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틸킴 Feb 13. 2017

19. 와락, 서른.

<마스다 미리 베스트 컬렉션>, 마스다 미리



서른 살 여자로 산지 벌써 두 달째다. 나는 남들보다 빨리 서른 살이 되었다. 나는 이른바 빠른 년생이다. 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은 올해 서른이 되었고, 같은 해에 태어난 친구들은 올해 스물아홉이 되었다. 나는 2017년을 한번 더 스물아홉으로 살지, 이제 그만 서른이 될지 결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부터 서른이 되기로 했다.

한국에서, (다른 나라는 안 살아봐서 모르겠다) 서른은 여자에게 특히 가혹하다. 남자는 나이 서른부터 시작이지만, 여자는 나이 서른이면 잔치가 끝나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이 관용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자의 가치는 어리고 예쁜 것에 있다. 노화가 시작된 서른 살은 여자로서 인생 끝. 전 아닌데요? 반박하는 사람들에겐 가차 없는 팩트 공격. 너, 지금 애 낳아도 노산이야. 너, 이제 초경보다 폐경이 더 가까운 건 알지? 듣는 사람이 애 생각이 있든 없든, 결혼 생각이 있든 없든,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 남자 하나 잘 물면 인생 풀리는 게 또 여자, 그러므로 서른의 여자는 여자로서 상품성을 다 잃어버렸다고, 세상은 끝없이 협박한다. 문제는 죽지 않는 이상, 누구나 서른 살을 겪어내야 한다는 것. 예수, 아니 트럼프의 딸이래도 죽지 않는 이상 한 번은 서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마흔이 되고 쉬은이 되고 아흔, 백까지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 비참을 알고, 서른 살이 여자만 비껴가진 않는다는 것이다.


서른 살의 여자들을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어 놓고 세상은 우리에게 온갖 것을 팔아댄다. 동안 메이크업, 안티에이징 화장품, 서른 살 여자의 재테크, 서른 살의 연애, 결혼 비법. 하, 서른이 대체 뭐라고.

나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이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끙끙 앓았다. 1부터 30까지 숫자를 써보자. 각각의 숫자 옆에다 위인들이 이뤄낸 업적을 적어보자. 4살, 모짜르트 작곡. 6살, 율곡 이이 시 씀. 9살, 송유근 방송 출연. 28, 커트 코베인 사망. 그 대단한 숫자들 속에서 나는 겨우 학교를 입학했다 졸업하고, 그걸 네 번이나 반복하고, 그 이후론 매일매일 회사 출근뿐이다. 나이 스물, 둘, 셋넷일고여덜아홉을 먹도록 이뤄놓은 게 없다. 소설가가 될지, 선생님이 될지 고민하던 열 살짜리 계집애도 알았을까? 내 앞날엔 서른까지 소설도, 시도 하다못해 SNS 스타도 아무것도 없단 사실을.

어른의 미래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중


괜찮은 삶을 살려면 뭐가 많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 같은데, 난 왜 해놓은 게 없지? 이대로면 안 괜찮은 삶이 되는 걸까? 이제 난 뭐가 될 수 있을까? 차장? 팀장? 그렇게 생각하자 나이 먹는 게 두려웠다. 그런데 뭐, 서른? 서어른? 이렇게 세 번만 더 살아버리면 아아흔? 요절한 천재들처럼 스물아홉 12월의 말일에는, 나, 비록 이룬 것 없어도 젊은 몸으로 눈 부실 때 떠나리, 콱 죽어버려야 할까. 집도 차도 커리어도 아무것도 없는 내가 감히 서른이 되어도 될까. 뜻한 바를 세우는 나이라 서른을 이립이라고 하셨나요, 공자님! 전 독립도, 그러니까 월세방도 겨우 구했는데요.

인생이 누구보다 빨리 어떤 위업을 세우는 데 가치가 있는 거라면, 한 살이라도 유예하는 게 좋다. 공식 기록에 서른 살의 업적이 아니라 스물아홉의 업적으로, 파릇파릇한 이십 대의 업적으로 남을 테니까. 모두의 인생에 공통된 목표가 있고, 그걸 누구보다 빨리 이루는 게 인생의 의미라면 나이에는 값이 생긴다. 스무 살에 사장님이 되면 150점, 마흔 살에 사장님이 되면 50점. 나이에 걸맞은 한계도 생긴다. 스무 살에 떠난 배낭여행은 100점, 쉰 살에 떠난 배낭여행은 20점. 그래서 세상은 걸핏하면 나잇값을 요구한다. 그 나이 먹도록 그게 뭐니, 어?

그래서 이십 대의 어린 날들엔 서른 살의 어른들에게 가차 없었다. 내 미래는 좀 다를 줄 알았거든. 서른 살의 남자 선배들이여, 나잇값을 하시게. 술만 퍼마시지 말고, 그렇게 이빨만 털지 말고 생각이란 걸 좀 해보시게. 서른 살의 여자 선배들이여, 나잇값을 하시게. 살만 빼지 말고, 남자만 생각 말고 어른이 되시게.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불안해졌다. 나도 이렇게 그냥 늙는 거 아냐? 알긴 알았지, 나이 먹는다고 뭐 변하는 거 없다는 거. 나도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하면서 겪어봤지. 고등학교만 졸업한다고 뭐가 되는 거 아니란 거 나 알았지. 근데, 이거 설마 서른 될 때도 그런 건가. 스멀스멀 의심이 들었다. 나이, 진짜 숫자에 불과한 건가. 과연, 새해 밝는다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건 아니었다. 근데 새로 알게 된 것도 있다. 한해 저물었다고 내 인생 저무는 것도 아니라는 것.

