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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Oct 11. 2016

15. 어렵다면 의심해봐

<건지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클럽>, 매리앤셰퍼/애니베로우즈

저: 선생님, 큰일입니다. 똥이... 똥이 며칠째 안 나와요. 고구마, 바나나, 푸룬, 시금치, 장에 좋다는 건 다 먹었는데도...안 나옵니다...저, 무슨 문제 있나요?

의사: 아, 전형적인 변비입니다. 관장하세요.


요 며칠, 저는 내내 이런 상태입니다. 분명히 똥이 마렵길래 변기에 달려가 앉았는데, 아무리 힘을 줘도 내장 속에서 뭐가 움직이는 느낌이 안 들어요. 속에 분명 가득 있는데, 꽉 차있는데! 힘 빡 주면 방구만 요란하게 빵! 나오라는 똥은 안 나오고 허벅지 저리고 발 시렵고... 어금니 빠득거리며 용써봐야 머리만 핑핑 돌뿐, 소득없이 화장실 문 닫고 나오면 아-나, 또 마려운 기분. 달려가 앉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소식 없고.


복부팽만, 욕구불만, 짜증스러운 기분은 덤으로 따라오는 아주 전형적 변비.


아니 그 지경이면 얼른 병원을 가지, 왜 여기다 더럽게 이런 소릴 하고 있냐 물으신다면 -

제가 지금 마렵긴 마려운데, 그게 마려운 게 실은 똥이 아니고 글이거든요.

차라리 똥이 마렵다면, 처방이라도 받을 것을!!


6개월 전의 일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책을 하나 읽었어요. 일요일 밤에 시작해서 월요일 새벽 4시까지 내내 읽을 만큼, 끝내줬습니다. 무엇보다 술술 읽히는 게 쉬웠습니다. 잠은 거의 못 자고 출근했지만 좋은 책을 읽어 기분이 괜찮았어요. 머릿속에 뭐가 막 생기는 것 같았거든요. 어서 서평을 쓰고 싶었습니다. 남들한테 소개도 하고, 얼마나 재밌었는지 자랑도 하고 싶고. 문제는 그러니까 이게 벌써 육 개월 전 일이라는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글을 못 '싸고' 있고요.


좋은 소재도 있고, 분명 쓰고 싶은 글도 있어 컴퓨터를 켰는데, 왜 깜박이는 커서만 보면 머릿속이 깜박거릴까요? 어디로 다 사라져 버린 거죠, 쓰고 싶은 글?  '똥만 싸는 기계'란 말이 부러울 정도로 뭐라도 싸고 싶은 심정, 관장이라도 제발 좀 당하고 싶은 이 간절함, 모두들 빈 화면 앞에서 가끔씩은 겪어보는 거 맞죠?


뭐가 됐든 결심했습니다. 오늘은 이 글을 끝낼 겁니다. 주말에도 3시간이나 걸쳐 초안을 잡았어요. 뭐라도 시작하면 그다음은 알아서 써지겠지 싶었거든요. 그리고 지금부터 2시간 전에 그 바이트 쓰레기를 다 지웠습니다. 한숨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아... 이게 아닌데...


그래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냥 지껄여보자. 멋 부리지 말고, 어차피 똥인데 멋진 똥 싸려고 힘주지 말고 힘 빼자. 자, 그렇게 시작한 똥글입니다.




보통 누가 읽어보라고 추천하는 책들은 참 어렵습니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 고전 작품들은 등장인물 이름 외우기도 벅차고요. 사피엔스, 이기적 유전자, 역사, 과학 도서가 되면 그냥 분류가 역사, 과학이라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집니다. 경제학 도서들도 그래프가 어쩌고, 환율 변동 미래 예측이 저쩌고, 어렵기는 매한가지입니다. 흔히 책을 읽는다고 하면 꼭 그런 책을 읽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인생살이, 스펙 발전에 도움이 되는 '지성'과 '지식'의 결과물 같거든요. 근거는? 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우니까.


그래서 누가 책을 읽는다고 할 때의 책은 판타지나 로맨스 소설이 아니어야 합니다. 왜냐면 그런 건 내가 재미있을 정도로 쉽거든요. 아니 근데, 책은 재미있으려고 읽으면 안 되나요? 꼭 어려워야만 가치가 있나요? 아니잖아요. 똑똑한 사람들만 책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듯이, 그냥 숨 쉬듯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면 또 뭐 어때요?


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누군가 추천한 책이 어렵다면 의심하세요. 그 책은 그냥 액세서리일 겁니다. 그 사람도 그 책 끝까지 안 읽었을 거예요.
당신의 삶에 1도 도움 안 되는 고문도구일 수도 있어요. 우린 쉬운 책부터 시작하자고요.


