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연의 치유가 필요하다면 ① 터키의 카파도키아
만약 지금까지 여행 한 곳 중 딱 한 장소만 다시 가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터키의 ‘카파도키아’를 택하겠다. 특히 하루 종일 힘들고 지쳐서 삶에 대한 물음표가 가득했던 날, 아무도 만나기 싫고 내 모습이 한없이 작아졌던 날, 그렇게 지구를 떠나고 싶을 만큼 우울한 마음이 든다면 카파도키아를 추천하고 싶다. 그곳에는 진짜 우주의 한 행성에 온 듯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터키에서 교환 학생으로 체류할 당시, 공부보다는 여행에 더 관심이 있어 기회만 나면 배낭을 쌌다. 터키는 동서양의 교차점에 있어 10개의 도시를 보고 나면 10개의 국가를 여행한 듯한 느낌이 들만큼 곳곳마다 뚜렷한 색깔과 매력을 갖고 있다. 이스탄불, 파묵칼레, 샨르우르파, 반 호수, 카르스 등등 내 마음을 사로잡은 여행지가 많았지만, 귀국할 때쯤에 다시 보고 싶었던 것은 역시 카파도키아였다.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평원에 위치한 이 곳은 기원전 1900년 전 고대 히타이트 제국의 첫 수도였으며, 로마의 박해를 피해 온 초기 기독교인들의 동굴 교회와 은신처로 유명하다. 관광객들은 동굴 형태로 된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새벽에 열기구를 타고 하늘에서 일출을 감상하며, 낮에는 투어를 통해 남쪽 데린쿠유 지하도시나 으흐라라 계곡을 둘러보거나 ATV나 승마와 같은 액티비티를 즐긴다. 카파도키아 여행의 중심이 되는 괴레메 마을 외에도 우치히사르, 위르귑, 아바노스 등 특색 있는 마을이 근처에 있으니 하루씩 여유롭게 돌아보아도 좋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버스를 타고 5시간 정도 달려 카파도키아 괴레메 마을에 도착한 순간, ‘여기… 지구가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가이드북에서 사진을 보았고 어떤 곳인지도 듣고 왔는데, 현실 속 내 눈 앞에서 직접 마주하니 어안이 벙벙했던 것이다.
장구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듯 거칠게 융기한 땅 위에 다양한 형태의 돌덩이들이 끝없이 놓인 장관. 매끈한 버섯 모양의 기암괴석은 모자를 쓴 수도승 같았고 초코송이 과자 같았으며, 숭숭 뚫려 있는 구멍의 울퉁불퉁 솟은 바위들은 지구에 놀러 온 외계인들처럼 보였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사람이 공들여 조각한 인조물이 아니라 화산 활동이라는 자연의 우연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 발짝 한 발짝 뗄 때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작품들을 보며 이러한 걸작을 만들어 준 자연에 감사하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괴레메 야외 박물관’을 둘러보고 마을로 돌아오는 길, 눈이 깊게 쌓인 길을 서걱서걱 걸으며 MP3 속에 담긴 ‘엔야’의 몽환적인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겨울 비수기였기에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수 천 년 간 그 자리를 지켜왔을 바위들에 둘러싸여 홀로 있으니 ‘경외감’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라는 존재가 이 대자연 앞에서 별 것 아니면서도 이들과 같은 우주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내가 세상에 온 이유가 거창한 그 무엇이기보다 그냥 존재 자체로서 소중하고 빛난다는 것을, 고작 스무 해 정도 살아왔고 앞으로 길어야 팔십 해 정도 더 살 텐데 너무 아등바등하며 살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카파도키아와 비슷한 풍경은 그 후 중국의 장가계와 그리스의 메테오라 등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모두 빼어난 절경이었지만 카파도키아가 나의 ‘첫사랑’이었기에 그 앞에서도 카파도키아의 풍경이 문득 그리워졌다. 당시 학생으로서는 10만 원이 넘는 가격이 부담스러워 그 유명한 열기구를 타 보지 못했고, 두 번 모두 겨울에 방문했기에 눈 쌓인 새하얀 바위들이 여름에는 뜨거운 열기로 얼마나 강렬하게 빛날지 궁금하다. 나에게 그런 아쉬움과 여운을 남긴 카파도키아는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한다.
☆ 2008년 2월과 12월에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