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의 라파스
해발 고도 기본 2천 미터 이상, 안데스 산맥을 지나는 남미의 고산 도시들은 한 마디로 여행중 예상지 못했던 복병이었다. 카니발에서 연상되는 여름의 뜨거운 남미를 기대하고 간 내게는 한 자릿수의 기온이 서늘함이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로 느껴져 경량 패딩을 벗을 여유가 없었다. 거기다 산소도 희박해 언덕을 몇 걸음만 올라도 숨을 헉헉대며 단어를 끊어 말해야 했고,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하려고 달리다가 몇 년 만에 코피도 흘려 보았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수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한라산도 2천 미터가 안 되는데 무려 그 두 배가 넘는 고도 4천 미터에 위치한 ‘라파스’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바로 이 추위와 숨가쁨을 잊게 만들어준 환상적인 야경 덕분에.
버스를 타고 언덕을 꼬불꼬불 넘어 도착한 라파스의 첫인상은 ‘우울함’이었다. 남미 대부분의 고산 도시에서는 알록달록한 색의 집들이 계단식으로 빼곡히 늘어서 있어 예쁘다고 느낀 적도 있었는데, 이 곳은 대부분 갈색과 회색 빛의 벽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인지 칙칙하고 어두웠다. 게다가 날씨마저 흐리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도착하자마자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낮의 풍경은 그러했다.
치안이 안 좋은 남미의 대도시에서 야경을 혼자 보러 갈 수 없었기에 현지인 청년 ‘루이스’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저녁 7시쯤 루이스와 함께, 퇴근하는 현지인들로 가득 찬 콜렉티보 버스를 타고 ‘낄리낄리 전망대’로 오르는 길에도 큰 기대는 없었다. ‘뭐, 키토나 쿠스코에서 본 풍경과 비슷하겠지. 산등성에 형성되어 있는 빈민촌이 밤이 되면 화려한 불빛을 뿜어내는데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모를 서글픈 그 장면’
그런데 전망대에 오르자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지금까지 본 야경과는 스케일이 다른 빛의 무대였다. 사방으로 수많은 별들이 흩뿌려져 있는 듯 불빛이 빼곡했는데, 마치 천문대 원형 돔에 누워서 영사기에 투영된 별을 보는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연인에게 깜짝 프러포즈를 해도 좋을 장소, 내가 알고 있던 우울한 라파스가 밤에 이렇게 깜짝 변신을 하다니! 여행 중 만난 아름다운 대 반전이었다. 끊임없이 사방을 둘러보면서 감탄사가 멈추지 않아 영화 ‘라라 랜드’에서처럼 이 멋진 무대를 배경으로 춤을 춰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불빛 하나하나는 결국 가난한 라파스 사람들의 숫자를 의미했다. 관광객에는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야경이지만 그들에게는 저 꼭대기에서 숨쉬기 힘든 현실의 모습이겠지. 2014년, 남미 최초 인디오 출신 대통령인 ‘모랄레스’가 도심과 저 산 꼭대기에 위치한 빈민가를 연결하는 케이블 카를 설치하여 현지인들의 도심 진입이 좀 더 용이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라파스의 명물이 된 케이블 카 위에서 적나라하게 바라본 그들의 삶은 겉만 훑고 가는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편, 원형 감옥 ‘파놉티콘’에서처럼 사생활은 얼마나 침해되고 있을까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 날 길을 걸으며 주변을 돌아보니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현지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의욕 없이 그것이 일상인 듯 돈 바구니를 내미는 할머니부터, 특이하게 춤을 통해 시선을 끌며 구걸하는 사람도 있었다. 길 한 구석에서 근심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는 젊은 여자와 그 옆에 포대기로 싸인 아기의 미래는 이미 정해진 것 같아 안타까웠다. 문득 그토록 꿈꾸던 장기 여행을 하고 있음에 감사하기보다 춥고 힘들다며 투정 부리던 내 모습을 돌아보니 부끄러워졌다. 다시 그들에게 시선을 옮겨, 내게 환상적인 야경을 선물해 준 ‘라 파스(La Paz)’가 가난보다는 그 이름의 뜻처럼 '평화'가 깃드는 곳이 되길 조용히 바라보았다.
☆ 2018년 1월에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