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와 내가 앉아있는 곳은, 당시 서로 멀지 않은 거리에서 자취하던 우리가 종종 가던 한 동네 식당이었다 ― 그러니 W가 먹고 있는 샐러드는 나도 수도 없이 먹었던 메뉴였고. 먹을 때마다 진미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맛이 없다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리 별로라고 해도 맛에 실망해 눈물을 흘릴 나는 아니었기에, 나는 W의 말에 놀란 마음을 애써 감춘 채 엄지를 척 올려 보이며 "역시 미식가야!" 했다. 어떤 반응을 기대하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W는 정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만 W는 힘없이 쥔 젓가락으로 양상추를 깨작거리다 헤집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정말로 큰 한숨을 꺼질 듯이 내쉬며 젓가락을 툭 내려놨다. W의 쓰러지듯 푹 내려가는 어깨와 함께 축 처지는 눈썹에, 마치 선 굵은 만화 캐릭터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며 연극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W는 연기를 하는 것도, 과장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표정을 한 채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W는, 결국 샐러드 접시를 옆으로 툭 밀어낸 채 의자에 털썩 기대며 말했다.
"저번엔 집 앞 마트에서 도시락을 사 먹었는데, 한 숟갈 한 숟갈 떠먹으면서 눈물이 나더라고. 너무 맛이 없어서."
그러면서 W는, 자취하는 대신 본가에 있었다면 얼마나 맛있는 음식들을 직접 해 먹었을지에 대해서 아주 진지하고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재료는 어디서 살 것이고, 저번엔 어떤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했는데, 다음엔 이렇게 조금 더 해보는 게 좋을 것 같고, 새로 나온 조리기구가 있는데 그걸 꼭 써봐야겠다며.
W가 봄날의 행복한 새처럼 지저귀는 동안, 생전 들어보지 못한 꼬부랑말 이름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W는 양식을 좋아한다.) 이 모든 걸 신기하게 듣고 있는 가운데, 나는 W의 얼굴이 한층 밝아져 가는 걸 느꼈다.
곧 얘기를 마치더니, W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선포했다. "오늘 저녁은 꼭 맛있는 걸 먹어야겠어."
W의 앞에는 거의 건드리지 않은 샐러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W는 알까?
맛있는 음식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본인의 표정이 얼마나 환한지,
그리고 맛없는 음식을 앞에 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어두운지.
이 밝음과 어두움의 간극을 이루는 매일의 순간들 가운데,
W가 행복해지기 위해, 아니 적어도 침울해지지 않기 위해필요할 것들에 대해 잠시 생각해봤다.
W에겐 행복한 삶이 내겐 아무래도 피곤한 삶이 될 것 같았다.
Ep 2.
절약과 궁상 사이
음식에 말 그대로 울고 웃는 W와 달리, 앞서 L과의 일화(5화)에서도 언급했듯 나는 음식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아무거나 먹든지 그냥 먹지 않으면 될 일이니, 맛있는 식당을 찾아다니거나 밥을 먹자고 몇 시간씩 줄을 서는 따위의 일은 소모적인 노동일뿐인 거다.
좋게 말하면 무난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미한 이런 내 태도는 비단 음식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준짠순이 정도는 될 만큼 지출보다는 저축이 생활화된 편이기에, 난 잠옷을 따로 입지 않는다 ― 대신 입다가 오래돼 해어지기 시작한 외출복을, 목이 다 늘어나고 구멍이 날 때까지 입을 뿐. 자판 키 두 개가 떨어진 노트북을 굳이 수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그 상태로계속 썼고, 미용실을 굳이 찾아다닐 것까지 있나 싶어 걸어서 갈 수 있는 동네 미용실에 머리를 맡긴다.("다 됐어요"라는 말과 함께 거울 속에 보이는 내 모습을 보며 자주 후회하면서도.) 그러니10만원을 쓴다면, 10만원어치 하나를 사는 대신 만원짜리 열 개를 사는 게 더 마음이 편한게 당연지사다.
나 같은 사람만 있었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이미 망했을 거라고 스스로도 우스갯소리를 할 만큼, 나는 바라는 것도 별로 없고 소비 욕구는 더더욱 없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일상에 적응한다.
