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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와피아노 Aug 24. 2023

대단한 남편

자기 정말 멋져!!

며칠 전 남편은 지인과 통화를 하다 '그래도 학교에 가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그 지인은 남편 대학 때 은사님의 사모님이셨다. 그분은 몇 년 전 재직하던 대학교에서 명퇴를 하고 유리 공예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이다. 당신도 학교에 학을 떼고 나와서는 그 뒤로는 학교 쪽은 쳐다도 보지도 않는단다. 그래서 인사도 없이 나왔는데 그게 후회가 된다 하셨다. 마치 경기에서 패자가 된듯한 기분. 그래서 당신은 이제 돌이킬 수 없지만, 남편이라도 그런 후회 남기지 않았으면 해서 조언을 해주셨다. 그래, 학교를 위한 게 아닌 나를 위해 하자라는 생각에 사모님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오늘 아침 남편과 함께 학교에 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남편의 마지막 학교 가는 길, 처진 어깨에 힘을 넣어주고 싶었다. 몇몇 주요 과목 교사 빼고는 퇴직하고 자신의 과목으로 제2의 직업을 삼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남편은 20년 동안 학교에서 안마와 침을 가르치고, 치료하는 일로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왔으니 그것으로 또 다른 직업을 구현할 수 있다. 거기다 착실히 장기 저축을 한 덕분에 당장 다음 달부터라도 연금 같은 돈이 분할 입금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졸업한 지 10여 년이 지난 제자들이 지금도 연락하며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선생으로서 큰 자산이 아닌가. 거기다 바지런한 아내인 내가 있고. 하고 싶은 일 하려고 나와 시작점에 서 있으니 얼마나 들뜨고 흥분되는 순간인가. 그런데 왜 자꾸 걱정만 하고 있냐고. 눈 안 보이고 0에서부터 시작한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에 비하면 100에서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니 신나게 달려보자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학교에 도착했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근무한 상담실

근로 지원 선생님 손에 넘겨주고 나는 잠깐 남편이 마지막으로 근무한 상담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남들이 보면 새롭게 꾸며진 예쁜 상담실에 혼자 앉아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부럽다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은 마치 유배지 같은 곳이었다. 혼자 하루종일 있어야 하는 독방과 같은 곳. 학생들이 원하는 이료(침과 안마) 과목을 가르칠 수 없게 상담교사로 묶어 놓았기에 수업은 아예 할 수 없었다. 남편에게 상담 교사 자격증이 있었던 것이 학교 측에는 이료 교사를 못 하게 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고, 남편은 가르치고, 치료하는 일을 일절 할 수 없게 합법적으로 묶어 버린 장치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근로 지원 선생님과 함께 남편이 돌아왔다. 그 시간이 20여 분. 괴롭힌 윗선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고마운 동료 및 후배 선생님들, 빼놓을 수 없는 영양사 선생님, 보안관 선생님, 그리고 남편 준다고 아침부터 마들렌 만드느라 분주했을 두 분의 여자 선생님들, 가장 지근거리에서 남편의 눈이 되어준 근로 지원 선생님까지. 생각해 보면 고마운 분들도 많은 곳이었다. 힐링 센터 오픈하면 지인 찬스로 할인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눈물 반, 웃음 반으로 학교를 빠져나왔다.


오는 길에 남편에게 자주 침 맞으러 왔던 영석 마트 사장님께도 인사드리자 해서 마트에 들렀다. 여자 사장님만 계셨다. "어떻게 이 시간에 오셨어요? 아직 방학인가요?" 우리는 약간 머뭇거리다 "저 명퇴했어요." 여자 사장님은 처음에는 놀래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제 치료실 하시면 되겠네요. 잘 되실 거예요. 저도 종종 가볼게요. 꼭 성공하실 거예요." 하면서 아낌없는 응원을 해주시는 게 아닌가.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도 그분의 힘 있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집에 도착하니 방금 전에 헤어진 활동 보조 선생님한테 카톡이 와 있었다. 아까 헤어질 땐 내일 또 만날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했단다. 우린 또 만날 수 있으니까 종종 연락하자며 톡을 보냈다.


힘든 때에 진정 고마운 이들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요즘이다. 어려워만 했던 교수님 사모님. 그 바쁘신 분이 긴 시간 통화하면서 들어주시고, 조언도 해주시고. 한 동안 연락 끊겼던 지인이 요 근래에 다시 연결이 되어 생각지 않게 남편을 도와주고 있다. 서울서 종종 우리 집에 오는 분들이 오늘도 와서 함께 저녁과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힘껏 우리를 지지해 주었다. 감사한 이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새기며 한 발짝씩 내딛는 우리의 출발! 다시 뛰는 신중년 우리에게 스스로 박수를 보내본다. 주변에 이렇게 좋은 분들이 많은 걸 보니 그동안 잘 살아왔구나 우리 멋진 남편! 부디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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