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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로이현아 Dec 24. 2017

“엄마, 나 왕따인 거 같아.”

[덮으면서 다시 시작하는 그림책]나를 엉키게하는 것들,스스로 푸는 매듭

똑똑. 독자님들 어느덧 성탄을 앞두고 있네요.

오늘 던질 화두는 제가 아이들 곁에서 써왔던 글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애틋하고 각별한 것 중 한 부분에 속합니다. 독자님들께도 가닿기를 바라봅니다.



나를 엉키게 하는 것들, 그리고 스스로 푸는 매듭
“엄마, 나 왕따인 거 같아.”




엄마, 나 왕따인 거 같아
“겉보기엔 괜찮아 보이지만, 속은 엉켜 있어요.”

이 그림책은 어린이작가 이혜승이 썼던 편지의 한 구절로부터 시작했다. 열세 살 또래들의 속마음,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안으로는 가득 엉켜 있는 고민들을 빨간 실타래에 담아 풀어냈다. 아이들은 친구가 던진 한 마디가 마음에 엉겨 붙어 넘어지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거부당한 스스로를 ‘왕따’라 칭하며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기도 한다. 친구들로부터 소외될까봐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친구를 따돌리기도 한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엄마, 아빠, 나 왕따당하는 것 같아 힘들어”라고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까? 그림책 창작 과정에서 어린이작가 이혜승은 직접 설문지를 만들어 자신이 다니는 학교 4~6학년 학생 총 221명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지는 즉석에서 작성하여 곧장 수합하도록 했으며, 원하는 경우 익명으로 써도 된다고 안내했다. 아이들이 쓴 것은 직접 부모님께 들은 대답이 아니라, 평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 부모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를 유추하여 써본 것이다. 어린이작가 이혜승과 함께 뽑은 인상 깊은 답변은 다음과 같다.



아이들은 어떤 대답에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또 어떤 대답에 바닥으로 무너질까? 아이들은 스스로를 작고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한마디 말이라고 말한다. 
“별일도 아닌데, 무시 못 하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잊어버려.”

무심코 던져진 이 한 마디 말은 친구들 사이에서 생겼던 그 어떠한 다툼과 폭력보다도 큰 상처였다고 고백한다. 한 마디 말에 의해 나는 ‘고작 별일도 아닌 것에’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무시하고 잊을 수 있었다면 부모님께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기준에서는 무시하고 잊어버려야 할 별것 아닌 것들이 내게는 자꾸 걸림돌이 된다. 
무시하지 못하는 나, 자꾸 신경이 쓰이는 나는 더욱 초라하고 못난 아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무시하려 노력해도 자꾸만 기어나와 내 발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실 하나. 그것과 직면하지 않은 채 그저 꾸역꾸역 살아가던 어느 날, 자꾸 길어진 실은 그만 엉키고 만다. 엉킨 실에 발이 묶인 나는 그제야 실을 돌아다보며 엉킨 부분을 찾으려 매만진다. 하지만 엉켜 있는 실을 푸는 것은 지루하고 힘든 일이다. 그냥 무시하고 싹둑 잘라버리면 안 될까? 그러나 가위로 잘라버린 실을 다시 묶는 것은 필연적으로 매듭을 남긴다. 
어린이작가 이혜승은 불룩하게 손에 잡히는 매듭을 흉터로 은유한다. 아이가 여러 번 곱씹어 어렵게 털어놓은 고민에 대해 그저 대수롭지 않게 한 마디 말을 내던지는 무심한 어른은, 오늘도 아이의 마음에 엉켜버린 매듭 자국을 남긴다.