그런 나를 보며 농담으로 "부자 되겠다"라고 하시는 부모님도 사실 크게 다를 바 없다. 20년이 넘은 옷들을 그대로 입으시고, 고장나지 않는 한 물건을 버리거나 새로 사지 않으시며, 뭘 갖다 드리거나 사드릴까 해도 항상 "필요 없다."라고 하시는 분들이니까. 물론 어느 정도는 자식 고생 안 시키려고 하는 마음에 배려해 말씀하시는 부분도 있겠지. 하지만 부모님께서 저렇게 괜찮다고 하시는 건, 설날에 아이들이 마음도 없는 손사래를 치면서도 이미 세뱃돈에 손이 마중 나가는 것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집이 옷을 못 사거나 하는 건 아니다. 먹을 만큼 먹고살 만큼 살기에 때깔이 나쁘진 않다. 우리집만큼 벌면서'욜로'의 정신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널찍한 방 하나를 각종 명품으로 채워집에 작은 명품관 하나는 넉넉히 차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집엔 제 돈 주고 산 명품은커녕 화장실 선반에는 숙박업소의 공짜 욕실 용품(굳이 '고오급'스럽게 표현하자면 '어메니티'가 되겠다. 그렇다고 해서 전부 호텔에서 가져온 것도 아니다.)이 잔뜩 넘치고, 부엌이며 거실 할 것 없이마트에서 공짜로 받아온 각종 사은품이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으니, 가끔 집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솔직히 궁상인가 싶기도 하다.
어느 날,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집에 돌아온 우리 가족은 엄마가 "오후에 사둔 디저트"를 먹기 위해 식탁에 둘러앉았다. 식사를 위해 한껏 차려입었던 옷은 이미 벗어던진 지 오래였기에 아빠, 엄마, 나는 각자 낡은 메리야스, 시장에서 산 나일론 원피스, 그리고 목 늘어난 티 차림을 하고 있었다.
"집 앞 항상 지나다니던 데에서 다섯 개를 사니까 하나를 공짜로 주시더라고?" 하는 엄마의 손에는 바닥에 기름이 절어 있는 붕어빵 봉투가 있었다.
봉투를 그대로 받아든 아빠는 '아주 바람직'하다고 반색을 하며 눅눅해진 종이를 죽 찢었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 붕어빵을 집었다.
그리고는 한입 가득 우물거리면서 생각했다.
궁상이면 어떠리,
붕어빵이어서 좋고 공짜여서 더 좋은, 완벽한 저녁의 마무리인데.
Ep 3.
삶의 기대치에 따른 삶의 질,
삶의 질에 따른 삶의 기대치
하지만 이런 내 잔잔한일상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으니, 지인 R를 만나면서부터였다.
한번은 R이 내게 전해줄 물건이 있어 내 집 근처 동네로 왔다. 주로 강남 일대에서 활동하는 R이 한강을 건너서까지 먼 걸음을 해준 게 미안하고 고마워,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지 않겠냐고 청했다. R은 흔쾌히 응했다.
카페를 걸어가는 몇 분 되지 않는 시간 내내 R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 눈에는 거리가 평소와 다름없었기에 뭐가 그리 볼 게 있을까 싶었지만, 처음 와보는 동네라 궁금하겠거니 하며 묵묵히 앞장섰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에 착석한 R은 조금 정신이 없어 보였다. R은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가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하, 이 동네 처음 와봤는데 다시는 안 올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속으로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 받아칠지 모르겠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와중, 다행히 R이 말을 이어갔다. "이 동네 근방은 워낙 올 일이 없어서 한번 와 보고 싶다 생각했었는데, 이 정도 봤으면 된 것 같아요. 그냥 놀던 데에서 놀아야겠어요." 그러면서 쾌활하게 웃었다. 이 동네가 내 집 근처라는 건 알지 못하는 R은, "이런 데서는 정말 못 살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며 우아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R은 악의를 가지고 그렇게 말한 게 아니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깔아뭉개려는 사람들에 대해 들어보기도 하고 만나봐서 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나를 상처 줄 의도가 없는 언행에도 쉽게 상처 받곤 하는 내 예민한 마음이 R의 말에 '공격 당했다'고 느끼지 않은 걸 보면, R은 정말로 자신의 생각을 해맑게 말한 것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건일명 '텀블러 사건' 때문이기도 하다.
