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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몸이 허해지면 닭을 삶는다.

닭고기와의 인연은 어디까지

by Lou



소울푸드는 아니다.

언제나 생각나는 음식도 아니고 갑자기 먹고 싶어 지는 음식 또한 아니다.

기력이 쇠하는 느낌이 들거나 몸살이 오는 듯한 느낌

몸과 마음에 있던 모든 능력치가 다 빠져나가는 듯 힘들어지는 날이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잘 손질된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물에 담그고 각종 한약재 푸짐하게 넣어 한소끔 끓여낸다.

약재들이 우러나오는 육수에 담겨 푹 익혀진 닭 한 마리

식당에서 사 먹거나 이미 조리거나 밀키트로 나온 백숙 혹은 삼계탕과 같은 맛은 아니지만

조촐하게 집에서 만든 삼계탕을 한 그릇 가득 떠서 뜨거운 김을 호호 불어가며 먹다 보면

지치고 힘들었던 몸과 마음에 온기가 돌며 평안과 위로를 주는 그런 음식이 되어준다.






아버지의 직업 덕에 어릴 때부터 해산물을 많이 먹고 자랐다.

제주산 갈치며 영덕 게, 쥐치포와 말린 오징어까지

우리 가족이 먹는 양이 크지 않다 보니 다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음식을 엄마는 항상 주위 이웃들과 지인들에게 인심 좋게 나눠주시곤 했다.


10살 무렵부터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가 해삼이었다. 시장에서 해삼을 탁탁 썰어 검정 봉지에 담아 주시면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봉지를 손에 꼭 쥐고 하나씩 집어 입에 넣고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던 싱싱한 바다의 맛


다양한 수산물을 즐겨 먹었고 접하는 일이 잦았지만 정작 소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생고기를 구워 먹는 일은 드물었다.

정말 가끔 거실 전체에 신문지를 깔고 박스를 붙여 만든 장벽을 세워야 한 번씩 먹을 수 있었던 삼겹살


차리고 치우는 게 번거롭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부모님이 즐겨 드시지 않는 이유가 컸.

항상 바빴던 아버지와 식사를 하는 횟수보다 엄마와 동생 셋이 단출하게 식사하는 일이 잦아서였을까 고기를 구워 먹는 횟수는 극히 드물었던 기억이다.


대신 닭고기는 매우 즐겨 먹었었다. 집에서도 외식으로도 튀김옷을 입혀 노릇하게 튀겨낸 노랗고 바삭한 후라이드 치킨과 매콤 달콤한 소스를 끓여 튀긴 닭에 골고루 묻혀주는 양념 통닭이 한창 유행하기 시작할 때 우리 가족은 양념치킨보다 더 즐겨 먹던 치킨이 있었다.

튀긴 음식을 선호하지 않으시는 엄마께서 알려주신 집 근처 멀지 않은 곳에 새로 오픈한 훈제 치킨

종종 부모님과 주말 저녁에 신나게 걸어가 외식으로 치킨을 먹으러 가면 책모양의 작은 지우개를 여러 색 중 하나를 고르면 선물로 주셨는데

치킨 먹는 즐거움에 지우개가 생기는 재미까지 쏠쏠해 동생과 신나 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 이모들 중 한 분이 서울로 상경해 치킨집을 몇 년 간 운영하신 적이 있었는데

언제든 찾아가면 맛있게 치킨을 튀겨주셔 자주 먹기도 했고 양념 치킨을 만드는 과정도 직접 볼 수 있어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몸에 약했던 동생에게

날이 추워지면 곧잘 감기에 들던 내게

엄마는 몸에 힘이 나고 기운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항상 준비해두고 계신 닭으로 백숙이나 삼계탕을 끓여주시곤 했다.

따끈한 국물에 닭고기와 찹쌀밥을 적당히 넣어 말아두고 국물이 쏙 배어든 찹쌀밥과 닭고기는 먹다 보면 아픈 것도 다 날아가는 기분이 들고

몸이 따끈해지며 땀이 흘러내리고 쓴 인삼 한 조각을 씹노라면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맛있게 싹싹 한 그릇을 비워서 먹고 나면 그렇게 몸이 개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일련의 음식과 과정들이 몸에 밴 탓인지 각인이 된 것인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내 몸이 조금이라도 힘들어지거나

아이들이 입맛이 없어할 때, 아픈 기미가 보이거나 축축 쳐질 때면 어김없이 닭을 끓일 준비를 하고 있다.

워낙 닭고기를 좋아해 치킨도 자주 먹는 편이지만 냉동실에는 언제나 끓일 수 있는 닭 한 마리가 기다리고 있다. 머지않아 끓여질 날을 기다리며


이젠 아이들이 먼저 ‘엄마! 오늘 입맛도 없고 몸이 힘든데 닭 좀 끓여주세요’가 자연스럽다.

입이 짧아 죽도 잘 못 먹고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은 잘 먹지도 못하고 먹는 양도 많이 작은 둘째가

닭을 푹 삶아 끓여놓으면 밥까지 말아서 두 그릇 순식간에 뚝딱 먹고 일어서면 어찌나 기특한지

그렇게 몸을 보양하고 나면 아픈 몸도 금방 나아지니 어찌 안 끓여 먹일 수 있을까



워낙 4발 달린 고기를 구워 먹는 걸 좋아하고 2발 달린 고기가 물에 담겨있으면 먹기를 싫어하는 남편은

옆에서 대체 닭을 몇 마리나 먹어치우냐며 놀리지만

요리랄 것도 없이 조리도 쉽고 몸에도 좋고 아이들이 잘 먹기까지 하는데 그런 놀림 따위 대수랴.

기온이 내려가고 몸이 움츠러들며 아이들의 기침이 시작되는 겨울이 오면

난 또 조용히 닭을 찾아 헤맨다

이번에는 또 어떤 재료를 넣고 닭을 삶아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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