그림 안 그리고, 그림책을 만들 순 없나요
아이들과 그림책 작업을 하면서 내가 가장 고심하는 것은 드로잉에 자신감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자신만의 언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게 이끌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몇 가지 개념과 느낌은 오직 시각 형태만을 통해 전달될 수 있다. 미국 화가인 조지아 오키프가 “나는 다른 방식으로는 말할 수 없는, 표현할 단어들이 없는 것들을 색채와 형태를 통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림책 창작을 통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색채와 형태를 통해 표현하는 것은 시각적 창조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림책 창작 과정에서 어린이작가 이혜승은 드로잉에 자신감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독창적이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많이 쏟아내는 편이었지만, 이에 비해 추상적인 개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은 어려워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문 콜라주, 사진 매체 활용 등 다양한 재료와 표현 방법을 시도하였고, 두 권에 걸친 그림책 창작 과정을 통해서 드로잉에 대한 기능적인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어린이작가 이혜승은 자신의 첫 번째 창작 그림책 『학사모의 질문』에서 평소 미디어를 통해 보고 들으면서 품었던 질문을 그림책의 서사로 발전시켰다. 청년실업 문제와 사포세대의 고민이라는 매우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주제를 어린이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그림책으로 끌어낸 것이다. 어린이작가 이혜승은 이러한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주제의식을 구체적인 장면으로 시각화하는 것을 놓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표현 방법을 택하는 것이 좋을까? 
그림책의 그림은 꼭 ‘그려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수업 시간마다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쳤고, 그 결과 그림책의 화두를 던지게 했던 미디어 자체를 있는 그대로 그림책에 옮겨오는 콜라주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관련된 신문 기사를 찾아 오려두고 관련 키워드를 검색하여 캡처한 화면과 뉴스 동영상의 캡처 화면, 그리고 자신이 읽었던 인터넷 신문을 그대로 인쇄하여 오려 붙이는 식이었다. 

이는 미디어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으로서 오히려 현장감이 살아 있는 자료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참신하고 독특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미디어 자료를 직접 제시하니 그 내용을 글로서 구태의연하게 풀어서 설명하거나 묘사하지 않아도 되었다. 미디어 자료를 직접 옮겨온 콜라주 방법은 전체적인 그림책의 구성과 분위기를 오히려 깔끔하게 정돈하여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한 눈에 들어올 수 있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창작 과정에서 어린이작가 이혜승의 태도에도 눈에 띄게 변화가 생겼다. 발상의 전환으로 드로잉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고 독창적인 표현 방법을 구상해낸 경험은 어린이작가에게 자신감을 갖게 했다. 어린이작가 이혜승은 출판 등록한 두 권의 그림책과 함께 현재 구상하고 있는 세 권의 그림책을 마저 완성하여 졸업할 때까지 다섯 권의 책을 출판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자신이 창작해낼 새로운 책에 대한 기대감으로 또 다시 열심히 쓰고, 그리는 중이다.

창작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어린이작가 이혜승은 두 번째 창작 그림책 『엉킨 실』에서도 드로잉을 대체할 만한 다양한 표현 방법을 모색하였다. 왕따로 인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고민에 빠진 자신의 심경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복잡하게 엉켜있는 속마음에서 실이 엉켜있는 형상을 떠올렸고, 세르주 블로크의 작품 표현 방식에 주목했다. 세르주 블로크는 『나는 기다립니다』에서 기다림이라는 소재를 검정 선과 하얀 여백, 그리고 빨간 끈으로 풀어내었다.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어린이작가 이혜승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연필 선을 대신한 ‘빨간 털실의 선’에 투영하였다.

우리는 교실 뒤 쪽에 흰색 전지를 펼쳤다. 어린이작가 이혜승 그리고 친구 두 명이 함께 교실에 남아 손가락으로 직접 빨간 털실을 엉키게 하고, 풀어보고, 자르고 묶어보았다. 창작 그림책 『엉킨 실』에는 드로잉 선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드로잉을 ‘손짓’ 표현으로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의자 위에 올라가 실과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장면들을 카메라 앵글에 고스란히 담았다. 세 명의 학생과 나는 늦은 오후 내내 실 뭉치와 함께 교실 안을 뒹굴었다. 우리에게 이 작품은 그 제작 과정이 하나의 은유적인 퍼포먼스 그 자체로 느껴졌다.






