례에서 결국 사달이 났다.
양말을 신은 채 다리를 높이 들어 고무줄을 넘기려다 미끄러졌다.
순간적으로 바닥에 얼굴이 부딪혔고, 아랫입술 근처에서 피가 흘렀다.
놀란 친구들은 어쩔 줄 몰라 했고, 나는 당황한 나머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엄마에게 달려가 다쳤다고 말하자, 엄마는 한참을 지혈한 뒤 연고를 발라 주었다.
거울을 보니 입술 아래쪽 살이 1센티가량 찢어져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 부위가 부어오르고 멍이 들었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부어오른 상처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왠지 치료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밖은 어두워졌고 병원 진료는 끝났을 터였다. 나는 엄마에게 동네 약국에 가서 물어보자고 했다.
그 시절엔 의약 분업이 되지 않아 약국에서 약사에게 상담을 받고 약을 처방받을 수 있었다. 엄마는 약사와 친분이 있었고,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주택가 길을 걸으며 약국으로 향했다.
어둠이 내려앉아 집집마다 하나둘 불빛이 켜지는 밤길, 나는 불안감에 휩싸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사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걱정만 가득했다.
'왜 양말을 벗고 하지 않았을까. 양말만 벗더라면......'
양말을 벗고 고무줄놀이를 해야 덜 미끄러울 거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철이 들었을 리가 없다.
집 안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겠다는 생각부터 이미 철없는 아이의 행동이었다.
내가 방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다가 다쳤다는 것을 알게 된 엄마가 양말이라도 벗고 했다면 덜 미끄러웠을 텐데... 했던 말에 후회가 가득 밀려와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약사는 병원 응급실에 가는 게 낫겠다고 했고, 우리는 급히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어수선한 응급실에는 이미 도움이 필요한 응급 환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엄마는 의료진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렸다.
성형외과 전문의는 자리에 없었고, 수련 중인 전공의가 내 상처를 봉합해 주었다.
수술대에 눕기 전부터 겁이 났지만, 마취를 할 것이니 아프지 않을 거라는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쨌든 여기까지 와서 울며불며 할 수는 없었다.
수술을 마치고 나오니 이미 밤은 깊어있었다.
며칠 후, 엄마가 동네 아주머니에게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그때 젊은 의사가 수술을 했는데, 손놀림이 너무 거칠더라."
그래도 나는 시간이 지나면 흉터가 매끈해지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볼록하게 남은 흉터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더욱 도드라져 보였고 평생 내 콤플렉스가 되었다.
엄마와 언니는 흉터가 입술 아래쪽에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고 자주 위로했지만, 내 눈에는 너무나 선명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흉터에 대한 감각이 조금 무뎌지긴 했으나, 그날의 기억과 함께 속상함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몇 달 전, 성형외과에 찾아가 상담을 했다.
흉터를 작아 보이게 할 방법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수술을 한 지 30년도 더 지났기 때문에 그동안 외과 기술이 많이 향상되었으리라는 합리적인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사는 "크게 좋아지진 않겠지만, 한 번 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몇 년 전 여러 병원을 다녔을 때는 하나같이 "큰 효과가 없을 것"이라며 부정적이었다. 그때 크게 실망했지만, 이번엔 긍정적인 답을 들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렇게 나는 흉터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후속 치료 중이다.
매일 재생 밴드를 붙이고, 4주에 한 번씩 병원에 간다.
이전보다 많이 매끄러워져서 만족스럽다.
오늘, 엄마가 오랜만에 우리 집을 방문했다.
나는 밴드를 떼고 흉터를 보여주며 신나게 이야기를 했다.
"엄마, 정말 속이 후련해. 몇 년 전 어떤 병원에서도 수술을 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엉엉 울었었거든. 운 좋게 좋은 의사를 만났고 수술이 잘 돼서 정말 좋아."
라며 밝게 웃었다.
그렇지만 엄마의 표정은 어두웠다.
먹먹한 얼굴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딸이 그렇게 오랫동안 그 흉터에 마음 쓰고 있었다는 걸 오늘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어린 딸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을까.
아니면, 오랜 시간 속상했을 딸이 안쓰러워서였을까.
가부장적이고 고집이 센 남편과 살며 세 아이를 키운 엄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웃음과 말을 점점 잃어갔고,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셨던지 하교 후 집에 가면 텅 빈 집이 항상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나는 외로웠고,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다.
딸의 이야기를 듣자, 우울증에 매몰되어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과거가 떠올랐고 그로 인한 죄의식과 미안함이 내 흉터에 투영된 건 아닌지.
내가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흉터는 내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상처가 한데 뭉쳐져 내 몸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흉터는 35년 만에 내 얼굴에서 사라졌고, 나는 홀가분해졌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흉터를 그토록 없애고 싶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어린 시절의 상처를 종종 되새기는 내가 이제는 거기서 자유로워지길 바랐다.
엄마의 마음 속 상처도 내 흉터와 함께 사라졌으면 좋겠다.
내가 오래된 흉터를 없애고 홀가분해진 것처럼, 엄마도 가벼운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