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떤 남자랑 결혼할거니?"
재은이와 재현이 남매가 레슨을 올 때면 창밖에서부터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피아노실 창가 담벼락에 꽃들을 놓은 덕분에 이 순박하고, 감수성 풍부한 까불이 남매는 늘 대화가 넘실거린다.
“오빠는 어떤 꽃이 제일 예뻐? 난 보라색 공작 국화.”
“난 다 예쁜데.”
“에이, 하나만 골라봐. 그러면 선생님이 하나 주실 지도 모르잖아.”
“야, 너 선생님이 꽃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걸 주실 것 같아? 꿈 깨!”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어라! 재현이는 나를 너무 잘 아는데? 꽃 하나도 줄 수 없다!!’
나는 밖에서의 대화를 못 들은 척하고는 재은이부터 레슨을 했다. 쉽게 편곡된 바그너의 결혼 행진곡을 배우는 날이었다. 재은이는 피아노 책에 웨딩드레스 입은 자신을 그렸다. 그 옆에 서 있는 신랑은 아주 키가 훤칠하고, 최대한 잘 생기게 그리느라 연필 쥔 손에 힘이 빡 들어가 있다. 하긴 재은이 아빠가 키가 쫌 크니까 아빠같은 남자를 그리겠지.
나는 짓궂은 생각이 들어 재은이에게 질문을 했다.
“재은아~ 너는 어떤 남자랑 결혼하고 싶어?”
재은이가 손가락을 입술 끝에 대고 잠깐 눈을 굴려 고민을 하다가 하는 말!
“으... 으... 음.... 많이 혼내지 않는 남자요.”
“혼내지 않는 남자? 재은이 집에서 사고 많이 치는구나? 하하하”
사랑만 받아온 아이라서 그런지 혼나는 것이 무서웠나 보다. 너무 의외의 대답이라 나는 웃느라 정신이 팔려되묻는 것도 잊어버렸다. 왜 혼내지 않는 남자였을까? 그 의미는 뭐였을까?
그때는 내가 결혼 전이라 나에게는 결혼이 가장 큰 이슈였던 때였다. 그 당시 나는 어떤 남자를 만나고 싶어 했을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잘 믿고, 엄청 자상한 남자? 웃는 모습이 보기 좋은 사람? 거기다 능력이 있어서 난 피아노 레슨을 살살해도 되고, 이왕이면 키도 크고, 유머도 있고, 쫌 생겼으면 좋겠고~ 좋은 거는 다 갖다 붙였구나. 그러니 마흔이 넘도록 시집을 못 갔지.
그러고 보니 여자들은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대체로 자상한 남자를 좋아하는가 보다. 재은이가 표현한 ‘많이 혼내지 않는 남자’라는 뜻을 달리 말하면 ‘자상한 남자’란 뜻이 아닐까? 그런 자상한 남자는 과연 있을까?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시집은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 재은이도 나처럼 노처녀 짝 나는 거 아닐까 하며 은근 걱정이 됐다. 그러다 싱겁게 웃었다. 아직 초딩 1학년 여자애를 두고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너~나 잘하세요~~!!"
그날 남매는 갔지만 난 아직도 어떤 남자가 나의 신랑이 될지 말풍선을 이곳저곳 띄워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으음! 중요한 이상형의 조건을 빼놨네? 많이 혼내지 않는 남자! 결혼행진곡을 치며 결혼을 상상하는 재은이와 결혼행진곡을 가르치며 결혼을 상상하는 나는 정말 많이 닮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수함을 만나게 된다. 나는 이 순수함이 좋아서 피아노 레슨 하는 사실이 벅차고 행복하다. 우리의 삶도 순수한 어느 시절의 사소한 대화처럼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사랑받는, 단정하고, 고른 피아노 음계처럼 말이다.
*위의 글은 '나디오'에 연재한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