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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베르 Jul 29. 2017

숙성의 시간

Copyright(c) 2017. All rights reserved by 봄베르


학구적인 성악 연주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미국 가곡 중에 사무엘 바버(1910-1981)의 '수도승의 노래((Hermit Songs)'라는 연가곡이 있다. 짤막짤막한 10곡으로 이루어진 가곡 묶음인데 8세기에서 13세기에 살았던 아일랜드 수도승들에 의해 쓰인 작자 미상의 짧은 시에 붙인 곡들이다. 바리톤 가수로 활동했을 정도로 노래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깊었던 작곡가 바버는 가곡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노래에는 가사와 선율을 유연하게 연결하는 서정적 낭만성이 풍부하며 익살스러운 제스처가 곳곳에 숨어있다. 반주학 공부할 때 '수도승의 노래' 중 몇 곡을 쳐 본 적은 있지만 10곡을 제대로 레슨받아본 적은 없었다. 미국 친구들은 미묘한 음정과 생소한 이 연가곡의 분위기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또 쉽게 표현하는 것 같이 보였는데 내게 이 가곡은 불규칙적인 박자와 익숙지 않은 멜로디와 화성 때문에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레파토리였다. 관심이 가는 곡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악보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어떻게든 악보를 사수하여 10곡 모두 갖고 있었다. 역시나 이 곡들을 갖고 있길 잘했다. 결국은 쓸 일이 생긴다.

이 연가곡 중 마지막 곡인 '은둔하고 싶은 열망(The Desire for Hermitage)'을 쳐야 하는 일이 생겨서 분홍색 영미 가곡 파일 속에서 그 악보를 꺼냈다. 지금 당장 쳐야 하는 곡은 그 곡 하나라서 그것만 악보를 보려고 했는데 이 곡이 조금 익숙해지다 보니 이 연가곡의 다른 곡들도 궁금해졌다. 한 곡 한 곡 쳐보는데 예전에 쳐봤을 때와는 다르게 그리 어렵지 않게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움직여지고 곡의 구조와 텍스처가 눈으로 분석되었다. 편하게 악보에 적힌 음표를 따라가는 손가락과 함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4개의 마지막 노래(Vier letzte Lieder)'를 배웠던 예전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이 곡은 화려한 관현악법의 혁신자였던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작품으로 단지 화려한 것을 넘어서 그의 모든 음악적 어법이 집대성된 묵직한 곡이다. 다양한 화성적 음색의 극대화를 추구했던 슈트라우스는 가곡에서도 피아노 반주뿐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반주 버전을 많이 작곡했는데 이 '4개의 마지막 노래'도 원래 오케스트라 반주곡이다.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된 곡을 피아노로 칠 때 여러 악기로 연주하는 다양한 음색과 풍성한 음향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피아노곡으로 작곡된 것이 아니기에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음악이 굉장히 뚝 뚝 끊어지게 들리고 빈약한 소리가 난다. 이 곡을 배울 때 정말 슬럼프를 겪었었다. 아무리 연습을 해보려고 해도 원하는 소리가 나지 않고 악보가 익숙해지지 않으니 흥미는 점점 떨어지고 연주가 코앞인데 스트레스는 늘어가고 한 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레슨에 들어가 볼품없이 이 곡을 애쓰며 치고 있는데 내 지도교수 Ms. Kibbe 선생님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자, 다음 주에는 이 곡 말고 다른 곡을 가져오렴."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채로 이렇게 생각했다.


'아니, 지금 이 곡을 2달 후에 연주해야 하는데 죽어라 이걸 쳐야지 딴 걸 쳐오라고? 뭔 소리 셔!’


의문 가득한 눈으로 선생님을 쳐다봤지만 선생님은 더 이상 다른 이야기 없이 레슨을 끝내버리셨다. 나도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일주일 동안 그 곡을 잊은 채 연습실에서 다른 곡들을 쳤다. 그런데 일주일 후 정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다른 곡으로 레슨을 잘 마치고 그 후에 슈트라우스 곡을 꺼내어 피아노에 다시 앉았는데 놀랍게도 곡의 구조와 작곡가의 화성적 진행이 눈에 들어오며 어떻게 연습해야 할지에 대한 감이 오는 것이 아닌가! 15도의 온도로 맞춰진 김치냉장고에서 딱 알맞게 숙성된 김치처럼 다른 곡을 치며 연습하는 즐거움을 회복한 마음의 온도로 맞춰진 일주일의 시간 속에서 슈트라우스 곡을 보는 이해력과 연주해낼 수 있는 자신감이 숙성되었던 것이다.

박사학위가 끝난 후 이제는 더 이상 레슨을 받지 않는 상태지만 여러 학생들을 가르치며, 다양한 무대와 상황에서 크고 작은 연주를 하며 이 배움의 숙성이 시간의 결을 따라 계속 닦여지고 있음을 바버 가곡을 연습하며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생소하던 이 음악에 달콤한 흥미를 갖게 되었으니 당장 이 연가곡 모두를 연주할 계획은 없지만 이 10곡을 모두 한 번 제대로 파보아야겠다.

열정은 이런 깨달음의 순간에 예기치 않게 강렬하게 뿜어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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