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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로이현아 Dec 14. 2017

“내가 아는 어린이의 세계, 과연 유효한가?”

[덮으면서 다시 시작하는 그림책] 현재가 아닌 동화를 보고 싶은 어른

똑똑. 독자님들 거기 계신가요?

어제 그림책에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 우체국에 놓고왔는데요, 등기로 보내서 그런지 하룻밤만에 그림책이 배송된 곳들이 있어서 독자님들께서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시더라구요.

첫 이야기부터 와닿아 한 장 한 장 아껴 읽겠다고 말씀해주시고,
정성스레 써 드린 엽서와 함께 기분좋은 선물이 되었다고 말씀해주신 분들...
주변 독서모임과 지인분들께 열심히 추천하고 있다고 말씀해주신 분들...
아아. 정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감사의 언어 말고는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되어요.
그 힘으로 이렇게 연말을 버티면서 주경야독하듯 열심히 한걸음 또 한걸음 걷고 있네요.^^

오늘은 여러분들께 첫 본문을 소개해드리는 날입니다.
두근두근... 제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사랑하는 프랑스의 교사이자 세계적인 작가 '다니엘 페낙', 그리고 어린이작가 이혜승이 던진 화두와 제가 삼각형으로 만나는 지점에 생겨난 성찰들을 담은 글입니다.





아이들의 현재가 아닌 동화를 보고 싶은 어른
“내가 아는 어린이의 세계, 과연 유효한가?”


               


‘어린이’라는 관념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린이다운’ 책을 기대한다. 어른의 시선에서 볼 때 불편하거나 현실적인 이야기는 어린이답지 못하다고 여긴다.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둔 채 내내 잊고 살아왔던 동화 속 순수와 낭만. 어쩌면 우리는 내 유년의 그것을 아이들의 맑은 눈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길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최기숙은 『어린이 이야기, 그 거세된 꿈』에서 어린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에는 어린이에 대한 ‘기대’나 ‘관념’이 투영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어린이를 순진무구하고 순수하며 순결하고 정직한 존재라고 기대한다. 이 점에서 어린이는 ‘인간’이라는 현실적 실체이기보다는 ‘천사’라는 이념적 가상물에 근접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 때문에 어른들은 현실의 어린이가 영악하고 때로는 교활하기까지 하며 잔인하면서도 무신경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자신들에게 친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줄 때, 도리어 그들을 낯설어하고 어색해하며 놀라움과 거부감이 교착된 감정 속에서 배신감마저 느끼곤 한다. 이 모든 것은 어린이에게 투영된 ‘어린이라는 관념’에 강박한 결과로서, 어린이의 세계는 더러움과 악, 잔인함과 불순함으로부터 표백된 세계라는 어른들의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_최기숙, 『어린이 이야기, 그 거세된 꿈』 중에서


어른은 종종 미래의 자산, 동심의 세계, 보호의 대상이라는 틀로서 아이들을 한정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 보려 한다. 그러나 어린이는 동화 속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의 세계를 아름답고 고결한 것으로 이상화하는 관점은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아이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고 길들이려는 태도만큼이나 옳지 못하다. 아이들은 어른과 똑같은 현재의 땅에 두 발을 내딛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지금을 사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오직 삶의 주체로서 존중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것, 그리고 ‘나중에’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아는 어린이의 세계, 과연 유효한가
아이들은 현재를 산다. 오늘날 아이들이 발 딛고 있는 현재의 일상은 어떠한가. 거실에 틀어놓은 뉴스에서는 연일 청년실업 문제에 대한 보도가 흘러나온다. 포털 사이트에는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 등을 포기하고 있다는 뉴스가 마우스 클릭을 유도한다. 클릭 한 번이면 요즘 청년들이 삼포, 사포를 넘어 이제 N포 세대에 이르렀다고 자조하는 인터넷 기사와 댓글이 가득하다. “50만 대졸 실업시대, 졸업장과 함께 떠안은 학자금 대출금”.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보도에 부모님은 소파에 앉아 혀를 끌끌 찬다. 그러면서도 정작 이런 현실적인 것들에 대해 ‘애들은 모르겠지’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애들은 몰라야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청년실업 문제는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에만 나오는 금기의 무엇이 결코 아니다. 적나라한 현실이다. 오늘날 어린이들에게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미디어의 홍수를 헤엄치는 것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다. 아이들은 학사모를 써도 취업이 되지 않는 사포세대의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자신도 이처럼 ‘포기, 포기, 포기하고 좌절하게 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실과 교과서에서 ‘솎아내기’를 배우는 아이는 무한 경쟁으로 서열화하는 사회 분위기를 떠올린다. ‘나도 이 약한 새싹처럼 솎아내어질까 봐 불안하’기 때문이다. ‘약육강식’ 혹은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사람이 아닌 식물에게만 적용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열세 살이란 나이를 살고 있는 아이들의 현재이다.


아이들에게서 흘러나온 ‘살아 있는 말’들은 그들과 가장 가까운 곁에 있는 사람 중 하나라 자부했던 한 명의 교사를 숙연하게 했다. 나 역시 아이들의 살아 있는 지금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어른에 불과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묻고 싶어졌다. 내가 아는 ‘어린이의 세계’, 과연 유효한가? 나는 어쩌면 이토록, 이들을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일까?




