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험주의자 Feb 14. 2021

퇴근길, 자연의 품속에서
달리고 싶다면

대자연의 치유가 필요하다면 ② 몽골의 하르호린


몽골은 2011년 입사 후 첫 휴가를 보낸 나라다. 의미 있는 첫 휴가의 장소로 ‘몽골’을 택한 이유 세 가지. 첫째, 양쪽 주말을 붙이더라도 최대 9일의 길지 않은 휴가를 쓸 수 있었으므로 비행시간이 짧은 곳에 가고 싶었다. 둘째, 오랜만에 학생 때처럼 모험하는 듯 진짜 배낭여행을 하고 싶었다. 셋째, 광활한 벌판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 그동안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팀 내 유일한 여자 신입사원으로서 철은 덜 들어 있었고, 군대식 조직 문화를 버거워하고 있었다. 



자유로운 배낭여행 컨셉이었기에 휴대폰, 노트북과 같은 통신 기기는 두고 (철없는 신입 사원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론리플래닛’ 한 권에 의지하기로 했으며, 여행 루트도 정하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그 후 짧은 휴가인 경우 일정과 루트를 어느 정도 정하고 움직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이처럼 엉성하고 즉흥적이었기에 기억에는 더 오래 남게 되었다.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도착한 첫날 밤, 다음 날 어디로 갈까 몇 곳의 후보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몽골 제국의 첫 수도이자 버스로 6시간 정도 떨어진 ‘하르호린’에 가기로 결정하고 잠들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는 버스 시간을 알 길이 없어, 다음 날 무작정 아침 일찍 8시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으나 결국 11시 버스를 타고 출발해야 했다. 창 밖으로는 소와 염소 등의 가축들과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고, 옆자리에 앉은 열다섯 살의 아기 엄마와도 몽골어 회화 책을 꺼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약 여섯 시간을 달려 하르호린에 도착, 버스가 떠나고 광활한 초원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이니 저 멀리 지평선에서 몽골제국의 기마병들이 말을 타고 달려올 것만 같았다. 



몽골을 ‘가축이 사는 땅에 사람들이 끼어 사는 나라’라고 한다. 사람이 살고 있는 흰색의 게르가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고, 가축들은 답답한 우리 속이 아닌 온 세상을 자유롭게 뛰어놀고 있었다. 동물과 사람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사는 풍경과 순박하게 미소 짓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고, 정겨운 소 똥 냄새와 바람에 묻어나는 오랜 역사의 향기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심호흡을 하면 폐까지 깨끗하게 청소되는 듯한 상쾌함이 느껴졌다.



이윽고 밤이 되어 '별'을 보기 위해 게르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작은 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흐렸던 걸까. 기대했던 것처럼 쏟아지는 별은 볼 수 없었지만, 그동안 도시의 빛 공해로 피로가 누적됐던 심신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촛불 아래서 일기장에 올라온 벌레 한 마리를 벗 삼아 펜을 들다가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그날 밤, 나는 완전한 어둠에 압도된 근사한 기분을 느끼며 모든 생명체들이 잠을 자는 진짜 밤하늘 아래에 있었다. 



다음 날 말을 타고 초원을 달려보기로 했다. 숙소 게르의 주인이기도 했던 가이드와 차를 타고 10분 정도 달려 게르 두 채가 덩그러니 놓인 곳에 도착했다. 말 젖 짜는 모습을 구경하고 시큼한 막걸리 같은 마유주 ‘아이락’을 한 잔 마시며 쉬는 사이, 드디어 내 말을 앞에서 끌어줄 말 한 마리와, 하루 종일 내 몸과 하나가 되어 달려 줄 귀여운 말 한 마리가 등장했다.



처음에는 보기보다 높은 말안장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고 무서웠지만, 점차 달그락달그락 말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니 환희의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덧 말에게 더 빨리 달리라는 뜻의 의성어인 "추! 추!"를 외치며 속도를 높이자 무아지경의 러너즈 하이가 찾아왔다. 뜨거운 태양 아래 아무도 없는 너른 초원을 거침없이 말과 함께 달리는 기분이란! 마치 온 세상이 다 내 것이 된 듯 세상의 왕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13세기 전 세계 1/4을 지배했던 몽골제국의 칭기즈칸이 사방으로 계속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방이 확 트인 초원에 자연과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다른 행성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것 같았다. 중간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지만 빗 속을 달리니 스릴감은 더해졌고, 전 날 제대로 씻지 못했기에 깨끗한 빗물 속에서 이색적인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어느덧 헤어질 무렵 말에서 내려 그의 따스한 체온을 느껴보고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니, 자연과 동물을 벗 삼아 지내는 몽골인들의 순수한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뜨거운 가슴보다는 차가운 머리를 지향해가던 내게 훈훈한 온기를 불어넣어준 곳몽골은 대자연이 사람을 얼마나 너그럽게 만드는지 몸소 체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 2011년 7월에 방문

작가의 이전글 퇴근길, 지구를 떠나고 싶을 만큼 우울하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