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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하게 40

흘려보낼 시간은 없다(2)

by Lou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첫 아이를 힘들게 임신하고 극렬한 입덧의 고통과 남편의 잦은 출장으로 임신기간 내내 혼자 집에 남겨졌다.

토하는 입덧이라 먹을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괴로운 상황이었지만 아기에게 무엇이든 만들어 주고 싶었다. 불현듯 떠오른 퀼트!!

대학시절 남편에게 손수 만든 필통을 선물하려 귀여운 강아지 모양으로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들었던 기억이 떠오른 것.


당장 인터넷으로 구매한 재료들로 입덧을 꾹꾹 참고 정성을 다해 태어날 아이를 위해 바느질을 했다.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바느질을 하면 시간도 잘 지나가고 입덧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었다.

아기가 입을 조끼와 아플리케로 장식한 이불, 누워서 놀기도 하고 잘 수도 있는 아기용 보트 침대까지 만들었다.

손으로 천천히 만들다 보니 만삭 새벽녘에 완성했고 그날 아침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둘째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하자 엄마들에게 미션이 주어졌다. 아이에게 인형과 인형 옷을 엄마가 직접 만들어 선물해 주기

드디어 내 실력을 보여주자 마음먹고 만들었으나 완성작은 시간 투자 대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는 엄마가 만들어 준 하나뿐인 인형이라 좋아했지만 바느질 좀 하는 실력이 이 정도였나 왠지 아쉬운 마음이 컸다

미싱이 있으면 수선도 하고 다양한 걸 뚝딱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남편을 살살 구슬렸더니 며칠 뒤 남편이 미싱을 선물했다. 이 츤데래 같으니


박스에서 꺼내는 순간까지도 자신만만했는데 막상 동작을 하려니 절망으로 바뀌었다.

어떤 기계도 설명서 없이 잘만 만지는 공대 언니였는데 설명서를 아무리 봐도 작동이 안 된다. 이걸 어찌한다

고민으로 발만 동동거리다 집 근처 대형마트 문화센터에 저렴한 수업을 찾아 날름 등록하면서 생각했다. 미싱 하게 될 운명인거

준비부터 동작 방법, 기본적인 바느질 방법까지 열심히 배웠다. 작은 소품으로 시작해 나중엔 옷도 만들어 입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야말로 일취월장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고 아이들과 집에 고립되던 그때, 첫 아이의 사춘기 그림자가 시작되는 암흑기가 시작됐다.

같이 한 공간에 갇혀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 힘든 상황. 만사 머가 그리 짜증 나고 화가 나는지 그걸 다 엄마에게 쏟아내니 이해하기도 다 받아주기도 힘들었다.

날이 갈수록 우울증이 커지면서 버틸 수 있는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처음에는 온 집을 뒤집어가며 청소와 정리를 했다. 청소가 끝나고 다시 우울함이 엄습할 때 동생이 인스타그램을 추천했다.

아이들 학원과 친구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는데 sns를 통해 사람들이 소통하고 사는 이야기도 접하고 뜨개의 세계에 다시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코바늘 하나로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걸 만들 수 있다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거기다 정신수양과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집중도 높은 작업이었다.

다양한 기법은 이용해 가방 만들기를 시작으로 아이들 인형, 모티브를 연결한 블랭킷까지 만들다 보니 도안 없이 원하는 간단한 소품 정도 이제는 뚝딱이다.

우울증이 덮쳐오는데 혼자만의 극복방법을 찾는다면 코바늘 뜨개를 살짝 추천해 본다.



가만히 흘러가는 시간은 언제나 아쉽다. 언제부터일까 아득하지만 시간을 인지하던 때인가 싶다.

잠시라도 시간이 생기면 뭐든지 하고 있어 모르는 누군가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주의가 산만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1분 1초 그냥 좀 흘려보내면 어때서 스스로 못 견뎌하는 모습을 가족들조차 이해 못 하지만 이제는 일상이다.

어쩌다 TV를 봐도 손은 뜨개질이라도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혼자만의 휴식 시간이 늘어날 때마다 새로운 관심사를 찾아야 하고 그도 생각 안 나면 일단 걷기 시작.

이런 생활이 즐겁고 신나는데 즐겨보자

이제 또 뭘 해볼까 행복한 고민 다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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