어린이를 하나의 먹잇감으로 만드는 방법
우리는 아이들이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해야 하는가. 그들의 잠재력이 어떻게 발현되도록 도와야 하는가. 청소년 성장소설들을 소개하는 『십대 마음 10대 공감』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이것이야말로 어른이 아이에게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방법 중 가장 잔인하고 악독한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어른들이 가장 손쉽게 사용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경쟁’과 ‘낙오’라는 무소불위의 주먹을 휘둘러 아이더러 앞만 보고 달리게 강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영악하게 제 앞만 쓸며 사는 법을 가르칠 뿐이라 아이들의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
(…)
어른들은 청소년기는 인생을 헤쳐 나가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고 생각해야 하는 시기라고 하면서 협박을 시작한다.
“할 게 없어도 공부는 해야 좋은 대학이라도 가지.”
“너 그래 가지고 대학 가서 취직이나 하겠어?”
하지만 어른들도 아이들도 알고 있다. 흔히 안정적인 미래와 맞바꿀 수 있다고 하는 서울 상위권 대학의 정원은 전체 학생의 단 15퍼센트 정도에 그친다는 것을. 또 그 15퍼센트 안에 들어도 결코 미래가 안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의 협박에 불안해하면서도 자신의 열정을 온전히 공부에도, 자신이 꿈꾸는 그 무엇에도 바치지 못한다.
_김미경 외, 『십대 마음 10대 공감』 중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잔인하게 이용하는 것, ‘경쟁’과 ‘낙오’라는 무소불위의 채찍으로 어린이를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아이들에게 세상을 소개하는 가장 끔찍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혜승이 던진 ‘학사모의 질문’에 대해 어른이 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저렇게 우울한 졸업 하고 싶지 않으면, 너는 공부 열심히 해서 학사모도 우수한 것을 써야 한다. 열심히 안 하면 청년실업에 시달리고 결혼까지 포기하는 거 봤지? 너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그러고는 입꼬리를 비틀며 이렇게 빈정대는 것이다. “애들이 무슨 벌써부터 이런 이야기를!” 이런 반응은 불안감으로 앞만 향해 내달리는 아이를 영악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속도가 느리거나 돌부리에 넘어지기라도 한 아이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게 만든다. 우리가 만든 이 한심한 아이는 사회에서 ‘하나의 먹잇감’이 된다. 스스로를 언제나 ‘알파벳 한 글자를 깨치는 데 일 년이나 걸렸던 열등생’이라 소개하는 세계적인 작가 다니엘 페낙은 『학교의 슬픔』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섬뜩하게 경고한다.


나는 한심해. 한심해. 한심해.
난 한심한 놈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자신이 한심하다는 확신에 빠져 있는 청소년은,
하나의 먹잇감이다.
_ 다니엘 페낙, 『학교의 슬픔』 중에서


다니엘 페낙은 이처럼 어른이 아이의 장래를 근심하고 협박하는 것을 ‘무한을 센티미터로 재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아이에게 그 시절의 일 년은 천 년과도 같은’ 것이다. 영겁으로 응축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 이것을 어른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태평양을 품은 그 무한한 가능성에 고작 30센티미터의 플라스틱 자를 갖다 대며 윽박을 지르는 것과 같다.


우선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알다시피 어른과 아이는 시간을 동일하게 지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십 년 단위로 계산하는 어른의 눈에 십 년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이 오십이 되면 십 년은 금세 지나간다! 그렇게 빠른 속도감 때문에 어머니들은 아들의 장래를 근심하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오 년 후면 벌써 대학입시네, 아니 이제 금방이잖아! 이 어린 것이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근본적으로 뭐 그리 변할 수 있겠어? 그런데 아이에게 그 시절의 일 년은 천 년과도 같다. 아이의 눈에 자신의 미래는 뒤이은 며칠 안에 몽땅 달려 있다. 아이에게 장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한을 센티미터로 재라고 요구하는 꼴이다.
_ 다니엘 페낙, 『학교의 슬픔』 중에서



