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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색 Apr 11. 2021

카트 탈래, 공원 갈래?

너와 내가 시간을 보내고 즐기며 그 속에서 충전하는 법


Ep 1.

좋은 여행이란? 


는 호캉스를 즐기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숙소에서 하루 종일 쉬라고 하면 아마 좀이 쑤셔 미치려고 할 거다.

집에 며칠씩 ― 어떤 경우 몇 주씩 ― 틀어박혀 있어도 전혀 심심해하지 않는 내가 이상하게 여행만 가면 '슈퍼 밖순이'가 돼버린다. 

책의 말머리에서 언급했던 일주일의 파리 여행 중, 나는 거의 매일 아침 8시에 숙소를 나서 거의 밤 10시가 다 돼 돌아왔다. 그렇게 한나절이 훌쩍 넘는 시간을 밖에서 꽉 채워 보내면서도 식사 시간을 따로 가지진 않았다. 길을 걷다 눈에 띈 가판대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사서 걸어 다니며 먹는 식으로 하루의 유일한 끼니를 때웠던 탓에, 파리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던 친구와 함께 밥을 먹은 걸 제외하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무언가를 먹은 기억은 일주일을 통틀어 한 번밖에 없다.(심지어 이 때도 제대로 음식을 즐기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잠깐 비를 피할 겸 차를 한 잔 마시기 위해서였다.) 구경하고 싶은 게 너무 많기도 했고, 소위 '뽕을 뽑겠다'는 마음에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쓰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으며, 원체 음식에는 큰 관심이 없어 먹는 데에 돈과 시간을 쓰는 게 아까웠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고민 없이 64 유로라는 거금(시 나는 갓 대학을 졸업해 수중에 돈이 없는 상태였다)을 과감하게 투자해 박물관·유적지 패키지 티켓   일명 '파리 뮤지엄 패스'   구매했고, 이 티켓 한 장을 들고 다니며 매일 쉼 없이 박물관 투어를 했다. 각각의 티켓을 구매했다면 120 유로가 넘게 지출했어야 할 만큼 많은 곳들을 다니고서도, 파리를 떠날 때 아쉬움이 너무 많이 남은 탓에 언젠가 꼭 다시 돌아와 박물관 투어를 기필코 이어가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이후 4년간 간헐적으로 이어진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홍콩, 마카오, 대만 여행에서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내게 좋은 여행이란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온 도시를 (주로 걸어서) 누비며 찾아갈 수 있는 모든 미술관, 박물관과 자연경관을 최대한 샅샅이 구경하는 것이었기에, 다녀오면 2-3kg씩 빠져있는 여행을 수차례 하면서 '여행이란 몸이 고생할수록 기억에 남는 것'이라는 나름의 신조까지 갖게 됐다.



Ep 2. 

무료함과 수고로움 사이,

너와 내게 다른 여유


이런 나이기에, 친구 L이 함께 여행을 가게 됐을 때 내심 걱정이 앞섰다. 물론 혼자 여행을 다니던 방식 그대로 여행을 짤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그간 몸에 익은 고된 여행자로서의 습관이 언제 어떻게 튀어나와 L을 당황시키거나 피곤하게 만들지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L에게 "나는 정말 아무래도 좋으니" 뭐든지 L이 원하는 게 있으면 그대로 하자고 했다. 성격 좋은 L은 L대로 '함께' 즐길 수 있는 여행을 바랐. 그렇게 돈독한 우애를 더욱 다지게 하는 이타적인 실랑이 끝에, 지금까진 주로 본인이 여행 계획을 짜는 역할을 떠맡았다는 L을 배려해 내가 여행의 얼개를 짜맞추게 됐다.


본인은 큰 호불호가 없다며 편하게 계획하라는 L이었지만, 그래도 L의 취향을 최대한 많이 반영하고자 끈질기게 물어본 결과 몇 개의 키워드가 나왔다. '수다', '휴식', 그리고 '여유로운 여행'.

얘기는 여행 내내 충분히 하게 될 거고, 좋은 경치를 보며 때에 따라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될 테니 그걸로 L에겐 충분히 휴식이 될 거고……문제는 '여유로운' 여행이었다.

'여유'라. 나는 가고 싶은 곳들을 구경하기 위해서라면 하루 종일 걸어 다니다가 중간중간 5-10분씩만 벤치에 앉아 스트레칭만 해도 충분한 여유를 느낀다. 만약 하루 종일 숙소에만 있는다면, 편안히 몸을 쉬일 수 있더라도 여유가 아닌 무료함을 느끼게 될 거다. 반면 흥미가 없는 걸 위해 하루 종일 걸어 다녀야 한다면, 분명 여행이 아닌 그저 수고로움이 될 거고. 그러니 분명 여유에는 시간적 넉넉함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충족도 필요하다는 건데,

그렇다면 L은 무엇이 얼마나 있어야 여유를 느낄까?


