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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로이현아 Oct 09. 2017

신이 생동하는 빛으로 심어둔 순간들

한 사람으로 인해 내 모든 부족한 여정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되는 신비

내가 걷는 이 길에서 지치지 말라고 마음을 일으켜 더욱 용기를 내라고, 신이 그 발걸음마다 생동하는 빛으로 심어두신 순간들이 있다.


길을 걷다 만나 서로의 영혼으로 통하는 벗이 전해주는 문장,
내게 깊은 자국을 남긴 책 속의 구절,
교실에서 아이가 보인 이전과는 달라진 표정 하나,
청아한 새벽 공기에 깨어나는 세상의 윤곽이 머금은 신비로운 기운,
나를 관통해 흘러가는 어떤 흐름을 느끼는 순간.

그렇게 내게 전해져온 것들이 나의 내면을 다시 소생하게한다.
내 안이 잔을 왈칵 넘쳐나 담긴 것이 흘러나오게 한다.
한 사람으로 인해 내가 걸어왔던 모든 부족한 여정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되어 빛을 발한다.
그 빛은 나를 다시 일으켜 살게한다.


독서교육 직무연수로 선생님들을 만나뵈면서 나는 종종 마음이 단단해졌다.  
점점 더 뜨겁게 달구어지는 가슴으로 [독립출판으로 어린이작가 그림책 만들어주기] 교실 속 그림책 프로젝트를 꾸준히 이어왔다.

올해는 4월달 바람길 독서학교에서의 독서교육 직무연수 강의를 시작으로
9월까지 총 8개의 교육 지원청에서 독서교육 직무연수 강의로 선생님들을 만나뵈었다.

그렇게 올해 지역청에서의 마지막 강의 날이었던 9월 7일.

가장 급한 원고를 끝내어 송고하고
잔뜩 밀려있는 써야할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마음을 벼리고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가장 먼저 그 날을 기록하기로 한다.



내게 특별한 한 사람,
K언니가 이날 내 강의를 들으러 왔다.
독서 직무연수 강의 계획에서 내 이름을 보고 부장으로 바쁜 와중에 신청했노라고 했다.
몇 달 전부터 이 날로 예정된 언니와의 만남을 기다리며 설렜다.

K언니는 어린이작가 이혜빈이 쓴 그림책 <솎아내기>를 가슴으로 읽어주었다.
그리고 혜빈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화답시로 써서 보내주었다.
<솎아내라>.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길도 멀지만, 가슴에서 손발로 가는 길은 더욱 험난하다.
감탄하는 것도 어렵지만,
감탄하며 영글어진 것들을 손끝으로 써서
그 발원의 인물에게로 다시 흘려보내는 일은
더욱 어렵다.
말뿐인 감탄, 찰나뿐인 약속들이 많은 어른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언니는 가슴으로 느낀 것을 손발로 옮길 줄 아는 사람이다.
언니네 가훈처럼 말이다.
"실천하자, 바로지금!"

주말 농장으로 강원도에서 텃밭을 가꾸는 언니는
텃밭에서도, 또 인생길을 걸어오면서도
'솎아내야만 하는' 숱한 순간들을 만났다고 한다.
언니는 말했다.
"용감하게 솎아내라,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언니가 써서 보내온 <솎아내라>를 혜빈에게 전했다.
자신의 책을 진심으로 품고 읽어준 어른 독자로부터 전해온 따뜻한 화답에
아이는 상기된 표정으로 한참동안 눈동자를 굴려가며 시를 읽고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전해준 그 온기와 용기가 아이에게 고스란히 흘러갔으리라.

그림책으로 품은 것들, 그 과정에서 꿈 꾼 것들을 함께 나누며 걸어왔기에...
그 마음 알기에...
언니가 함께 앉은 강의실에서 많은 선생님들께 언니의 시를 소개한 이 순간이
내겐 정말이지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순간이었다.

'젖어드는 사람'인 언니는 비를 그렸다.
<솎아내라>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언니는 '비우고 다시 채우는 것'에 대한 여러 단상이 요즘의 화두라고 했다.

더 잘하지 못하고
더 다정하지 못하고
더 살뜰하지 못하고
더 여유롭지 못하고 동동이는
나의 지나간 오늘이 후회로 남지만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는 것을 연습하는 날들...
아쉬움 많은 인생에서
후회많은 삶에서
어리석은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의 말.
"흘려보내면 그만"


젖어들면 그대로 내 것이 될 것이요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흘러흘러 가겠지.
그렇게
"흘려보내면 그만"

그리고 내게 무엇보다 값진 선물을 쥐어주었다.

나를 알아주고
내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말해주는 한 사람
언니 한 사람으로 인해 이 순간
내가 걸어왔던 모든 부족한 여정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되어 빛을 발한다.

그 빛이 나를 다시금 부풀어 오르게 한다.
누룩으로 부풀어진 빵처럼 따뜻하게 가슴을 채운다.
그 온기는 다시 일어설 용기를 갖게 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이날 강의를 들으셨던 '나는 나다' 선생님께서 긴 편지글과 함께
아이들과 함께 창작한 교실 속 그림책을 구매하고 싶다고 연락을 주셨다.