R과 사무실에서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목이 말라 물이 담긴 텀블러를 꺼내자 R이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텀블러 새로 사야겠어요."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텀블러를 아주 빠르게 스캔했다. 별문제 없이 몇 년 동안 사용하던 거라, R의 눈에 뭐가 보이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멀뚱거리며 앉아 있는 나를 보던 R이, 조심스럽게 느껴질 만큼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로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R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바닥과 인접해 잘 보이지도 않는 곳이 새끼손톱만큼 움푹 패여있었다.
나는 텀블러가 그렇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은지 이미 오래였다.
하지만 왠지 텀블러 바닥이 찌그러져 있었다는 걸 모르는 척을 해야 할 것만 같아, 놀란 척 연기하며 즉시 텀블러를 바꿔야겠다고 최대한 호들갑을 떨며 답했다. 물론 나는 텀블러를 아직까지도 사용 중이다.
이때부터 R이 상당히 풍족한 삶을 살고 있겠거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R의 삶이 말 그대로 내 상상을 초월한다는 건 최근에 들어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R이 집에 초대하고 싶다며 알려준 주소를 따라 도착한 곳은, 난생처음 보는 종류의 고급 아파트였다.(이런 종류의 빌딩을 '아파트'라고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커다란 회전문을 지나니 대리석으로 보이는 재질로 바닥부터 천장까지 꾸며진 로비가 눈에 들어왔고, 어디로 가야 하나 주춤하는 사이 경비원에게 저지(?)당했다. 지시에 따라 방명록을 작성하고 신용카드를 맡긴 후에야 이리로 오시라는 경비원을 따라 이동할 수 있었다. 널찍한 소파와 테이블 몇 개가 여유롭게 배치된 공간을 지나 조각과 그림이 전시되어있는 복도를 걸으니 그제서야 엘리베이터가 나왔다. 경비원은 멈춰 서더니 '이걸 스캔해야 버튼이 눌린다'며 방문자용 카드를 건넸다. 안내에 따라, 어쩐지 긴장된 마음으로 카드를 댄 후 꼭대기에 가까운 층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들어간 R의 집은,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테리어 잡지에서나 본 듯한, 아니 그런 잡지에서도 보지 못한 모습의 거실 테이블에 앉아있으니 통창에 가까운 거대한 창밖으로 서울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잠시 후 R이 내온 다과상에는,
또 얼마 후 다녀온 화장실에는,
화장실을 나오며 걸은 복도에는,
그리고 R이 구경시켜준 방에는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속으로는 내내 감탄을 내뱉었다.
그렇게 있다가 R의 집을 나오고 나니 솔직히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저게 다 얼마지?'
그래서 찾아본데스크 램프도, 우리집에 있는 정도 크기의 선풍기도, 심지어 손바닥 만한 작은 사진 액자도 다 수십 만원을 웃도는 제품이었다. 순간 0 하나를 잘못 봤나 싶을 정도로 놀란 나는 기억을 더듬어 다른 것들도 이것저것 찾아봤다. R의 다과상에 나온 접시 하나, 컵 하나까지 명품이 아닌 게 없었다.
부러웠지만, 부럽지도 않았다. 그저 차원이 다른 세계를 슬쩍 들여다본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R의 집을 다녀온 후, 우리집에 있는 멀쩡한 선풍기와 컵들이 조금 못나 보이기 시작했다.
편안하기만 했던 내 목 늘어난 잠옷도 어쩐지 더 꼬질꼬질해 보였다.
그렇게 침대에 누우니 이런저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R은 웬만한 호텔을 가도 성에 안 차지 않을까? 아니면 R에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호텔의 세계가 있을까?
R도 붕어빵 다섯 개를 샀을 때 하나가 공짜로 딸려오는 기쁨을 알까? 이런 기쁨과, 모든 게 명품으로 꾸며진 거실에 앉아 서울 시내를 내다보는 기쁨은 본질적으로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