고민하던 나는 L에게 걷는 걸 좋아하냐고 넌지시 물었다.

"나 걷는 거 좋아해!"라며 L은 본인이 활동적인 여행자임을 어필했고, 그 말에 안도한 나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다. 그러면 평소 내가 돌아다니는 만큼의 반 정도만 다녀도 되겠지? 게다가 걷는 시간보다 렌트한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을 테니 많이 피곤하지 않을 테고. 

그렇게 해안과 예쁜 꽃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코스를 따라 큰 동선을 정하고 중간중간 멈춰 구경하면서 '힐링'할 추천 포인트를 몇 군데 설정하니, 적당히 짜임 있는 여행이 된 듯 보였다. 찾아둔 여러 장소 중 계획에 더 포함시키고 싶은 곳들이 많았지만, 나중에 따로 이 지역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스멀스멀 꿈틀대는 여행자로서의 본능을 겨우 다스렸다.

이렇게 완성된 계획을 보자, 이 정도면 여유가 흘러넘치다 못해 여행 자체가 쉼이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며칠 후 떠난 여행의 마지막 날,

L은 정말로 악의 없이 웃으며 여행이 "빡셌"음을 지나가는 말로 슬쩍 고백했다.

친구들 몇에게 여행 일정을 얘기했더니 "와, 그 지역 구경 다 했네"라는 말과 비슷한 평들을 들었다며.

이 중 한 친구는 여행을 하기 전 숙소와 식당만 찾아둘 만큼 숙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여행을 즐긴다니, 아무래도 그런 반응이 나올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궁금했다.

어떻게 대부분의 시간을 숙소에서 보낼 수 있는 거지?(마음 같아선 물음표를 최소한 열 개는 더 붙여야 할 것 같다.) 이렇게나 볼 게 많은데.

 

어쩌면 그 친구도 내 여행 일정을 보고 생각했으려나. 

어떻게 여행을 가서 숙소에서는 잠만 잘 수 있냐고, 뭐 그리 볼 게 있냐고.



Ep 3.

너와 내가 충전하는 법


여행자로서 L과 나의 차이는 여유를 느끼는 방식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행 계획을 짜는 단계에서 나를 배려한답시고 말을 아끼던 L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긴 해"라며 조심스레 언급한 곳이 있었다.

바로 카트 체험장 테마파크.


솔직히 말해 구미가 당기진 않았다. 내가 혼자 여행을 왔다면 굳이 찾아갈 장소는 분명 아니었다. 요상한 데에서 피곤하게 구는 나의 냉소적인 시선에서 보자면, 이런 시설은 지역사회의 독특한 생태, 자연경관, 그리고 문화·역사적 환경을 해치는 외래 교란종 같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이런 거창한 이유를 차치하고 나서라도 굳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갈 만큼 흥미로워 보이지가 않았다. 조금만 걸어가면 아름답고 광활한 바다가 있는데, 대신 해변가 유원지에 급조된 소규모·소자본 놀이공원의 바이킹을 타러 가는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해서 절대 가고 싶지 않다는 건 아니었고, L이 따로 얘기할 만큼 마음에 들어하는  가는 게 아무래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으며, 또 직접 경험해보 내 편견 짙은 생각이 깨지면서 좋아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결국, "꼭 안 가도 돼"라며 손사래를 치는 L을 오히려 내가 끌고 카트 체험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찾은 곳은 생각보다 더 거대했고, 신기했고, 흥미로웠다. 공상 과학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나올 법한 느낌의 미래 지향적 인테리어, 번쩍이는 LED 라이트로 꾸며진 각종 최신 설비, 시속 40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고 주행이 끝나면 자동으로 반납이 되는 카트, 테마파크 자체 제작 앱과 연동돼 보이는 카트 주행 기록과 실시간 랭킹. 풀과 바다내음 짙은 바깥과차단된, 사뭇 다른 공기가 흐르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


L신나 보였다. 우리는 구매한 입장권에 따라 카트를 세 번 탔고, L은 마지막으로 카트를 탄 후 아쉬움을 표했다.

나도 혼자는 절대 시도해보지 않았을 무언가를 새롭게 경험해본다는 게 좋았지만, 마지막으로 카트를 탈 때쯤엔 충분히 탔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애써 감추려던 내 속마음이 L에게 드러나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최대한 즐거워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노력은 역시 피곤했다.


다음  우리는 공원을 갔다.

퍼붓던 비가 기적처럼 잦아든 후라 햇살도, 사람도 없었다.

평화로운 고요함 속, 공기는 더 맑았고 풀내음은 더 싱그러웠다. 카트 체험장을 이루는 철근과 콘크리트의 차가운 회색과 강철빛과 대비되는, 따뜻한 갈색과 녹빛으로 덮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은 정화되고 몸엔 에너지가 차올랐다. 마냥 즐겁고 행복했던 내 어린 시절의 일과는 할머니 댁 마당과 동네에 있는 나무와 풀을 관찰하며 뛰어다니는 거기에, 마침 초록색 옷을 입고 있었던 나는 마치 오랜 친구들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까지 들었다.