제가 지금 소개하려는 이 책, 6개월 전에 읽었다는 그 책, 저는 이 책을 읽고 책 읽기의 기쁨을 다시 알게 됐습니다. 스마트폰 대신 책 읽는 시간이 늘기도 했고요.


이 책엔 사전 지식? 필요 없습니다. 아주 쉬운 글이고, 스토리도 순 구조입니다. 어쩌면 전형적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재미있어요. 아니 얼마나 재미있으면 서평을 쓰려고 6개월을 고민했겠습니까? 차라리 포기를 하지.


자, 앞으로 책을 많이 읽을 예정이지만, 지금 당장은 책 제목을 읽는 것이 독서의 전부인 분들,

책 한 권 다 읽기가 고역이신 분들! 이 책을 기억하십시오.

<건지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클럽>

책 이름이 아주 기니까 어딘가 적어두세요, 다시 한번.

<건지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클럽>

<감자껍질>을 기억하면 됩니다. 감자 껍질이 제목에 들어있는 책은 이것 하나뿐이니까요.



자자, 우린 지금 건지섬으로 날아가는 중입니다. 런던, 포츠머스, 생말로... 익숙한 지명들이 보이고요, 영국의 남쪽과 프랑스의 북쪽 사이로 바다가 있네요. 두 나라 사이에 작은 섬 두 개가 보일 겁니다. 건지섬, 저지섬.  



건지섬과 더 친해져 볼까요. 텔레그래프도 추천한 영국의 휴양지, 건지섬의 풍경을 보세요. 소들이 풀을 뜯고(한우를 닮았군요), 우중충한 회색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맑은 산과 바다.

붉은 지붕의 대성당이 아주 멋진 이국적인 풍경, 어서 오세요, 이곳이 바로 건지 섬입니다!


"독일군이 섬에 상륙하던 그날, 비행기가 연달아 군대를 실어 오고, 부두에 도착한 배에서도 군대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있을 때, 바로 그 구절을 알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때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거라고는 '이런 망할 놈들, 이런 망할 놈들'을 되풀이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만일 '밝은 날이 다했으니 이제 어둠을 맞이하리라'를 떠올릴 수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든 마음의 위로를 받고 상황에 대처할 준비를 갖출 수 있었을 것입니다."

- <건지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클럽> 중



이제 건지아일랜드는 알겠는데, '감자껍질파이클럽'은 도대체 뭐하는 클럽이냐고요? 파이인 걸 보니 뭔가 먹을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아니 왜 감자껍질로 파이를 만들었을까? 그건 이렇습니다. 작고 평화로운 섬, 건지섬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5년간 독일군에게 점령됩니다. 섬에서 나는 작물들이나 물고기들, 기르던 가축들은 모두 독일군들의 군사 식량으로 수탈되고, 밤이면 심지어 통금시간이 있어 주민들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죠. 그러나 유쾌한 건지섬 사람들은 감자껍질로 파이도 만들고, 돼지 한 마리를 빼돌려 기어이 통돼지 바베큐 파티를 엽니다. 그러다 지지리 복도 없게 독일군들에게 걸려버리는데요. 이때 독일군들을 속이기 위해 '감자껍질파이클럽'이라는 문학모임을 하는 중이라고 뻥을 쳐버린 겁니다. 이 급조 모임이 진짜 독서모임이 되어가는 이야기가 책의 중심을 이룹니다.


아마도, 책에는 귀소본능이란 것이 있어서 자기에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게 아닐까요?

- <건지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클럽> 중


책은 아주 독특하게 시작합니다. 건지섬 주민 하나가 런던의 유명 기자 '줄리엣 에슈턴'이 중고서점에 팔았던 책을 손에 넣게 되죠. 그는 줄리엣이 책의 여백에 남겨뒀던 메모를 보고 그녀의 주소로 편지를 보냅니다. 이 책을 쓴 저자의 다른 작품을 더 구해줄 수 있느냐고 정중하게 부탁했죠. 줄리엣은 기꺼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감자껍질파이클럽'의 모든 사람들과 펜팔을 맺게 됩니다. 줄리엣은 곧 이 사랑스러운 건지섬 주민들에게 푹 빠져버리게 되죠.


좋은 책을 읽으면 나쁜 책을 즐기지 못하게 된다니까요.

