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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주의자 Dec 10. 2020

퇴근길, 내 인생의
지난봄들이 그립다면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다면 ③ 미얀마의 껄로


미얀마를 생각하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던 사람들의 미소가 떠오른다. 군부 독재로 인해 오랜 기간 폐쇄되어 외부의 때가 묻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동안 여행 중 만났던 현지인들과는 다른 느낌의 원석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미얀마 여행을 하는 내내 ‘이번에는 또 어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바간에서 6시간 정도 꼬불꼬불 산길을 지나 도착한 ‘껄로’는 해발 1,320 미터에 위치해 있어 선선한 기온에 청정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답게 인적이 드물고 동남아 여행에서 흔한 오토바이 소음이 적어 조용히 산책할 수 있었다. 따스한 햇볕을 즐기며 마을을 천천히 걸으면 어디선가 장작 타는 냄새가 났고, 군데군데 노랗고 분홍빛의 봄 꽃들이 수줍은 인사를 건네주었다. 얼굴에 흙빛 타나카를 바른 귀여운 할머니들이 시장 바닥에 앉아 싱싱한 채소를 팔고 있었고, 긴치마 같은 론지를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미소에는 꾸밈이 없었다. 시골에서 살아 본 적이 없음에도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푸근해졌다. 



껄로에서 시작해 인레 호수까지 이동하는 1박 2일 트레킹에 참가하기로 했다. 하루 14~18km 정도 평탄한 길을 걸으며 현지 소수 민족의 마을을 지나는 트레킹이기에 ‘가벼운 산책’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도 같았다. 이틀 동안 함께 걷게 된 사람들은 모두 5명이었다. 우선 스위스 삼 남매 중 톰 크루즈를 닮은 오빠와 두 명의 예쁜 여동생, 나와 동갑인 한국인 여자 ‘인지’와는 나중에 대화를 나누다가 같은 학교 단과대의 같은 학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더 반가웠다. 마지막으로 귀여운 얼굴을 한 소수민족 빠오족 현지 가이드까지, 모두들 이 힐링 트레킹에 어울리는 차분하고 맑은 사람들이었다. 어느덧 우리는 평화로운 미얀마의 시골 풍경과 하나로 어우러졌다. 



영화 속에서나 보았던 소 달구지가 지나갔고, 새 총을 갖고 놀며 수줍게 웃는 아이들과 마당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빨간 고추들을 만났다. 어깨에 망태기를 진 채 초록 들판에서 드문드문 밭 일을 하고 있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모네의 풍경화 같기도, 이중섭의 동양화를 마주한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한 마을에 들러 가방을 직조 중인 한 할머니와 차 한잔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쉬어가기도 했고, 점심 식사 후에는 한 시간 넘게 낮잠을 잔 뒤 다시 천천히 길을 나섰다.

 


오후 5시쯤 하룻밤을 묵게 될 빠오 족의 집에 도착했다. 전기와 가스가 없어 장작불로 요리하고 빗물을 받아 식수를 마련하는 자연 친화적인 공간이었다. 그렇게 자연이 만들어 낸 맛있는 저녁을 먹은 뒤, 이른 밤 휴대용 조명 앞에 모여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소한 2030의 일상 이야기부터 다소 묵직한 정치 이야기까지, 고요한 시골 밤하늘 아래 서로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대화는 신선했다. 이제 도시에서라면 이른 시각 8시쯤 모두들 자리에 누웠을 무렵 나 혼자 밖으로 나와서 목이 꺾어져라 쏟아지는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밤에는 급격히 기온이 내려가 추웠음에도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스르르 잠들 수 있었다. 



트레킹을 하며 만난 껄로의 풍경은 내 인생의 ‘지난봄’들을 떠오르게 했다. 중학생 때 친구와 웃고 재잘거리며 걸었던 남산 벚꽃 길,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던 대학 새내기 때의 풋풋한 캠퍼스, 신입사원 시절 하늘공원 벤치에서 봄 햇살보다 더 환했던 그 사람의 미소. 껄로의 봄은 그 순간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슬그머니 길 앞에 가져다 놓아,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은근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더 깊게 숨을 쉬어 보았다. 따스한 기운이 가슴속까지 스며들어 힘껏 기지개를 켜고 봄을 느껴보았다. 웅크렸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녹아 앞으로도 내 인생에 펼쳐질 수많은 봄날이 기대되었다.


 ☆ 2019년 2월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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