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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주의자 Jan 31. 2021

퇴근길, 내 인생의 멘토가
보고 싶다면

특별한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③ 네팔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2005년 11월 수능 시험일을 앞둔 어느 날, 우연히 산악인 박영석 대장님의 세계 최초 ‘산악 그랜드 슬램’ (히말라야 14좌, 세계 7 대륙 최고봉, 지구 3 극점 모두 완등) 달성을 축하하는 다큐멘터리를 접하게 되었다. ‘우와 진짜 대단하다, 나와 똑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저 극한 상황들을 견뎌냈을까’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그분의 명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며 그간 다소 나태했던 수험 생활을 반성하게 됐다.



2009년의 그 뜨거웠던 여름, 그분이 주최하는 국토대장정 프로그램인 ‘희망원정대’의 6기 대원으로 참가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바로 그 다큐멘터리 속 주인공과 함께 걷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경상남도 사천에서부터 약 3주 간 순수 두 발로 최종 목적지인 서울시청을 향해 걸어갔고, 그곳으로의 입성을 하루 앞둔 날 밤, 대장님과 대원들 간의 Q&A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단지 그분과 개인적으로 한 마디 나눠보고 싶어서 질문을 하나 생각해냈다. 



“제가 이번에 희망원정대에 지원한 동기 중 하나가 대장님을 직접 뵙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걸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대장님께서는 나도 영광이었다고 웃으며 말씀해 주셨다. 이어서 질문했다. “대장님께서 끊임없이 도전하시는 가장 큰 동기가 무엇이고 그 다음 도전은 무엇인가요?” 그에 대한 대답은 ‘나라는 대상을 이기는 것, 그리고 히말라야 14좌 모두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남과 비교하면서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 대장님의 말씀은 인생에서 하나의 목표를 성취하는 방법에 대한 중요한 교훈이 되었고, 살면서 무언가 힘든 일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자극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2011년 10월 어느 날, 가슴이 덜컹 무너지는 뉴스 기사를 보았다. ‘산악인 박영석, 안나푸르나에서 실종’. 



결국 1%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네팔의 고산 트레킹은 이전부터 나의 버킷리스트에 있었지만, 2018년 가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등산길은 대장님을 뵈러 간다는 더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버스를 타고 포카라 도착, 하룻밤 자고 난 다음 날 장비를 정비한 뒤에 지프차를 타고 4박 5일간의 트레킹 시작점인 ‘시와이’까지 갔다. 안나푸르나의 청정 자연은 아름다웠지만 아직 우기가 끝나기 전이라 징그러운 거머리들과 사투를 벌였고, 악명 높은 촘롱 계단 앞에서 다리가 풀렸으며 고산병 약 부작용으로 팔다리가 저리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힘들지 않았다. 조금 버거운 구간에서는 이를 악물고 대장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 발짝씩 내디뎠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조금씩 가까워오는 봉우리를 바라볼 때면 저 산 위의 대장님께서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이 정도야 걸음마 수준이지 뭐, 조금만 힘내서 곧 만나자” 



하루에 500~1,000 미터씩 올라 트레킹 4일 차에 드디어 해발 고도 4,130미터에 위치한 ABC에 도착했다. 맑았던 아침과는 달리 안개가 잔뜩 끼어 바로 앞 안나푸르나의 설산도 보이지 않았지만, ‘NAMASTE’라는 환영 문구를 보자 기쁨이 눈물이 울컥 나오기 시작했다. 2018년 9월 17일 12시 20분, 드디어 꿈꾸던 ABC에 도착했구나!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베이스캠프 산장에서 점심을 먹은 뒤 바로 박영석 대장님의 기념비에 갔다. 



‘천상에서도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을 그대들이여!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이 곳에서 산이 되다!’ 환하고 웃고 계신 대장님의 사진을 보니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2009년 여름 대열의 끝에서 묵묵히 걸으시다가 뒤처진 대원들을 격려하며 함께 걸으시던 모습, 이듬해 다음 기수 발대식이 끝나고 뒤풀이 때 뵈었던, 카리스마보다는 인간미가 넘치셨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오후에는 구름이 걷히고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의 하얀 설산이 드러냈다. 아마도 일생에 한 번 뿐일 그 풍경을 추위도 잊은 채 넋 놓고 감상하니 그동안의 고생도 눈 녹듯 사르르 녹았다. 다음 날 새벽 5시에 일어나 서서히 붉게 물드는 설산의 일출을 감상한 뒤, 다시 한번 기념비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왔다. “대장님, 이제 하산할게요. 좋아하는 산에서 부디 편히 쉬시길.” 



호기심이 많아서 다방면에 도전을 즐기지만 하나의 목표에 끈질기게 매달리는 힘은 부족한 내게 중요한 교훈을 주신 분. ‘도전과 성취’라는 나의 좌우명과 이렇게 먼 길을 떠날 용기를 주신 분도 어쩌면 박영석 대장님인지 모른다. 네팔의 안나푸르나를 향해 가는 길, 소중한 인생의 멘토를 만나러 가기 위한 여정은 다른 때보다 더 가슴 벅차고 충만한 시간이었다. 


☆ 2018년 9월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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