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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베르 Apr 08. 2020

희망을 노래하는 작곡가

-어릴 때부터 홈스쿨링 조기교육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까지 못 하는 게 없음)

-학교에서 매번 1등

-대도시 궁정 음악감독이 주관한 오디션에 6등으로 합격

-대도시 영재 예술원에서 장학금으로 엘리트 교육 시작

-변성기가 와서 합창단 퇴출당하는 것이 학칙이었지만 퇴출당하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성적      


여기까지 이력만 봐도 앞으로 이 청년의 인생이 그려지지 않는가? 빈 외곽에서 가난한 선생의 아들로 태어나 금수저는 아니었지만, 똑똑하고 재능이 많아서 줄곧 두각을 나타내고 당당히 대도시 중심부의 엘리트 코스까지 올라간 엄친아. 분명히 이 엄친아는 커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여유 있는 삶을 살았겠거니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바로 비운의 작곡가라 불리는 프란츠 슈베르트이다.

빈의 중심부, 궁정 음악감독 살리에리 밑에서 멋진 재능을 펼치며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던 그가 왜 비운의 작곡가라 불리며 안타까운 생애를 살게 된 것일까? 엘리트 코스의 우아하고 반듯한 예정된 삶을 그가 왜 몰랐겠는가? 한 곳에 잘 정착하지 못하는 역마살 있는 방랑자로 그를 치부하곤 하지만, 그는 자신 안에 흐르는 음악의 소리를 누구보다 올곧게 따라가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작곡 열망을 꺾은 적이 없었던 사람이다. 엘리트 학교를 그만둔 이유도 작곡의 열망 때문이었다. 배워야 할 과목 수가 많아지면서 작곡할 시간이 부족해졌고, 빈 궁정 음악가의 삶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빈 생활을 접고 보조교사 자격증을 따서 아버지 학교의 보조교사로 취직하게 된다. 보조교사는 시간이 넉넉해서 작곡할 여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니 교장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작곡가의 길 대신 교사가 되어 가업을 잇기를 원했다. 아버지와의 갈등 속에 작곡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집을 뛰쳐나와 프리랜서 작곡가의 길을 가게 된다. 그 후 귀족 친구 프란츠 쇼버의 집에 얹혀사는 등 죽을 때까지 안정된 거처 없이 친구들의 집이나 친구들이 얻어다 주는 식량에 의존해 전전하며 살게 되지만, 그러한 초라한 삶에도 그의 내면에 흐르는 음악의 샘은 결코 초라하게 마른 적이 없었다. 만약 그가 자신의 내면의 소리보다 시대에 편승해서 주어진 것을 따라갔다면 그는 아마도 살리에리와 같은 궁정 음악가로 남았을 것이다.

프리랜서 작곡가가 되었을 때 과거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시간과 교사가 되어 고향에 돌아갔던 시간은 헛되이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은 그의 음악 세계를 넓혀주는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보조교사를 하러 고향에 돌아간 1814년, 어릴 때 세례 받은 리히텐탈 교회의 100주년 미사에서 그는 자신의 <미사 바장조> 곡을 초연할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그는 그날 연주자로 만난 소프라노 테레제 그롭(Terese Grob)을 사랑하게 된다. 비록 그녀와의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그녀를 만나고 3일 만에 그를 가장 돋보이게 해주는 장르, 예술가곡 세계의 서두를 여는 <물레 감는 그레첸>이 탄생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15년에 마왕을 비롯한 145곡의 주옥같은 가곡이 작곡된다. 1816년 프리랜서 작곡가의 길을 가게 되면서 엘리트 학교에서 만난 부유한 친구들은 그에게 평생 도움의 손길이 되어준다. 그들은 슈베르트의 음악을 좋아했고 기회 될 때마다 자신들의 모임에 불러 그의 새로운 가곡과 실내악 연주를 듣고 즐겼다. 이 모임이 바로 ‘슈베르티아데’이다. 시인 프란츠 쇼버, 요한 마이어호퍼, 바리톤 미하엘 포글을 비롯한 문학과 음악을 사랑했던 이들의 모임에서 그의 신작들이 발표되었고 사랑받았다.

평생을 가난하게 산 그가 게을러서라고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의 성실한 창작열을 이길 수 있는 작곡가가 몇 명이나 될까? 그는 매일 아침 곡을 썼고 한 곡이 끝나면 바로 다음 곡을 시작했다. 3분 내외의 짧은 가곡을 주로 써서 그런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가 쓴 음악 장르 중에 가곡의 중요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지 다른 장르의 곡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의 소나타나 교향곡의 길이는 얼마나 길고 규모가 있던가! 게다가 그는 단번에 그의 마음속 악상을 써 내려갔다. 끊임없이 내면의 소리를 끌어올리며 산 것이다. 그는 31살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무려 1000여 곡을 남겼다. 10곡의 교향곡, 22곡의 피아노 소나타, 다수의 두 손과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소품, 35곡의 실내악, 4곡의 관현악곡, 7곡의 미사곡, 633곡의 가곡, 그 외 다수의 합창곡과 오페라 적인 작품들이 있다.

그는 이렇게 열심히 곡을 쓰는 노동을 했지만, 생계를 겨우 이어가면서도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홍보하고 제값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의 말년에 쓴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헐값 단돈 20 굴덴을 받으며 영구적으로 출판업자에게 저작권을 넘겨주기도 했다. 출판사는 40년 동안 이 곡으로 27000 굴덴을 벌어들였다.

그렇게 자신만의 길을 꿋꿋이 걸어간 사람이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받았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만 가정을 해보게 된다. 그가 만약 자신이 만든 음악을 조금 더 자신 있게 내보이는 홍보의 기술이 있었다면, 그를 알아봐 주는 정직한 출판업자를 만났다면, 아니 만약 사람들이 좀 더 이 음악가의 삶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주었더라면 그랬다면 그의 마음속 흐르는 음악의 풍성함처럼 그의 삶의 모습도 풍성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삶의 풍성함은 외적인 성공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니, 평생 그의 마음에 머무른 음악이 주었던 즐거움, 자신의 음악을 듣고 행복해했던 친구들과의 교류, 베토벤, 괴테와 같은 존경하는 동시대 음악가와 문학가의 존재와 작품은 분명 그의 삶의 행복이었을 것이다. 그의 사후이긴 하지만, 묻힐 뻔한 그의 작품을 알아보고 알리는데 힘써준 슈만, 자신이 너무나 존경했던 베토벤 곁에 묻히기를 희망했던 대로 오늘날 나란히 빈 중앙 묘원 32구역에 베토벤의 묘비와 나란히 함께 서 있는 그의 묘비, 그의 음악을 통해 오늘도 일상의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의 삶이 결코 연약하고 초라하게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음악은 여기에 소중한 보석을 묻었다. 하지만 더 아름다운 희망이 남아있다.’ 그의 묘비에 새겨졌던 글귀처럼 유려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그의 음악은 성실하게 오늘도 우리에게 아름다운 희망을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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