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믿지 못해 주저했던 과거의 내게, 길을 찾아 나선 현재의 내가
삶 속에는 결코 '추억'이라고는 칭할 수 없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강렬한 기억으로 각인되어버린 순간들이 있다.
나는 그 때 아빠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어땠는지 정확히 떠올릴 수는 없지만, 뿌연 기억 속에서도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 아빠의 말에 깊게 뿌리내려있는 단호함을, 그리고 내게 그림이란 그저 '그런 거'여야만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 순간의 기억은 종종 내 머리와 마음 속으로 덮쳐 들어왔다.
밀물의 파도처럼,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쉬는 시간 혼자 조용히 앉아 낙서를 끄적이던 나와는 달리, 내 옆 자리의 남자애는 헤드폰을 낀 채 무리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비트가 강한 음악을 즐겨 드는 아이였다.
딱히 접점도 없고 친하지도 않아 늘 어색하게 느꼈던 이 친구가 어느 날은 내 어깨 너머를 힐끗 보더니 옆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렇게 내 낙서는 그 친구의 SNS 계정에 올라갔다. 내 이름 석 자와 함께.
그 친구는 워낙 장난기도 많은 성격이라 가벼운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겠거니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마음은 이 순간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기록한다. 아마도 내가 그린 것이 인정 받았다는 생각에, 어쩌면 영영 이루지 못할 꿈을 조금이나 맛본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해 그 아이는 음대에 합격했다.
반면 나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 계속 낙서를 끄적이기만 했다.
계속.
'분명 이건 내가 아닌데.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
…… 나의 삶이 점점 무미건조한 무언가로 굳어져간다는 느낌이 든다. …… 가족이 말하는 ‘훌륭함’ 이란 인정받는 직업을 갖고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의미한다. 이 말의 의미는 내게 은근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물론 지금도 어리지만, 지금보다 더 어렸던 시절에는 그게 압박인지조차 몰랐다. …… 가족의 기대는 ‘효도’와 ‘의무’라는 명패를 단 채 ‘똑똑한 아이’, ‘착한 딸’이라는 다소 꽉 끼는 옷을 입은 내 어린 몸에 묵직하게 내려앉았고, 그 힘의 무게는 내게 너무 익숙해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