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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주의자 Mar 07. 2021

퇴근길, 새로운 청량감이 필요하다면

대자연의 치유가 필요하다면 ⑤ 아르헨티나의페리토 모레노빙하


어렸을 적 나에게 ‘빙하’란 만화 ‘아기 공룡 둘리’에서나 볼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좀 더 커서는 ‘남극 여행에 천만 원도 넘게 든다는데 늙어서 시간과 자금이 여유로울 때나 가 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여행 중 아르헨티나의 최남단 파타고니아 지방에서도 바다에 떠 있는 진짜 빙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 자생하는 검은색 야생 베리의 이름을 딴 도시 ‘엘 칼라파테’는 그렇게 내겐 멀고 먼 존재였던 빙하를 만나게 해 준 베이스캠프였다. 



빙하를 단지 멀리서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1시간 동안 그 위를 직접 걸어볼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도 있다. 하지만 단점이 있다. 투어 회사 한 곳에서 독점하고 있어 가격이 당시 약 20만 원으로 비쌌다는 것. 5년 전에도 이 곳을 방문했다는 한 미국인은 그때보다 가격이 4배 이상 올랐다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빙하와의 두근두근 첫 만남을 위하여 기꺼이 그 값을 지불하기로 했다. 



우선 ‘로스 글라씨아레스(Los Glaciares)’ 국립공원에 도착 해, 빙하를 바로 코 앞에서 볼 수 있어 '발코니'라고 불리는 전망대로 이동했다.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만 보던 아이스 블루 빛의 거대한 빙하가 눈 앞에 펼쳐지자 다들 탄성을 지르며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나 역시 마치 하나의 대륙처럼 거대한 빙하는 처음 보는 거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푸르고 아름다웠다. 문득 저 빙하 속 어딘가에 둘리가 들어있을 것만 같았고, 어렸을 적 즐겨 먹었던 아이스크림 ‘고드름’처럼 한 조각 살짝 떼어내서 아삭 깨물어 먹고 싶다는 엉뚱한 상상도 해 보았다. 



이제 20분 정도 페리를 타고 빙하 트레킹의 시작점으로 갔다. 이곳 빙하의 규모는 남극과 그린란드에 이어 세 번째로 크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걷거나 보는 것은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이며, 모레노 빙하가 다른 곳보다 평평하고 접근이 용이하기에 트레킹이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드디어 장갑을 끼고 운동화에 아이젠까지 착용한 뒤 빙하 위에 발을 내디뎠다. 서걱서걱, 굵은 입자의 얼음 조각을 밟으며 한 발자국씩 떼고 있는 이 길이 바로 빙하 위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파란색 홀에 고여있는 투명에 가까운 블루 빛 물과 아찔한 크레바스를 보았고, 청량감이 느껴지는 빙하수를 손으로 떠먹어보기도 했다. 얼음 왕국에서의 황홀한 순간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지만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갔고, 빙하 조각을 넣은 위스키 온 더 락 한 잔을 마시며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2018년 한국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이 개막하던 날, 지구 반대편에서 내 생애 첫 빙하 위를 걸었다. 여행에 있어서도 ‘처음’이라는 기억은 강렬하다. 첫 해외 여행지였던 ‘베트남’, 처음 만난 서양 문화였던 ‘영국’, 아랍 문화였던 ‘시리아’ 등은 같은 이유로 나에게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같은 파타고니아 지방에서 만난 ‘또레스 델 빠이네’나 ‘피츠로이’ 역시 아름다웠지만, 어쨌든 ‘산’이라는 익숙한 형태였기에 감흥은 크지 않았다. 그런데 빙하는 마치 어렸을 적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신선한 느낌처럼 대자연에 대한 호기심을 재 발동시켰다. 만약 산과 들과 바다나 강이 아닌 평범하지 않은 자연의 풍광을 통해서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페리토 모레노 빙하 위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 2018년 2월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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