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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주의자 Jan 05. 2021

퇴근길, 야경 그 너머의 것을
보고 싶다면

황홀한 밤을 느끼고 싶다면 ③ 볼리비아의 라파스


해발 고도 기본 2천 미터 이상, 안데스 산맥을 지나는 남미의 고산 도시들이 싫었다. 우선 여름의 뜨거운 남미를 기대하고 간 내게는 한 자릿수의 기온이 서늘함이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로 느껴졌다. 거기다 산소가 희박해 언덕을 몇 걸음만 올라도 숨을 헉헉대며 단어를 끊어 말해야 했고,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하려고 달리다가 몇 년 만에 코피도 흘려 보았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수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한라산도 2천 미터가 안 되는데 무려 그 두 배가 넘는 고도 4천 미터에 위치한 ‘라파스’가 내 마음에 들었다. 그 이유는 딱 하나, 바로 환상적인 야경 덕분이다. 



버스를 타고 언덕을 꼬불꼬불 넘어 도착한 라파스의 첫인상은 ‘우울함’이었다. 남미 대부분의 고산 도시에서는 알록달록한 색의 집들이 계단식으로 빼곡히 늘어서 있어 예쁘다고 느낀 적도 있었는데, 이 곳은 대부분 갈색과 회색 빛의 벽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인지 칙칙하고 어두웠다. 게다가 날씨마저 흐리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도착하자마자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낮의 풍경은 그러했다. 



치안이 안 좋은 남미의 대도시에서 야경을 혼자 보러 갈 수 없었기에 현지인 청년 ‘루이스’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저녁 7시쯤 루이스와 함께, 퇴근하는 현지인들로 가득 찬 콜렉티보 버스를 타고 ‘낄리낄리 전망대’로 오르는 길에도 큰 기대는 없었다. ‘뭐, 키토나 쿠스코에서 본 풍경과 비슷하겠지. 산등성에 형성되어 있는 빈민촌이 밤이 되면 화려한 불빛을 뿜어내는데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모를 서글픈 그 장면’ 



그런데 전망대에 오르자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지금까지 본 야경과는 스케일이 다른 빛의 무대였다. 사방으로 수많은 별들이 흩뿌려져 있는 듯 불빛이 빼곡했는데, 마치 천문대 원형 돔에 누워서 영사기에 투영된 별을 보는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연인에게 깜짝 프러포즈를 해도 좋을 장소, 내가 알고 있던 우울한 라파스가 밤에 이렇게 깜짝 변신을 하다니! 여행 중 만난 아름다운 대 반전이었다. 끊임없이 사방을 둘러보면서 감탄사가 멈추지 않아 영화 ‘라라 랜드’에서처럼 이 멋진 무대를 배경으로 춤을 춰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불빛 하나하나는 결국 가난한 라파스 사람들의 숫자를 의미했다. 관광객에는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야경이지만 그들에게는 저 꼭대기에서 숨쉬기 힘든 현실의 모습이겠지. 2014년, 남미 최초 인디오 출신 대통령인 ‘모랄레스’가 도심과 저 산 꼭대기에 위치한 빈민가를 연결하는 케이블 카를 설치하여 현지인들의 도심 진입이 좀 더 용이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라파스의 명물이 된 케이블 카 위에서 적나라하게 바라본 그들의 삶은 겉만 훑고 가는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편, 원형 감옥 ‘파놉티콘’에서처럼 사생활은 얼마나 침해되고 있을까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 날 길을 걸으며 주변을 돌아보니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현지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의욕 없이 그것이 일상인 듯 돈 바구니를 내미는 할머니부터, 특이하게 춤을 통해 시선을 끌며 구걸하는 사람도 있었다. 길 한 구석에서 근심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는 젊은 여자와 그 옆에 포대기로 싸인 아기의 미래는 이미 정해진 것 같아 안타까웠다. 문득 그토록 꿈꾸던 장기 여행을 하고 있음에 감사하기보다 춥고 힘들다며 투정 부리던 내 모습을 돌아보니 부끄러워졌다. 다시 그들에게 시선을 옮겨, 내게 환상적인 야경을 선물해 준 ‘라 파스(La Paz)’가 가난보다는 그 이름의 뜻처럼 '평화'가 깃드는 곳이 되길 조용히 바라보았다.


☆ 2018년 1월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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