세르주 블로크는 실제로 자신이 들었던 가장 큰 칭찬은 “당신은 정말 그림을 못 그리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법은 터득하셨네요. 그게 제게 희망을 줍니다”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세르주 블로크에게 있어 선 이면에 담긴 이야기를 알아보아주는 독자, 못 그리는 그림을 통해 희망을 발견해주는 독자는 그 어떤 칭찬보다도 큰 힘이 되었다. 세르주 블로크는 창작에 있어 필요한 것은 그저 무언가를 할 용기이며 스스로에게 무언가 해보는 것을 허락하는 마음, ‘왜 안 되겠어’ 하는 생각, ‘실패해도 괜찮아, 별거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자세라고 말한다. 그의 조언은 창작을 어려워하는 어린이작가에게 용기를 주었고 고정관념을 깨뜨려주었으며 ‘잘 그리는 것’에 대한 기준을 바꾸게 했다.






엉킨 실이 이끌어내는 고백들
아이들을 엉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들과 그림책을 매개로 소통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만났던 순간이 있었다. 그림책 감상의 한 방법으로서 ‘의미 재구성 하여 시 쓰기’ 수업을 할 때였다. 속마음 이야기를 툭 던져놓고는 쑥스러운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읽지 마세요.” 그러곤 덮은 종이를 슬그머니 내게 밀어놓고 가는 아이들. 아이가 가고 나서 조심스레 펼쳐본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마음들이 적혀 있었다.


울고 싶다. 세상 살기가 힘들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
부모님도 내게 신경 안 쓰다. 나는 ‘관심종자’인가?
관심받고 싶다. 나도 평범해지고 싶다.

따돌림당한 나는 생활이 비참하다.
아무도 나의 마음을, 내 생각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피한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싫었다.



이 글을 읽은 날로부터 나는 가슴에 돌덩이가 얹어진 것 같은 부담감에 시달렸다. 아무리 눈을 질끈 감아도 자꾸만 보이는 것들. 몰랐다면 모른 채 넘어갔을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내게 보여준 이상, 나는 아이에게 대답해주어야만 했다. 교사로서의 나는 어떻게 공감해주고 대답해주어야 할까. 나는 무겁게 내려앉는 부담과 책임감에 자꾸만 뒤척였다.

여름방학이 되기 전에는 기필코 답장으로 내 마음을 전하리라 마음먹고 펜을 들고 엽서 위를 한참 서성이기를 여러 번. 나는 끝내 답장 쓰기를 그만두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몰랐다. 막막함이 만들어내는 공허하고 어설픈 말들, 그 불편한 표현들이 싫었다. 진심을 담아서 살아 있는 말을 적어주지 않을 거라면 스스로 아직 쓰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림책은 또 얼마나 뒤적였던가. 나의 이런 마음을 대신 전달해줄 그림책을 찾고 또 찾았다. 나는 ‘왕따를 위한 그림책’, ‘지친 당신을 위한 위로의 그림책’과 같은 문구가 붙은 그림책을 자꾸만 뒤적이다가 신물이 났다. 그 억지스러움이 싫었다. 공감과 위로를 흉내 내기는 싫었다. 그렇게 아이에겐 아무런 응답도 못한 채 마음에 짐을 가득 지고, 방학을 맞이했다.


콘크리트에서 헤엄쳐 나와 주고받은 편지
그렇게 맞이한 여름. 그날도 한 켠 무거운 마음으로 상수동의 한 그림책 서점에 들러 독립출판물들을 읽고 있던 날이었다. 책장마다 샅샅이 마음이 가는 그림책을 골라 넘겨가며 살가운 사장님의 책 소개를 듣고 있던 참이었다. 『Swimming in concrete』라는 제목의 책을 만났다. 과감하고 기괴한 그림들과 함께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영어로 쓰여 있었다.


