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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색 Nov 07. 2021

이름 없는 열린 집

Intro pt. 1: 그곳을 만나다

✤ 본 글은 연재소설 <유영과 함께 차를>의 1편입니다.


그곳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코끝을 부드럽게 감싸는 향기 때문이었다.

흑백의 모노크롬을 총천연색으로 물들이는, 어지럽도록 달큰하면서도 한없이 포근한 냄새. 이 향기에 속절없이 사로잡혀 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찰나의 설렘과 막연한 기대감으로 이끌린 유영의 시선 끝에 서 있는 건 놀라우리만큼 평범한 건물이었다. 이 동네는 물론이고 도시의 낡고 이름 없는 골목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적갈색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2층 주택. 지극히 흔하디 흔한 외관, 튀는 것 하나 없는 모습 ― 하지만 어쩐지 유영의 눈길은 이 집으로 자꾸만 돌아가더니 이내 가만히 머물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발걸음을 멈춰버린 채, 유영은 가만히 서서 멀찍이 떨어진 건너편 모퉁이의 집을 지그시 바라봤다.


벽돌이 주는 평범한 첫인상과는 달리 이 집의 구조는 다소 독특해 보였다. 보통의 주택 공간이 집을 이루는 건물과 를 둘러싸는 담장이라는 독립적인 별개의 구조물로 이뤄져 있다면, 이 주택의 건물과 담장은 서로 분리돼 있지 않았다. 대신, 건물 한쪽 벽면이 담벼락과 합쳐지며 길가와 곧바로 접해 있어 집 한쪽 벽면이 바깥세상에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참으로 요상한 모양새였다. 게다가 이 벽면에는 아주 크고 맑은 창이 하나 나 있었는데, 이 창문과 집 내부 공간 사이의 유일한 가림막은 얇은 레이스 커튼 한 장뿐이었다. 그러니 이 커튼만 열려 있다면 길을 지나가던 누구라도 집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셈이었다. 심지어 커튼은 너무 얇아, 창에 바짝 붙어 커튼 너머를 들여다보면 집 내부가 훤히 보일 듯했다 ― 물론 유영은 남의 집 안을 훔쳐보는 따위의 일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삽화 추가 예정]


이 묘하게 생긴 벽면과 이어져 건물의 나머지를 두르고 있는 야트막한 벽돌담은, 큼지막하고 널찍한 양문형 대문으로 이어졌다. 오르막길을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문이 나 있는 탓에 대문은 길로부터 꽤 높이 떨어진 위치 있었는데, 문과 길 사이의 이 꽤 먼 거리를 다행히도 네 개의 나지막한 돌계단이 친절하게 잇었다. 이 회색 돌계단과 대비되는 부드러운 밤색의 나무 문짝은, 너른 판자들이 가로로 가지런히 이어 붙여진 단순하고 차분한 디자인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대문은 길과 정면으로 마주해 나 있는 대신 길과 길이 교차하는 지점을 바라보며 사선으로 넓게 나 개방적인 느낌을 풍겼는데, 집 자체가 계단 위 높은 지대에 위치해 길을 굽어보는 듯 보여 더욱 그랬는지 이 집은 개인의 거주지라기보다는 공공의 공간인 듯한 인상을 주었다. 또한 어쩐 이유에선지 대문의 오른쪽 문짝마저 활짝 열려 있어, 집은 마치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이리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듯하기까지 보였다.