잘 조경되어 예쁘게 가꿔진 정원을 보는 것도 좋지만, 내게 있어 정원 산책의 묘미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작은 꽃들과 풀을 만났을 때 느끼는 귀여움과 반가움이다.


하지만 내게는 한적해 보이는 공원이 L에게는 황량해 보였을까, L의 걸음걸이와 몸짓엔 어딘지 편안함보다는 지루함이 느껴졌다. L에게 풀과 나무란, 중간중간 피어있는 화려한 꽃들을 받쳐주는 그저 밋밋한 배경일뿐인 듯했다.

심심해 보이는 L의 무료함을 달랠 겸 혹시 등산을 별로 안 좋아하냐는 질문을 했다. 

돌아오는 건 질색이었다. 장난스런 과장이 곁들여지긴 했지만, 진심은 진심이었다.


"나한테의 카트체험장이 너한텐 공원이구나!" 

하는 내 농담과 아쉬움 섞인 말을 L은 부인하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 왔으면 절대 와보지 않았을 장소를 서로 덕분에 왔다는 말과 함께 웃으며, 

그렇게 같은 공간을 다르게 걸어갔. 




  여담


하나.

L과의 여행을 준비하던 중, 어느 날 L은 이것 좀 보라며 자그마치 서른 곳의 식당이 적힌 정리된 '맛집 리스트'를 자랑하듯 보여줬다. L이 여행을 간다는 말을 들은 한 비슷한 나이대의 지인이, 우리가 갈 지역의 유명한 식당들을 동네별로 분류해 정리했다는 거였다. 심지어 개인적인 추천 및 평가를 곁들인 걸 보니 단순히 인터넷에서 긁어온 정보가 아닌 듯했. 보자마자 "우와"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내 궁금해졌다, 이 리스트가 있기까지 필요했을 것들이.

음식과 먹는 행위에 대한 진지한 관심,

식당을 찾아다니는 데에 필요한 체력, 열정, 그리고 끈기,

다녀온 식당들을 정리할 수 있는 계획성,

그리고 이렇게 공들여 만든 리스트를 기꺼이 공유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


누군가에겐 "이게 뭐?" 할 만큼 당연하게 느껴질, 하지만 내겐 없기에 신기한 것들. 

이 모든 게 합쳐졌을 때에야 비로소 이 리스트가 세상에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L의 지인을 향해 '대단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을, 일종의 경외심 비스무리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밥은 그냥 간단히 때우는 게 (혹은 귀찮으면 그냥 안 먹는 게) 기본값인 나이니, 누가 옆에서 적극적으로 권하지 않는 이상 이런 리스트를 작성할 일은 물론 생각할 기회조차 없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니, 이런 리스트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지금껏 살아온 방식 그대로 앞으로도 살아간다면, 남은 한평생 이런 식당 리스트 하나라도 남겨질 일은 아무래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살면서 나는 이 맛집 리스트와 같은 것들을 얼마나 많이 모르고 놓친 채로 살아가고 있을까?



둘.

앞서 언급했듯 (3화 참고) 지인 T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각자 대만을 다녀온 경험이 있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번은 대만의 절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나는 유럽 여행을 갔을 때에 동네의 작은 성당 하나도 지나치지 못하고 잠깐이라도 꼭 둘러봐야 했을 만큼 각 마을의 종교 시설을 관찰하는 걸 좋아했기에, 대만에서도 역시 절은 절대 빼놓지 않고 들려야만 하는 장소였다.


"난 절이 진짜 좋았어요. 여행의 하이라이트 같은 느낌?"

그도 그럴 게, 다양한 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절은 풍성한 뷔페이자 놀이터와 같은 공간이었다. 절의 외관 및 내부의 장식을 보며 해당 지역 미술의 특징을 배울 수도 있고, 때때로 들려오는 스님들의 염불 외는 소리가 다른 동네의 소리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는 것도 재밌으며, 제단에 올라가는 음식을 보며 마을의 식문화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신나서 재잘거리던 나를 보던 T는 무표정하게 응답했다.

"그래? 난 그닥."


"오…….(살짝 할 말을 잃었다.) 그렇구나. 나는 절 자체도 자체지만, 절에 있는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좋아요.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어떤 소원을 저리 간절하게 비는 걸까 궁금해지거든요."

가만히 있던 T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보았다.

"난 그게 싫어, 절에 있는 사람들. 기도를 올리고 모습을 보면 한심해 보여. 불쌍하기도 하고."


논리적 실증주의자이자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T의 눈에 비친 절은,

성을 마비시키고 흩뜨려놓는 미신의 소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었나 보다.  


대만 루캉(鹿港)의 한 절에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 간절한 소망이라고 읽히는 이 장면이 T에게는 정말 그저 비이성의 표징으로만 보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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