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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색 Apr 11. 2021

'그냥'은 없다, 있고 싶어도 없다

각 사람의 감각의 세계를 구축하는, 느낌의 알고리즘에 대하여


Ep 1.
좋은 데엔 이유가 없다고 하지만,

이유를 모르니 왜 좋은지도 모르겠어


친구 B는 이과생이다. 우스갯소리로, '눈이 녹으면……'이라는 말에 이어질 내용으로 '봄이 온다'를 청아하니 는다는 문과생과 달리, '물이 된다'라고 또박또박 대답한다는 바로 그 이과생.

일반적인 고정관념으로 판단해 다양한 사람들을 뭉뚱그려 일반화하는 것도, 굳이 '문과'와 '이과'를 나누는 것도 내키지 않는 나이지만, B의 어떤 모습만큼은 유머 섞인 편견이 진하게 농축되어있는 이 '이과생'이라는 단어로 찰떡같이 설명된다고 느낀다.


전부터 가보고 싶던 카페에 B를 이끌고 찾아간 적이 있다.

처음 찾아갔을 땐 휴일인 이유로 문 앞에서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곳이기에, 손때 묻은 문고리가 삐걱이며 돌아갈 때부터 두근거리 내 마음은 카페의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음악에 설렘으로 요동쳤다.

문을 열자마자, 음악만큼이나 독특하고 오묘한 색감과 형태의 향연이 펼쳐지는 걸 느꼈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페르시안 러그, 오래됐지만 낡진 않은 검정 가죽 소파, 진한 체리 빛깔이 도는 나무 재질의 카운터, 여기에 따뜻한 느낌을 더해주는 뜨개질 장식 ― 이와 대비되는 차가운 느낌의 회백색 벽, 그 벽을 따스하게 밝혀주는 노란 조명, 또 그 빛을 은은하게 받아내며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 흰색 커튼과 푸른 이파리. 그리고 착석한 테이블 위, 녹아내린 모양 그대로 자연스레 굳은 초와 이를 받치는 앤티크한 철제 촛대까지.

이 모든 것들이 자아내는 묘한 분위기에 잠긴 나는, 좋은 향기를 맡을 때처럼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느긋한 호흡으로 감상을 내뱉었다. "아, 좋다."


이런 내 모습을 보던 B는 의아하다는 듯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이게 왜 좋다는 건지 모르겠음." 


마치 '오늘은 목요일이다'나 '새가 날아간다'는, 별다를 것 없는 객관적 사실을 말하듯 B는 무심하게 말했다.

내 말에 초를 칠 요량으로 한 말이 아님을 오랜 경험으로 알았기에, 나 역시 무심하게 물었다.

"별로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모르겠어, 좋다는 게 뭔지."

'좋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나는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걸 느끼며 B에게 그게 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음……." B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돌려 카페 내부를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어떤 부분에서 카페가 예쁘다고 하는 건지 대강은 알겠는데,"라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자문자답을 이어갔다. 어딘지 방어적인 듯한 모양새로 팔짱을 꼭 낀 채.

"뭐, 너무 밝지 않은 조명? 창문 없는 벽에 걸린 커튼? 특이한 나무? 이런 게 평소에 자주 보는 프랜차이즈 카페하고는 좀 다른 인테리어인 것 같긴 한데……."


흐려지는 말 끝에 B는 잠시 침묵하더니, 어딘지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보통 많이들 '여기 분위기가 좋다' 이런 얘기를 하잖아," B의 말에 나는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말인지 진짜 모르겠어." 그러면서 B는 목이 타는지 주문한 음료를 한 입 크게 들이켰다.  


모르겠다는 B의 말뜻을 도통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겐 그냥 느껴지는 이 분위기가, B에게는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수수께끼처럼 느껴진다고? 

아무 이유 없이, 분석할 필요도 없이 마음을 파고드는 '좋음'이란 게 도저히 모르겠는 대상이 될 수 있다니.


그렇다면 B는 과연 무엇에서 내가 이 카페 공간에서 느낀 이 느낌을 느낄까?

이런 느낌을 느끼긴 할까?



Ep 2.
그래 좋아,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유가 있다면.


이런 B의 또 다른 버전이 있다. 바로 지인 T.

T는 여행과 자연을 좋아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T의 성격에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쾌청한 봄날, 같이 길을 걷던 우리는 나무와 풀이 우거진 한적한 산책로에 접어들었다. 따사로이 내리쬐는 햇살은 푸릇푸릇한 나뭇잎 사이로 곱게 부서지며, 갓 내린 봄비의 촉촉함을 머금은 흙길 위로 아롱져 일렁이고 있었다. B와 함께 갔던 카페에서 그랬듯이 나는 "아, 좋다!"를 연발했다.