[삽화 추가 예정]


이 손짓에 이끌려서였을까, 멀찍이 떨어져 집과 비스듬히 서 있던 유영은 대문을 향해 몇 발짝 더 가까이 움직여 가 집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위치에 섰다. 열려 있는 대문 너머로 푸릇한 잔디밭이, 그 푸르름으로 가득 찬 아담한 마당과 정원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언뜻 닿는 곳마다 알록달록한 파스텔톤 화초의 향연이었다. 초여름의 산들바람이 스치자 오색찬란한 빛깔들이 가볍게 흔들리며 춤을 추었고, 이를 본 유영의 차분한 숨소리에는 나직한 감탄사가 섞여 나왔다. 이 아름다운 꽃과 풀들이 수놓은 마당 한가운데에는 서로 다른 디자인의 흰 테이블 두 개가 서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었으나 방금까지도 누가 앉아 있었는지 이 양 테이블 위에는 찻잔과 미처 비우지 못한 케이크 접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시 한번 꽃들이 춤을 추고,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온 달콤한 향기가 유영의 코를 간질였다 ― 향긋한 차와 진한 크림, 그리고 절인 과일 냄새가 뒤섞인 달달한 향. 아까 처음 맡았던, 발걸음을 멈추게 한 바로 그 향기였다. 유영은 홀린 듯 대문 너머의 공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대문의 사각진 프레임이 두르고 있는 마당의 정경이 마치 나무 액자에 담긴 한 폭의 예쁜 그림과도 같아 보였다.


호기심에 몇 발짝 더 가까이 나아갈 법도 했지만, 유영은 선뜻 집에 접근하지 못했다. 열린 대문, 테이블들과 식기를 생각하면 카페나 식당이겠거니 싶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마땅히 간판이나 명패라 할 건 없었기 때문이었. 게다가 테이블들 뒤로 보이는, 왼쪽 담장에서부터 붙어 이어지는 벽돌 건물은 영락없는 일반 가정집의 모습이었다 — 수북이 자란 담장이가 창문을 제외한 벽 전체를 폭 덮고 있는 모습이 조금 특이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러니 유영은 조심스러움과 불확실에 가로막혀 멀찍이 떨어진 채 대문 너머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때였다.

현관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긴 회색 머리를 곱게 말아 화려한 비녀를 꽂아 올리고 한 팔에는 큼직한 은쟁반을 낀 한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나릿하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마당 한가운데의 테이블들로 향하더니 가까운 테이블 상판 위에 은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찬찬한 손길로 어질러 있는 식기들을 하나하나 집어 은쟁반 위로 차근차근 올렸다. 그녀의 가늘지만 단단한 팔이 테이블과 쟁반을 부드럽게 오갈 때마다 연보라색 시폰 블라우스의 나팔 소매가 맑은 여름 공기를 가르며 하늘거렸다. 어느새 정리된 식기들로 가득 찬 쟁반을 양손으로 집어 올린 여인은 집 쪽으로 우아하게 몸의 방향을 돌렸― 그리고 그 순간, 대문 너머에서 자신을 빤히 보고 있던 유영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완벽하게.


화들짝 놀라며 당황으로 일순간 온몸이 굳은 유영은, 싱긋 웃어 보이는 여인의 온화한 얼굴을 보지 못하고 도망가듯 허겁지겁 자리를 떠났다. 그런 유영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본 여인은 은쟁반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빠르지만 다급하지 않은 발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 돌계단까지 단숨에 나왔다. 여인은 이미 사라져 버린 유영을 찾아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이내 아쉬움이 살짝 묻어난 얼굴로 뒤돌아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그대로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가려던 여인은, 마침 무슨 생각이 났는지 방향을 돌려 다시 문턱을 넘었다. 그러더니, 닫혀 있는 왼쪽 대문을 마주보고 서서 잠시 무언가를 매만졌다. 그리고 나서야 열려 있던 오른쪽 문을 마저 닫으며 마당 안으로 사라졌다.


여인이 서 있던 자리에는, 유영이 대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미처 보못한 작은 표지판이 있었다. 활짝 펼친 손 정도 크기의, 문의 따뜻한 나무색보다 조금 더 밝은 빛을 띤 자기()로 된 네모진 패. 둥글게 갈아진 모서리와 가장자리에는 직접 한 송이 한 송이 그려 넣은 파스텔색 꽃들이 만개해 있었고, 이 꽃들이 두르고 있는 표지판의 가운데에는 또박또박한 글씨로 적힌 이런 글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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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추가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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