내가 제일 도망치기 좋아했던 곳은 응급실이었다. 나의 학교 옆에 있던 곳.
나는 껌 한 통을 사서 응급실에서 치료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상처들은 쉽게 치료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그들을 돕기 위해 뛰어 나가기도 했다.
나는 딸기 맛 껌을 씹으면서 질문했다.
왜 나는 상처를 안에 가지고 있어야 할까?
나도 몸 밖에만 상처를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_정혜수, 『Swimming in concrete』 중에서


책을 덮자 표지에 내 얼굴이 너무도 환하게 비추어져 흠칫 놀랐다. 책을 바라보고 있는 의아한 내 표정을 정면으로 마주하니 왠지 불편해졌다. 작가가 의도한 바였을 것이다. 이후에 작가의 말을 들어보니 책을 읽는 자신의 표정을 직면하도록 일부러 얼굴이 비치는 표지를 만들었다고 했다. 책등을 얼기설기 꿰맨 붉은 실 자국으로 자신의 상처를 은유했던 책. 이 책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불편하고 강렬했다.

그리고 며칠 뒤 또 다른 그림책 독립 서점에서의 모임에서 나는 우연히, 이 책을 쓴 혜수 작가와 만나게 되었다. 처음 혜수 작가를 보았을 때, 나는 그녀가 내가 만나고 있는 아이들처럼 어리고, 해맑고, 자신감 넘치는 소녀라는 사실이 반가웠다. 자신의 ‘콘크리트’를 열심히 헤엄쳐 남들과 다른 길을 걸었고 지금 이렇게 아름답게 생존했노라고,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를 보면서 나는 “읽지 마세요”라며 내게 마음을 내밀었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녀라면, 아이들에게 필요한 말들을 나보다 더 힘 있게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특별한 말을 전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그녀 존재 자체가, 아이들에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떠한 의미를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이의 아픔에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다만 한 존재와 또 다른 존재를 잇는 연결 통로가 되어줄 수는 있었다. 나는 그녀가 있는 뉴욕과 이곳 서울을 잇는 통로가 되어주기로 다짐했다. 혜수 작가는 아이들에게 애틋한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교실에 ‘Dear. Hea-soo’라는 이름의 편지함을 마련했다. 혜수 작가가 전해준 메시지와 책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었고 선생님이 너희에게 해줄 수 없는 어떤 공감과 유대를 그녀를 통해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누구든지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다면 편지를 써서 편지함에 넣어달라고 했다. 정말 많은 아이들이 편지를 썼다. 나는 그 편지들을 모아 뉴욕으로 전했고, 혜수 작가는 대학 생활을 하는 바쁜 학기 중에 틈틈이 답장을 써주었다. 편지를 쓴 아이들은 백 명이 넘었고 모두에게 답장을 할 수 없어 특별히 마음이 가는 아이 열 명을 선정했다. 우리는 답장을 받지 못한 아이가 상처받을 것을 염려하여 열 통의 편지를 각각 그 주인공에게 은밀히 전달하기로 했다.                                                                             



드디어 학교로 편지가 국제 배송되어왔다. 방과 후에 은밀하고 치밀하게 편지를 건네받은 아이들은 007작전을 펼치는 비밀 공작원들처럼 흥분했다. 마치 합격 통지서를 받아든 것처럼 편지를 품에 안고 감격스러워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아이가 직접 봉투를 뜯는 기쁨을 누리게 하고 싶어서, 또 자신이 털어놓은 속마음에 대한 비밀을 보장해주기 위해서 나는 편지를 읽어보지 않았다. 아이가 편지봉투를 받아들고, 놀라고, 감격하고, 뜯고, 눈동자를 움직이며 혹은 단숨에, 혹은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았을 뿐이다.