나, 올바르지 않나? 지금도 자연스럽게 올바른 행동을 했다. '계산이 맞지 않으면 저 아이, 곤란해지는 걸.' 이런 나는 변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중


무엇이 있어야 부끄럽지 않은 30대가 되는 걸까? 30평짜리 집? 그럴 듯한 애인? 멋진 직함? 서른을 서른답게 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평생 살아온 서른 해의 하루하루가 나의 서른을 만드는 거였다. 그동안 내가 올바르다고 믿어온 것들, 내가 꿈꾸는 것들, 내가 기꺼이 즐거워하는 것들. 그게 설령 식당에서 계산할 때 더 받은 거스름돈을 기계적으로 돌려주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노을을 보며 작게 한숨 쉬곤 다시 씩씩하게 걸어가는 것일지라도. 그 자잘한 하루들이 모여 서른이 되는 것이었다. 차곡차곡 몸에 남는 거였다. 그깟 나이 한 살이 나를 망가뜨릴 이유가 없었다. 다만 하루하루는 아깝지 않아야 했다. 먼 어느날 돌아봤을 때 그때 좀더 어떻게 할 걸, 이라는 후회는 남지 않도록. 꼭 미친 듯 놀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오늘의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가기 귀찮은 수영교실이든, 음식물 쓰레기 처리든, 무엇이든 간에 하루하루를 꼭꼭 채워가는 거다.


할머니, 나 남자 친구 없는 지도 한참 됐고 곧 마흔 살이야. 할머니. 나... 불쌍해?  

할머니, 난 내가 불쌍하다는 생각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냥, 아깝다는 생각은 들어.

-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중


나는 그 어느 때의 나도 아깝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돌아가고 싶은 시절도 없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지금 사는 오늘이 내 인생 가장 좋은 날이었으면 좋겠다. 마흔 살도, 예순 살도, 아깝지 않은 한평생을 살면서, 가장 멋진 오늘을 살고 싶다.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한, 하루하루 내가 원하는 것들로 삶을 채워간다면, 내 나이는 내게 부끄러울 게 없을 거다. 오히려 나이 같은 걸 까먹지 않을까. 가만, 내가 몇살이었더라, 하고. 인생의 의미는 무언가를 빨리 이루는데 있는 게 아니라 끝끝내 나만의 목적지를 찾아가는 데 있는 거니까. 어떤 나이에 있든 나는 나를 와락 안아줄 거다.

"이 하눌타리의 씨에는 하눌타리 나무가 되기 위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어."
"모양은 이상한데 말이지."

- <주말엔 숲으로> 중


이제 나는 인생을 한 살 먼저 살게 되었다. 사실, 내 얼굴은 이미 시간을 달려 살고 있긴 하다. 저번 주에는 수영장에서 할머니가 나한테 그랬다. "젊은 엄마, 선풍기 좀 틀게, 미안해." 나는 애도, 애 갖게 할 남편도 없는데. 하하하. 누군가의 눈엔 이미 젊은 엄마의 얼굴이었던 거다. 빨가벗은 채였으니까 스타일의 문제도 아니었다. 어쩌면 할머니도 할머니가 아니었으려나? 뭐, 괜찮았다. 아직 추운 2월에 선풍기를 켜는 것도, 아가씨를 엄마라 부르는 것도. 나는 전시상품이 아니니까. 누구에게도 나를 팔지 않을 거니까. 누구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 나는 나로 살아갈 테니까. 그리고 그런 내가 꽤 맘에 드니까.

여러 모습의 내가 모여서 하나의 내 모습을 만들고 있다.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늘려간다. 그 정도로 괜찮을지도.

합체해서 강해져 가는 나. 

-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중


그러니 서른 초보들아, 겁내지 말자. 시시껄렁하게 우리를 팔지 말자. 우리에겐 우리의 인생이 있다. 마흔이 되어도 쉰 살이 되어도 우리는 우리일 것이다. 누구도 우리의 가치를 깎아먹을 수 없다.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그래도 불안할 땐 먼저 나이 든 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여전히 삶은 괜찮다고 한다. 어떻게 살아도 살만하다고 한다. 우리 안엔 우리가 되기 위한 모든 것이 있다. 나이 얼마를 먹어도 애는 애, 개는 개, 천재는 천재, 나는 나다. 서른 살의 내가 나는 맘에 든다.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1. 올해 서른이 되었다면

2. 잘난 부분이 단 하나도 없는데 멋진 언니(누나)를 알고 싶다면

3.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 의심이 든다면

4. 남자친구랑 싸웠다면

5. 여자친구에게 책선물을 하고 싶다면


매거진의 이전글 18. 힙한 생활의 길잡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