- <건지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클럽> 중


소설은 줄리엣과 섬사람들이 주고받은 편지글의 형식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물 흐르듯 쉽게, 마치 라디오 사연을 듣듯 재미있게 따라갈 수 있어요. 작은 섬에서 돼지 치고, 토마토 기르고, 물고기 낚던 어부들이 전쟁의 비참함을 어떻게 버텨내는지, 어떻게 책으로 치유를 받았는지, 그 순수한 감정들을 따라가다 보면 희한하게 제게도 책에 대한 애정이 생깁니다. '책 읽으면 너한테 좋다니까, 읽으라고 읽어 읽어!' 윽박지르지 않아도 나도 나만의 책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랬더니 에벤의 말은 아직 저에게 맞는 시인을 찾지 못해서 그렇다는 거였습니다

- <건지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클럽> 중


왜냐하면 건지섬 사람들은 시를 잘 모르는 친구에게 면박을 주지 않고, '아직 너에게 맞는 시인을 찾지 못했을 뿐이야'라고 말해줄 정도로 다정하거든요. 그래요, 책이 여태껏 너무 어려웠다면 그건 나에게 맞는 책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책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일이 그럴 거구요. 아마 제가 지금 이렇게 글 쓰는데 애를 먹는 것도, 이 책에 대한 소감을 어떻게 써야 할지 제게 맞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그러는 것뿐일 테죠!




이 책이 맘에 든 건 쉬운 데도 할 말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책의 저자인 매리 여사는 이 책을 쓰기 전까지는 소설쓸 생각을 하지 못했대요. 그렇게 어려운 걸 내가 어떻게 해? 하지만 친구들의 계속된 권유에, 그리고 무엇보다 직접 방문해본 건지섬의 매력에 푹 빠져 스토리를 쓰기 시작했고, 제 마음도 아주 쉽게 훔쳐버렸죠.


사람들은 대개 어려운 것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무엇이 어렵다는 사실만으로 겁을 내기도 하고요. 글을 예로 들어볼까요? 어렵고 복잡한 글을 읽을 땐, 그것이 어렵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게 꼭 잘 쓴 글 같잖아요. 글이나 영화가 지루하고 어려우면, 그런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기보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겠지 하고 납득해버리기도 하죠. 더군다나 주변 어른들도 그래요. 쉽게 쉽게 가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해요, 사람이 어려운 것도 좀 해봐야 한다고 하구요. 하지만 물어볼게요.


다음 두 문제 중 어느 쪽이 더 가치 있죠?


1번. 1 + 1 =

2번. Let H=Z4 × {0} be a subgroup of the group G=Z4 × Z3. Prove that G/H isomorphic to Z3.


그리고 문제를 이렇게 바꾸면요?

1번. 쉽게 싼 똥
2번. 어렵게 싼 똥


정답은 없어요. 질문이 잘못되었으니까요. 어린아이가 세상에 '더한다'는 개념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의 놀라움과 대학생들이 '대수학'의 개념을 쫓아가고 이해할 때의 충격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잖아요. 똥의 문제도 마찬가지죠. 어렵게 싸는 똥은 굵기가 어떻든지 간에 그저 쌌다는 이유만으로도 싼 사람에게는 기쁨일 테고, 쉽게 싼 똥은 장 건강이 무척 좋은 덕분이니 싼 사람에게 자랑이 되겠지요.


자 이런 기사를 보면 또 어떨까요?

http://www.insight.co.kr/newsRead.php?ArtNo=42252


우리는 쉬운 것의 가치를 너무 쉽게 봐요.

아마도 우리가 시험을 치며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 거예요. 한국에서는 한 사람이 어른이 되기 위해선 12년 동안 시험을 쳐야 합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학력평가, 입학시험, 수능시험. 그리고 시험문제들은 대개 어려워질수록 가치가 있었죠. 개념 문제보다는 응용문제가, 단순 문제보다는 복합 문제가 더 배점이 높았어요. 과학, 수학, 문학, 체육 모든 과목에서요. 그리고 그런 문제를 잘 푸는 학생들이 똑똑하다고 칭찬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자꾸 속곤 합니다. 어려운 게 쉬운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거야, 하구요.


하지만 어려운 건 함정일 수 있어요. 의미 없이, 내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법칙이 있죠. 어떤 사안을 설명할 때, 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 가설은 거짓일 확률이 높다는 것인데요, 답은 언제나 단순하고 쉬운 것에 있습니다.


똥 싸는 것도 쉽지 않은 인생, 그냥 재미있게 읽고 즐거워하면 또 어때요.







이런 분께 추천드립니다.

1. 책을 읽고 싶은데 시작하기 두려운 분들

2. 밤새 읽을 정도로 재밌는 책을 찾는 분들

3. 쏟아지는 교양서와 복잡한 서사의 소설들에 질린 분들

4. 감자껍질이 제목인 책이 읽고 싶은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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