이런 내 말에 "그러니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러게."라는 점잖은 동의라도 얻고 싶은 마음에,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옆에서 조용히 걸어가고 있던 T를 돌아봤다.

놀랍게도, T는 과연 우리가 같은 공간에 있나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전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좋지 않아요?" 

"그닥." 여전히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T가 대답했다. 왜냐고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가 빈약해."


그러면서 대만 남부를 가봤냐고 묻는 T였다. 우연찮게도 가본 곳이라 알은체를 했더니 T의 눈빛에 살짝 생기가 돌았고, 같은 지역을 비슷한 계절에 여행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된 나와 T는 잠시 대만 여행의 감상에 젖었다. 여름의 대만이 얼마나 습하고 더운지부터 시작해, 이런 기후가 만들어낸 대만의 독특한 식생, 그리고 이런 생태가 두드러지는 한 지역에서의 하이킹 경험에 대 얘기하던 차였다.

"그래, 그 산 말이야. 기억해? 거긴 아름드리나무가 엄청 많잖아."

"맞아요, 거기 약간 지브리 영화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숲 같은 느낌."


이 숲의 실제 배경은 일본의 야쿠시마 숲이라고 한다. T와 내가 갔던 산은 알리샨(阿里山)이었다. 하지만 이끼가 낀 거목은 알리샨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 다 알고 있네. 거긴 열대성 기후라 나무 종자 자체가 달라."

"그쵸, 다르죠."

T는 내 맞장구에 당연하다는 표시를 하기 위함인지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이는 듯하더니, 다시 지극히 건조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대만 돌아다니며 봤던 나무를 생각하면," T는 다시 주위 나무들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둘러보더니 단호하게 내뱉었다. "이건 볼품없어."


그러면서 T는 우리나라가 70년대 이후로 정부 차원에서 삼림 계획을 제대로 꾸준히 해왔다면 지금쯤 훨씬 더 풍성한 숲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며, 아주 깊은 아쉬움을 매우 진지하게 표했다.

"물론 나무가 많아봤자 여전히 한계가 있겠지, 산세 자체가 밋밋하니."

"밋밋하다구요?" 내 눈이 동그래지는 게 느껴졌다. '나무가 빈약'하다는 걸로도 모자라 '산세가 밋밋'하다니!

"그래, 대만에 비하면 멋이 없어. 한국 산은 대체적으로 낮고 경사가 원만하니까."


T가 하는 말에 틀린 내용은 없었다. 대만 여행을 할 당시, 나 역시 차창 밖으로 스윽 지나가는 산들마저 굉장히 높다는 느낌을 받았었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읽은 걸 제대로 기억하는 게 맞다면, 대만의 지형은 한반도보다 훨씬 나중에 형성된 이유로 산지의 침식이나 풍화가 훨씬 덜 이뤄졌다고도 하고. 이러나저러나 대만의 산이 우리나라의 보다 대체적으로 더 가파르고 크다는 데에는 딱히 반박할 이유가 없었. 


그렇다 해도 T의 말은 어쩐지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래도……우리나라 산은 소박한 멋이 있지 않아요?" 내가 항변하듯 물었다. 산들에게도 귀가 있다면 왠지 마음 아파할 것 같은 느낌에, 괜시리 내가 다 속상한 마음이었으니. 그래서 산책로를 다시 둘러보며 나름 힘주어, 그러나 어쩐지 자신 없는 독백에 가깝게 말했다. "그래도 여긴 예쁘지 않나?"

T는 고개를 내저었다. "빈약해."


'좋고 나쁨에는 틀림이 없다'는 말은 아무래도 T에겐 해당되지 않는 듯했다.

다시 둘러본 산책로는 역시나 예뻤는데……. T에겐 정말 이 찬란한 봄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세상 구석구석 깃들어있는 소소한 아름다움이 체 치듯 걸러지는 삶은 내겐 너무 삭막하게 느껴지는데.

궁금했다. T가 객관적인 근거로 정의되는 '좋음'만 인정하는 , 내 입에서 "좋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과 같은 까닭지, 아니면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기로 의지적으로 선택해서인지.


후자라면, (도대체) 왜?



Ep 3. 

너와 나의

느낌의 알고리즘


'이과생' B가 어느 날은 고민 아닌 고민을 슬쩍 내놓았다. 분명 본인이 자칭 타칭 '패션 테러리스트'라는 걸 알고 있기에 옷을 잘 입고 싶은데, "아무리 분석해도" 본인에게 어울리는 옷을 고를 수가 없다는 거였다.


