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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주의자 Dec 16. 2020

퇴근길, 천천히
와인을 음미하고 싶다면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다면 ⑤ 몰도바의 키시너우


발칸과 동유럽의 국가들은 보통 관광객들의 체류 기간보다 2~3배로 머물며 느리게 여행했다. 쾌적한 날씨와 휴가철의 한적한 도심의 분위기 등 매력적인 요소가 많았고 무엇보다 물가가 저렴하여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중 몰도바의 수도 키시너우에서는 특별한 일정을 잡지 않고 일주일 간 푹 쉬어가기로 했다. 부촌에 위치한 사랑스러운 집 한 채를 하루 3만 원에 빌려서. 



‘행복의 지도’의 저자 에릭 와이너는 ‘지구 상에서 가장 덜 행복한 나라’로 알려진 몰도바를 여행한 뒤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주된 이유는 상대적 가난함이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주변국들의 경제 사정도 자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끼지만, 유럽의 최빈국 몰도바는 부유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 더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 경험하지 않고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되는 일,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수도 도심에서 만난 사람들이 몰도바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제 그들은 생각만큼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 동양인이 드문 다른 나라에서와는 달리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길을 물으면 대부분 유창한 영어로 친절하게 대답해 주어 조용히 쉬러 온 여행객의 입장에서는 고마웠다. 



여행을 하며 좋은 것 중 하나가 알람 소리에 달콤한 잠을 방해받으며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실컷 늦잠을 자고 아늑한 숙소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가끔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거리 곳곳에 공원이 많아 도심답지 않게 공기가 상쾌했고, 한적한 거리를 걷다 보면 텅 빈 영화 세트장에 와 있는 듯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키시너우는 복잡하고 정신없는 대도시를 벗어나고 싶지만, 그곳에서의 편리한 생활과 문화 혜택은 누리고 싶은 이율배반적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 준 곳이었다. 



해질 무렵 숙소 근처의 큰 호수가 있는 공원에서 주민들과 같이 파워 워킹을 한 뒤, 천 원짜리 커다란 수박 반 통을 사 와 시원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문화생활도 만족스러웠다. 유럽 각국의 명화가 전시되어 있는 ‘몰도바 내셔널 갤러리’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어 아름다운 작품들과 조용히 독대할 수 있었고, 휴가 기간이라 아쉽게도 볼 수 없었지만 9월 중순부터는 수준 높은 발레와 오페라 공연을 3~10 달러의 가격에 즐길 수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키시너우 근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는 스파클링 와인으로 유명한 ‘크리코바 와이너리’이다. 몰도바는 세계에서 가장 긴 200km의 와인 셀러를 보유하고 있는데, 바로 이 곳에 두 번째로 긴 120 km의 와인 셀러가 있다. 시내에서 약 30분 정도 달려 입구에 도착하면 끊임없이 펼쳐진 초록빛 포도밭이 먼저 반겨주며, 와인 셀러 투어가 시작되면 놀이기구 같은 미니 열차를 타고 어둡고 긴 터널 속을 들어가게 된다. 무려 바깥 기온보다 15도나 낮은 셀러에 도착한 뒤 약 한 시간 동안 와인 저장소와 와인 제조 공정을 살펴보고, 전통 양조 기구를 전시한 박물관과 먼지 쌓인 고가 와인들이 저장된 공간을 둘러보게 된다. 푸틴과 메르켈의 개인 와인 셀러도 있었는데 이 곳에서 푸틴이 50세 생일 파티를 했다고도 한다. 투어가 끝나면 귀빈이 된 듯 화려한 테이스팅 룸에 들어가 화이트-로제-레드-스파클링 순으로 시음을 하는데 개인적으로 로제 와인이 가장 달콤하고 맛있었다.



적당한 음주 후 웃음이 절로 흘러나오는 이 기분, 정말 좋다. 나는 ‘소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 중에도 각국의 다양한 술을 마셔봤지만, 소주만큼 맛없는 술은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 회사 회식 때는 그 소주가 기본 주류라 맛없게 마시고 다음 날 숙취까지 겪는 최악의 상황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여행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맥주와 와인 등을 (물보다 저렴했기에) 자주, 그러나 적당히 마시면서 기분 좋게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어쩌면 여행 중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이 적당량의 알코올의 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 2017년 8월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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