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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주의자 Feb 21. 2021

퇴근길, 호수의 위로가 듣고 싶다면

대자연의 치유가 필요하다면 ③ 뉴질랜드의 푸카키 호수


서른을 얼마 앞둔 시점, ‘5년간 해 온 일이 진짜 내 적성에 맞는 걸까, 이렇게 계속 살면 행복할까’ 의문이 드는 직장인 사춘기가 또다시 찾아왔다. 내가 재직했던 무역 상사에서의 일은 무에서 유를 창출, 안 되는 것은 되게 해야 했고, 출근길에 오늘은 또 무슨 골치 아픈 일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을 할 만큼 사건 사고도 많았던… 한 마디로 정신적 업무 강도가 높은 일이었다. (그만큼 배운 것도 많았지만) 그래서 이러한 사춘기는 사실 꽤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는데, 그 빈도가 잦아지고 강도가 높아짐에 따라 번아웃 증상이 심해졌던 것 같다.



내 나이 어느덧 스물아홉, 아쉽게도 꽃다운 20대가 다 지나가고 있는데 차라리 빨리 시간이 흘러 30대가 돼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지쳤었다. 그토록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하루하루가 우울했던 그 겨울을 보듬어 준 것은 따뜻한 남국의 뉴질랜드 대자연이었다.



뉴질랜드 남섬 여행은 여왕의 마을인 ‘퀸스타운’에서 시작된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오랜 기간 한국의 미세먼지에 시달렸던 나의 호흡기가 가장 먼저 환호했다. 푸른빛의 광활한 와카티푸 호수와 단단한 근육을 연상시키는 굴곡진 산맥은 지금까지 보았던 자연의 풍광과는 스케일이 달랐다. 태곳적 자연이 바로 이런 모습이겠구나,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자연을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통해서가 아닌 내 눈으로 생생히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투명한 호숫가 주변에는 햇살 아래서 책을 읽거나 멍하니 앉아서 쉬는 사람들, 오리들과 뒹굴며 놀고 있는 아이들의 평화로운 오후가 펼쳐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건만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퀸스타운에서 북쪽으로 달려 ‘마운트 쿡’으로 가는 길, 사람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듯한 청정호수를 여러 번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 가장 광활하고 아름다웠던 호수는 ‘푸카키 호수’였다. 양이 엎드려 춤을 추는 듯 길쭉하게 떠다니는 하얀 구름 아래 톡 쏘는 밀키스 맛이 날 것 같은 빙하 호수, 저 멀리에서 굴곡진 설산이 호수를 감싸고 있었고 햇살에 반짝이는 물 빛은 수많은 보석을 풀어놓은 듯했다.



푸카키 호수는 오고 가면서 모두 세 번 들렀다. 마운트 쿡으로 가는 길, 마운트 쿡에서 하산 후 테카포 호수로 가는 길, 그리고 퀸스타운으로 돌아가는 길에. 방문했던 시간과 날씨에 따라 물 빛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 아름다움은 한결같았다. 한 번은 테이블 의자에 앉아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오랜 시간 호수를 응시했다. 강렬한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지만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푸카키 호수에서 존재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나의 모든 감각 기관에 아로새기고 싶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고민들이 존재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결국 그렇게 힘들어하던 회사를 떠난 뒤 여행을 하며 즐기면서도, ‘이제 돌아가면 무슨 일 하고 살지?’라는 고민이 문득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귀국 후 1년간 간절한 마음을 갖고 공부해서 바라던 공무원이 된 현재에도,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업무 환경에 지쳐 고민을 하고 있다. 단지 ‘직업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은  다양한 장르로 다가오는 고민의 연속이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굴레를 벗어날  없다는 사실 안다. 그래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승화하거나 사소한 것으로 만들  있도록 나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바꾸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깎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숭고한 장소들은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p.242


영겁의 세월을 견뎌 낸 저 설산과 호수가 보기에, 내가 심각하다고 느끼는 고민들은 얼마나 작은 것일까. 이 대자연 앞에서 사람의 인생은 찰나의 순간이니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말라고, 지구라는 놀이터에서 그냥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편안히 즐기다 가라고, 푸카키 호수가 나에게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는 것 같았다.


☆ 2015년 12월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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