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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색 Apr 11. 2021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다름과 틀림 사이, 그 애매하고 요상하며 신기한 어딘가


Ep 1.

나이는 기억하는 게 아니라 

기억해 내는 거야


엄마는 본인 나이를 모르신다.

과장이 아니다. 거짓말은 더더욱 아니다.

주기적으로, 특히 매해 초에 본인 나이를 의식적으로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엄마는 나이를 묻는 질문에 아주 긴 로딩시간을 갖게 된. 올해 처음으로 몇 살이 되셨냐고 엄마에게 물어봤을 때, 엄마는 최소 4초가 지난 후에야 주저하며 "쉰……여덟?" 하셨다.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보통은 "그러게, 내가 올해 몇 살이지?" 하며 되묻는 것으로 대답 아닌 대답이 이어지니까.


사람들이 "아……그거 뭐였지?" 할 때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기억력의 소유자가 보통 엄마인 보면, 엄마가 나이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건 분명 건강상의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본인 나이도 모르시는 엄마이니, 딸이 몇 살인지도 잘 모르시는 게 당연하다고 해야 하나. 엄마와 나는 더도 덜도 말고 딱 30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데,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이 사실마저 잊으셨나 본지 엄마는 가끔은 본인 나이를 얘기해놓고서도 나한테 물어보신다. "그럼 넌 올해 몇 살이지?"


반면 아빠는 회계사 출신으로, 40여 년 전 본인의 중·고등학교 시절 매 해 자란 키를 소수점 단위까지 기억하시는 분이다. 아빠는 가족의 대소사는 물론 본인의 20년간의 근무지 이동 내역을 근무기간으로 기억하신다. 예를 들면 "군산, 2000년에서 2002년 2월까지." 직업 특성상 지난 최근까지 1-2년마다 근무지를 옮기셨던 아빠이니, 20년 넘게 일을 하시면서 다닌 근무지가  군데를 훌쩍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그 많은 장소들과 기간들을 줄줄 외시는 거다. 이렇기에 아빠는 "아빠, 그때가 언제죠?" 혹은 "여보, 그게 언제더라"라는 질문에 1초 안에 어김없이 대답을 출력하신다. 가족의 공식 자동화 달력인 셈이다.


이런 아빠의 숫자 관련 재능을 물려받지 않은 나도 본인의 나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운데, 아빠에겐 엄마가 얼마나 신기하면서도 황당하게 느껴질까. 장난치는 거 아니냐는 농담 섞인 내 질문에 "진짜 모르겠어, 진짜."라고 진지하게 답변하는 엄마를 보며 아빠랑 나는 같이 헛웃음을 짓는다. 

매년, 매번 겪는 일인데도 익숙해지지 않기에, 우린 엄마를 보며 항상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Ep 2.
마음
은 달래는 게 아니라

푸는 거야


이런 숫자 바보 엄마와 대비되는 사람으로는 아빠 말고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지인 A.

왠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생긴 그이지만, A도 인간인지라 위로를 하기는 한다. 

다만 그 방식이 대체 어떻게 이리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독특할 뿐. 


어느 날, 나는 울적한 마음에 참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내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나만큼이나 A도 내가 '질질 짜는' 모습을 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나 본지, 퉁퉁 부어 벌게진 눈으로 화장실을 나오는 나를 보자 A는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그렇게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는 표정으로 서있던 A였다. 그러던 중 무슨 결심이 섰는지, 그가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어정쩡한 모양새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마치 오작동하는 고장난 로봇처럼 내게 딱딱하게 말을 건넸다.(미드 ≪빅뱅이론≫의 쉘든을 생각하면 딱 적절할 것 같다.)

"이거 볼래?

A가 쭈뼛하게 건넨 건 본인의 핸드폰이었다. 


'뭐지, 이걸 왜 주는 거지' 하는 마음으로 얼떨결에 받아든 핸드폰에선 유튜브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는데, 

영상의 내용은 이랬다.
(
영상을 다시 찾아보고서 적는 설명이다. 나는 아래 내용을 줄줄이 욀 수 있을 만큼의 인재가 아니다…….) 

각각 1000개, 700개, 300개가 든 금화 주머니를 가진 세 명의 도둑 A, B, C는 강을 건너야 한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하는데, 이 배는 단위가 무엇이든 두 개까지만을 수용할 수 있다.
즉, 두 명의 도둑이 동승하든지 한 명의 도둑이 금화 주머니 하나를 가지고 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는데…….

"……건너편으로 이동하는 과정 중에, 배를 탄 두 도둑이 자신들이 훔친 금화보다 더 많은 양의 금화와 함께 건너편에 도착하게 되면 그 둘은 금화주머니를 들고 튀고, 마찬가지로 배를 타지 못하고 남아있는 한 명의 도둑이 자기가 훔친 금액보다 많은 액수와 남으면, 남은 그 한 명의 도둑도 그 금화주머니를 들고 튀는 거야." 