"옷 잘 입는다는 사람들 사진을 봤는데, 보면 볼수록 모르겠더라."

그러면서 B는 그간 '패션고자'로서의 면모를 탈피하기 위해 본인이 얼마나 많은 사진들을 찾아보며 다양한 조합을 분석해왔는열심히 피력했다.

"분명 긴 양말은 촌스럽다는 의견이 일반적이란 말이지. 그런데 이 사진들을 보면 양말이 발목 위까지 한참 넘어오는 데다가 ……. 봐봐, 심지어 이 사람은 양말 색깔이랑 신발 색깔이 완전 딴판이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색깔이 같아도 안 될 것 같긴 해. 특히 깔맞춤, 특히 청청패션은 피해야 된다고 하잖아. 그런데 왜 이 사람은 위아래를 데님으로 맞췄는데 옷을 잘 입는다고 하는 거지?"


B가 그간 모아 온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여줄 때마다 나는 사진 속 옷과 액세서리의 조합이 주는 느낌이 좋은지, 나쁜지, B에게 어울릴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 다만 왜 그런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을 뿐. B는 늘어나는 사진 개수에 따라 답변을 하면 할수록 더욱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규칙성이 안 보여."

"규칙성?"


옷을 입는 규칙이라……. 옷을 입을 때 한 번도 옷마다의 특징을 분석하거나 다양한 특징들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분석해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옷은 그냥 끌리는 대로 꺼내 입는 게 아닌가!) B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 그렇다고 해서 "그래서 결국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하는 건가?"라며 자조 섞인 농담 같은 자학을 하는 B를 그냥 두고 볼 수도 없는 일이었고.


아무래도 규칙을 찾아 설명하는 건 내 능력 밖이라고 판단한 나는, 대신 핸드폰 화면에 다양한 색상 띄운 채 각각의 색깔이 B에게 어울리는지 어울리지 않는지를 하나하나 표시해가며 알려줬다.


본인에게 맞는 색깔을 결정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필요"하다는 말에 B에게, 내 규칙성 없는 감을 따라 나름대로 딥러닝을 시켰다. 저런 색 말고, 이런 색을 입으라고.


단 몇 번의 시도만에 해답보다 더 많은 질문이 생겨났다.

"지금까지를 보면 어두운 색깔만 추천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가 보네." "이 밝은 색과 저 밝은 색이 어떻게 다른 거야?" "아 이제 정말 더더욱 모르겠음."


그렇게 덩달아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나는, 결국 얼마 후 B를 데리고 쇼핑을 하러 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이거 너한테 잘 어울릴 듯?" 내가 눈에 띄는 옷을 집어 B의 몸에 대뜸 갖다 대며 말했다.

"딱 보면 보여?"  

"응, 완전."

"어떻게?" 

훅 파고든 B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해야만 했다.

"음……그니까 쉽게 말하면, 넌 노란색 계열은 안 어울려. 밝은 색보다는 어두운 색이 더 잘 받고. 여기 살짝 노란 끼가 섞인 거 보이지? 이런 녹색보다는 청록색이 더 좋아." B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만큼 규칙성이 충분히 있는 언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B는 내가 "그냥" 했을 때보다는 뭔가 좀 더 알아듣는 듯해 보였다.


그렇게 이후로 몇 시간을 돌아다니며 몸이 지쳐갈 즈음, B가 멀리서 옷을 한 벌 꺼내오더니 말했다.

"이거 나한테 어울릴 것 같은데?"

보기에도 어울릴 만한 색깔이 분명 맞았지만, 나는 B를 놀리고 싶은 마음에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짓궂게 물었다. "왜?"

B가 답했다.

"그냥."


그렇게 서로 다른 우리를 각각 이루는 시스템은 아주 조금씩 호환되기 시작했다.



  여담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바닷속을 유영하는 고래의 삶이란 무엇일까? 

그 매끈한 듯 거친 피부에 휘감기는 바닷물의 감촉이란 어떤 걸까?

어두운 밤, 깊은 물속으로 어슴푸레 비춰오는 달빛에 고래는 위안을 받을까?

아무것도 없는 컴컴한 바닷속, 고래는 두려울까, 평안할까?


이 모든 생각 역시

내가 고래 아닌 나이기에 하는 생각이고, 그래서

내가 아닌 고래는 하지도 않을 생각이겠지.

래는 물을 벗어난 삶에 대해 알 수 없듯,

나 역시 물속에서 시작돼 물속에서 끝나는 삶에 대해 수 없겠지.


그렇게 머릿속을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내 삶 속엔, 그리고 세상 속엔 고래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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