봉한 것을 뜯는 순간, 소란이 뚝 끊겨버린 정적 속에 사뭇 진지하게 편지를 읽는 아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아이가 읽는 편지 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다만 이렇게 마음이 오갔던 과정과 자신이 털어놓은 고민에 대해 진정 어린 화답과 관심을 받은 경험 그 자체가 아이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기를. 오직 그것이 마음에 가닿아 다시 힘을 낼 작지만 신선한 계기가 되어주기를.







잠깐만요, 내가 당한 그거 왕따 맞나요?
“선생님, 그런데요, 이제는 내가 당한 것이 왕따가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왕따가 대체 뭘까요?”

창밖에는 소나기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중이었다. 편지로 마음을 나누다 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던 날, 혜수 작가는 내게 물었다. 그녀는 뉴욕에서도 사람을 만나면 매번 자신의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I was bullied(나는 따돌림을 당했었어요)”라는 말로 자꾸만 과거의 ‘왕따 이력’을 꺼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오히려 아물어가는 자신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당한 그것이 왕따가 맞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직장에도 왕따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왕따라는 것의 기준이 뭐냐는 거죠.” 우리는 고민했다. 내가 속해 있는 교실이나 직장에서 여러 명이 나를 싫어하면 그것은 왕따인가? 그렇다면 세 명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왕따인가 아닌가? 단 한 명이 적극적으로 싫어하면 그것은 왕따인가 아닌가? 혹은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왕따인가? 노골적인 폭력이 없었음에도 소외감을 느꼈다면 그것도 왕따인가 아닌가?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내게 일어난 일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닌 그것을 규정짓고 분류하는 ‘수식어’로 한정하여 보는 것의 폐해에 대해 생각했다. 내게 일어난 일에 수식어를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 틀에 갇힌 눈으로 사고하게 된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를 ‘왕따당했던 아이’로 소개하는 것에 의문을 갖게 된 것이 진심으로 반가웠다. 창밖에 쏟아지는 소나기의 굵은 빗방울만큼이나 시원하고 통쾌했다. 성장은 언제나 나를 수식하고 한정하는 것들에 의구심을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를 옭아매는 실과 규정하는 틀을 훌쩍 뛰어넘은 혜승 그리고 혜수. 그녀들은 스스로 자신의 매듭을 풀어냈다. 새파란 영혼을 지닌 십대 시절에 말이다. 그녀들이 만들어나갈 삶의 여정이 더욱 진심으로 기대되는 이유이다.














[덮으면서 다시 시작하는 그림책] 의 구입을 문의하셨던 분들, 독자가 되어주시길 원하는 분들께 안내드릴게요.
이 책을 구입하기 원하시는 분들께 '만원의 행복'으로 책을 보내드리려 합니다.
제가 이 책 한 권을 만드는데 (소량인쇄했기에) 1만원 이상의 금액이 들어갔으므로 사실상 인쇄비용보다 적은 금액이에요. 

제가 운영하고 있는 비영리 독립출판사는 교사의 자비 부담으로 운영되며 수익을 추구하지 않아요. [교실 속 그림책]이라는 총서의 창작그림책을 비매품으로 출판등록해오고 있는 것이 그 이유이고요.
이번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책으로 보다 의미있는 일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 다문화 어린이들에게 그림책을 만들어주는 일에 수익금을 전액 기부할 예정입니다.

총230권 한정판으로 출간한 책 중에서 현재까지 책을 구매해 주신분들께서 보내주신 금액이 벌써 70만원이 넘었어요.
독자들의 품으로 간 책들을 생각하면서 가슴을 콩닥거리고 있답니다.

구매를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의 링크에 성함과 주소를 남겨주세요.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fsMbxbXrEGb6YKsZ6B2q3dNz-MQq5XvTuizlM42Gv6qo7llg/viewform?usp=sf_link





그럼 독자님들, 다음 글은 
[교실 속 그림책]어둠 그리고 우주(신현서 글 그림)과 함께
청춘의 성장통, 삶의 온전한 주인되기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라는 화두를 가지고 만나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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