어느새 내 옆에 바짝 붙어 핸드폰 화면을 같이 보고 있던 A가 들뜬 목소리로 설명했다. 영상보다 한 템포 빠르게.


사실 숫자가 나오자마자 이미 정신이 아득해졌던 터라, 나는 A가 하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A는 쉴 새 없이 말을 하고 있었고, 이렇게 바쁜 호두까기 인형처럼 움직이는 A의 입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던 나는 문득 든 정신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나는 울고 있었고, 

A는 우는 나를 봤고, 

그래서 오더니 A가 와서 이 영상을 보여준 건데……

A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고, 왜 지금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이런 혼란스러운 생각에 흐리멍덩한 동태눈을 하고 있던 나를 보던 A는, 내가 영상에 매료됐다고 제대로 오인했는지 누가 봐도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어때, 재밌지? 우울할 때 이런 거 보면 금방 나아지더라고."

(출처:  Logically Yours의 "Can you solve 3 Thieves crossing River Puzzle || 3 Thieves and Coins Bags")


사고가 순간 정지됐다. 뭐라고? 내가 잘못 들었나? 날 놀리려는 건가?


귀를 의심한 나는 눈을 들어 A를 봤다. 좋으나 슬프나 거의 항상 무표정인 A가, 지금은 신난 아이처럼 상기된 듯 보였다. 감정을 드러내진 않아도 숨길 순 없는 A가 이런 상태인 걸 보면, 분명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치는 건 아니었다. 그럴 만한 성격도 아니고. 


우울할 때 수학 수수께끼를 푼다니. 

"괜찮아?"나 "무슨 일이야?"가 아닌, "이거 볼래?"라니. 


하기야, A는 이런 사람이 아니던가.

적지 않은 가능성으로 이 세상이 슈퍼컴퓨터가 만들어낸 여러 개의 가상현실 중 하나일 수도 있다고 믿는,

각 알파벳을 숫자에 대응시켰을 때 (예: A, B, C, D, E를 각각 1, 2, 3, 4, 5로 봤을 때*), 파이(π)의 끝없이 이어지는 소수점 아래 숫자들의 무작위 배열 속 <<햄릿>>의 대사 전체가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즐거워하는,** 

본인이 십수 년 넘게 키운 개가 야생 동물에게 물려 죽었다는 얘기를 할 때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던,(결국 나만 훌쩍훌쩍 울었다.)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며 죽어가는 "어차피 죽을" 사람들을 살릴 바에야 우주탐사를 해서 과학의 발전을 이루는 게 인류에게 이득이라는,

나와는 다른 사람 ― 정말 많이 다른 사람.


하지만 틀리지 않은 사람. 



✎✎✎ footnote

*수학 전공자인 한 친구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구두점을 제외하고 알파벳엔 26개의 기호가 있지만 10진법엔 10개의 기호밖에 없기 때문에 약간의 변형이 필요"하다는 답변을 받았고……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A의 이론과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니 비슷한 내용으로 '무한 원숭이 정리(infinite monkey theorem)'라는 게 있더라. Y가 이걸 읽고 비슷하게 본인이 이 질문을 직접 생각했는지, 혹은 본인이 직접 이 질문을 생각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A가 나한테 한 얘기는 원숭이가 아닌 파이에 대한 얘기였다.



  여담


하나.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입시를 보조하는 일을 하며 나는 그간 다양한 학생들을 만났다. 

특히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의 경우, 학생 본인의 장점과 독특한 면모를 파악해 효과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내 일과 중 하나는 학생과 대화를 나누며 개인적인 관심사와 취미 등에 대해 묻고 파악하는 거였다. 

이렇게 한 대화 가운데 나온 몇몇 일화는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당장 떠오르는 몇 개의 예시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보며 번호판의 숫자가 소수(1과 자기 자신만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1보다 큰 양의 정수)인지 판단하기

-동성애자 남성으로서 겪는 차별에 정면으로 맞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장을 하고 학교 연극 무대에 올라 희망을 주제로 한 독주 노래하기

-수입산 포장 식품을 먹는 경우, 식품 영양 성분 정보란에 표기된 외국어를 한국어와 대조하며 처음 보는 단어 뜻 유추하기

-계단을 걸어내려 가는 여학생의 땋은 머리가 움직이는 궤적을 어떻게 함수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


각 학생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삶의 다양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정말 수없이 다른 방식으로 다르며, 그 다름은 놀랍고 신기하며 아름답다.  


둘.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가끔씩 '혹시 A가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싹튼 의심이 마구 자라나지 않는 건, A에게는 의외의 (정상적인) 감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A는 우울할 때 수학 수수께끼를 푸는 걸 즐기긴 하지만,

동시에 가끔은 뮤지컬을 보다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오늘날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어 아쉬운" 기사도 정신이 드러나는 고전문학을 찾아 읽는 것 또한 좋아한다.

사실, A의 대학 전공은 영문학이었다고 한다. 


정말 이상하리만큼 신기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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