고작 30센티미터의 플라스틱 자를 갖다 대지 말 것
우리가 이혜승이 던진 『학사모의 질문』에 해야 할 일은 우리가 가진 고작 30센티미터의 플라스틱 자를 갖다 대지 않는 것이다. 무한을 센티미터로 제한하는 고작 30센티미터 플라스틱 자의 노릇을 교실이 자처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작가 헨리 애덤스는 시대에 뒤떨어진 선생만큼 딱한 것도 없다고 했지만, 무한을 센티미터로 제한하는 플라스틱 자만큼 세상에 딱하고 비참한 노릇도 없을 것이다. 설령 부모와 사회가 센티미터의 논리로 아이를 냉소하는 순간에도 어린 날의 교실만큼은 끝까지 천연덕스럽게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 아이가 내민 모래 묻은 조개 껍데기에서 그가 품은 거대한 태평양을 기어이 발견해내어 추켜세워주는 호들갑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온실에서의 물 주기는 때로 뜬구름처럼 허탈하고 무기력하다. 그러나 매일 이루어지는 그 행위는 분명 콩나물시루 속 콩나물을 자라게 한다. 내가 오늘 붓는 물이 바닥을 흥건히 적시며 그대로 새어나갈지라도 한 모금의 해갈에 조용히 제 머리 위를 비집고 크는 아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결코 암담하지 않다. 뉴스에서 들리는 회색빛 미래 앞에 입시라는 무거운 관문을 향해 허덕이며 달리는 아이들. 그들이 바라보는 사회가 가진 모순과 일찍이 그들에게 던져진 냉혹한 질문들. 그것이 암담하거나 슬프지 않은 이유는 이를 통해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이혜승의 기지와 용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려야 한다면, 어느 방향을 ‘향해’ 또 무엇을 ‘위해’ 달려야 할 것인가. 이혜승은 그 무엇에도 쫓기지 않는다. 출발점에 우뚝 서서 사방을 한 바퀴 빙 둘러보며 그 방향과 본질에 대해 먼저 고민한다. 그리고 어떠한 순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 두둑한 배포에서 무한한 태평양을 품은 잠재력과 희망을 본다.




마지막으로 학사모는 묻는다. “꿈을 이룬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혜승은 이에 대해 꿈을 이루는 것은 좋은 성적과 대학 또는 많은 돈이 그 척도가 될 수 없으며, 더욱이 한 사람의 직업이 곧 그 사람의 꿈을 일컫는 지표는 아니라고 일침을 가한다. ‘무엇이 될까’를 정하기 전에 그 바탕이 되는 ‘어떻게 살까’에 대한 고민이 먼저인 것이다.




오늘 이 책을 펼친 당신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가. 꿈을 찾아가는 여정은 결코 열두 살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질문을 되묻고 고민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오히려 오래전 학사모를 쓰고 졸업한 우리 어른이다. 당신은 어떻게 살기 위해 학사모를 썼는가. 혹 오래전 졸업과 함께 하늘 높이 날렸던 학사모가 그대로 허공에 멈추어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학사모가 자신만의 날개를 달고 자신만의 창공을 마음껏 날고 있기를, 그리하여 진정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살고 있기를, 부디 바란다.










 
[덮으면서 다시 시작하는 그림책] 의 구입을 문의하셨던 분들, 독자가 되어주시길 원하는 분들께 안내드릴게요.
이 책을 구입하기 원하시는 분들께 '만원의 행복'으로 책을 보내드리려 합니다.
제가 이 책 한 권을 만드는데 (소량인쇄했기에) 1만원 이상의 금액이 들어갔으므로 사실상 인쇄비용보다 적은 금액이에요.

제가 운영하고 있는 비영리 독립출판사는 교사의 자비 부담으로 운영되며 수익을 추구하지 않아요. [교실 속 그림책]이라는 총서의 창작그림책을 비매품으로 출판등록해오고 있는 것이 그 이유이고요.
이번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책으로 보다 의미있는 일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 다문화 어린이들에게 그림책을 만들어주는 일에 수익금을 전액 기부할 예정입니다.

총230권 한정판으로 출간한 책 중에서 현재까지 책을 구매해 주신분들께서 보내주신 금액이 벌써 70만원이 넘었어요.
독자들의 품으로 간 책들을 생각하면서 가슴을 콩닥거리고 있답니다.

구매를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의 링크에 성함과 주소를 남겨주세요.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fsMbxbXrEGb6YKsZ6B2q3dNz-MQq5XvTuizlM42Gv6qo7llg/viewform?usp=sf_link




그럼 이웃님들, 다음 글은
[교실 속 그림책]솎아내기(이혜빈 글 그림)과 함께
경쟁과 낙오, 솎아질까 두려운 아이들에게
"다른 화분에 심으면 넌 거기서 제일 커."
라는 화두를 가지고 만나뵐게요^^







* 글을 쓴 이현아

그림책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담백한 시, 두툼한 마티에르가 살아있는 거친 나이프그림. 이 두가지를 사랑하며 살게 된 것을 삶의 여정에서 만난 행복 중 큰 것으로 여깁니다.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고 발견하는 삶을 가치롭게 여기며 교육과 예술이 지향하는 궁극의 본질도 ‘삶 속에서의 의미만들기 과정’ 과 다름없다고 믿습니다. 교실에서 의미를 발견한 날부터 아이들에게 스며흘러가는 통로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배워서 남 주는 삶의 기쁨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교육미술관 통로를 운영하면서 어린이작가들과 창작그림책을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교실 속 그림책]이라는 총서명의 그림책 시리즈를 독립출판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교육자이자 연구자(A/R/Tography)의 한 사람으로서 독서교육과 미술교육의 두 맥락에서 그림책에 대한 유의미한 담론을 이끌어내며, 가치로운 교육적 역할을 실천해내기를 소망합니다.     



*홈페이지 교육미술관 통로 http://www.museum-tongro.com




*블로그 http://blog.naver.com/ok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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