아이들과 함께 이 어여쁜 그림책을 만들었다는 그 자체가 너무도 가슴에 벅차오른 나는 지금까지 팔불출 선생이 되어 싱글벙글 아이들과 함께 창작한 교실 속 그림책을 소개했다.
어린이작가와 함께하는 그림책 프로젝트를 응원한다면서 아무런 대가도 없이 후원금이라는 명목의 돈을 보내주신 분도 만났다. 꼭 갖고 싶다고 말씀하신 분들께 기꺼이 선물해드리기도, 얼마든 상관없으니 아이들 그림책의 후원금 명목으로 정성을 보내주시면 기쁨으로 몇 권씩 보내 드리기도, 친구의 아기가 태어나는 가슴벅찬 사건을 축하하기 위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교실 속 그림책의 첫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 만든 작은 그림책을 손에들고서 나는 힘이 빠져버린 순간들도 있었다.
열 권이 넘는 그림책을 샅샅히 읽어보시고서는 맘에 드는 두 권을 골라 자신의 강의에 쓰겠다며 초면에 '빌려달라'하셨던 분도 만났다.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으로 여기는 분, 한권 갖고싶으니 달라고 하시는 분도 만났다. 다른 용도로 그림책을 사용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니 홈페이지에 pdf 파일은 올려놓지 말라고 귀뜸해 주시고 나보다 앞서 나를 걱정해주시는 분도 만났다.

나는 그림책 구매를 문의하시는 분들께 다음의 말씀을 드리고 인쇄비용을 받고 보내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교육미술관 통로의 그림책은 어린이작가에게 주는 선물의 의미로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지도 교사인 나의 월급에서 매달 1/10을 떼어서 모은 돈으로 인쇄비를 부담하여 만들고 있다. 인쇄비와 재료비 등을 충당하면 그 금액을 벗어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일정한 틀을 정해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 일을 그냥 중구남방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바르게 지속하기 위해서는 뚜렷한 원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둘째는 이 책을 만나게 되는 이들이 이것이 쉽게 그냥 뚝딱 어디선가 만들어져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작가와 지도교사가 공교육의 교실 속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진정성이 담겨있음을 느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나는 나다' 선생님께도 그렇게 말씀을 전해드렸고 책을 인쇄해서 드렸다.
이 그림책으로 선생님의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풍성한 이야기를 이어가시면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하시는 말씀에
내 가슴 또한 가득히 부풀어 올랐다.  

아이들과 함께 쓴 책을 통해 그림과 색과 언어가 옮아가는 기쁨,
하나가 둘이 되고 또 넷이 되어 흘러가는 기쁨이다.

그리고 이 날 내게 특별했던 또 한 사람,
강의 내내 맨 앞에 앉으셔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해주셨던 장학사님이다.

교육청에서 여러 장학사님들을 만나뵈면서 나는 실로 경탄했다.
한 사람의 장학사로 인해 '교육의 흐름'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훌륭하신 장학사님 한 분이 전심으로 기획하고 추진하는 일들이 흘러가 교육 현장의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했다.

장학사님께서는 은유거울을 통해 '나사못'과 같은 자신을 들려주셨다.
한 명의 교육공무원으로서 커다란 조직 내에서 감당해야 하는 수많은 것들,
삐죽 튀어나오고 드러나기 보다는
망치로 두들겨지는 나사못 처럼 파고들어가
사람과 일을, 일과 일을, 사람과 사람을 이어야만 하는 순간들,
내 교육철학을 펼치고 실현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울시 교육 전반을 위해 묵묵히 일해야 하는 자리임을 아는 순간들.
그렇지만 그런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플랫폼'이 되기를 꿈꾼다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여러 지역청에서 따뜻하게 마음 써주시는 정말 좋으신 장학사님들을 여러 분 만나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맨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경청해주셨던 분은 한 분이다.
그렇기에 내게는 이 분이 특별한 한 사람이다.
아직 작고 어린 존재에게도 배우려고 하시고 전심으로 경청하려 하시고
선배로서 따뜻하고 진심어린 말씀을 나누어 주시는
그 유연하게 열린 가슴을 통해
크고 놀라운 것들이 펼쳐지고 흘러갈 것이라 믿는다.
그 한 사람의 작지만 강인한 플랫폼을 토대로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일이 만나고
교육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일어난 물살이 교육 현장의 전반에 흘러가
가장 중요한 우리 교실의 아이들에까지 가 닿을 것이라 믿는다.

삐걱거리는 곳에 두들겨져 박힌 하나의 나사못이
널따란 플랫폼으로 펼쳐지는 그 기적을
나는
언제까지나 진심으로 응원드리고 싶다.





그렇게 그득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밤,
달이 커다랗게 깊었다.
내 모든 부족한 여정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되는 신비
그 온기를 오래도록 간직하려
나를 향해 비추는 달빛을 오래도록 바라다보며 찬찬히 걸었다. 
                                                  






* 글을 쓴 이현아

그림책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담백한 시, 두툼한 마티에르가 살아있는 거친 나이프그림. 이 두가지를 사랑하며 살게 된 것을 삶의 여정에서 만난 행복 중 큰 것으로 여깁니다.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고 발견하는 삶을 가치롭게 여기며 교육과 예술이 지향하는 궁극의 본질도 ‘삶 속에서의 의미만들기 과정’ 과 다름없다고 믿습니다. 교실에서 의미를 발견한 날부터 아이들에게 스며흘러가는 통로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배워서 남 주는 삶의 기쁨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교육미술관 통로를 운영하면서 어린이작가들과 창작그림책을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교실 속 그림책]이라는 총서명의 그림책 시리즈를 독립출판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교육자이자 연구자(A/R/Tography)의 한 사람으로서 독서교육과 미술교육의 두 맥락에서 그림책에 대한 유의미한 담론을 이끌어내며, 가치로운 교육적 역할을 실천해내기를 소망합니다.     


*홈페이지 교육미술관 통로 http://www.museum-tongro.com


*블로그 http://blog.naver.com/ok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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