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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Mar 23. 2017

21. 직장인의 미소 서식지

<사생활의 천재들>, 정혜윤

입사 후 첫 회식 때 십몇년차 선배님, 그러니까 차장님께 이런 질문을 했었다.


10년 넘게 한 회사를 다니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그래도 재밌어요?


차장님은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으로,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셨다.


그럴 리가. 나는 출근이 아직도 무서워요.


그날 팀 선배들은 회사를 떠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제 출근 시작한 신입을 앞에 두고. 역시 잘하는 사람들은 다 떠나네, 그럼 우린 뭐지. 무능력자들인가, 하하하. 까마득한 날들이 지나도록, 그 무서운 출근을 반복해온 선배들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나도 일단 따라 웃었다. 직장인의 무기력을 실감하며 나는 내 미래를 훔쳐본 것처럼 으스스해졌다. 궁금했다. 난 언제까지 이 회사를 다니고 있을까? 반 10년 차의 나는 입사 1개월 차의 내 질문에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회사엔 천재 같은 사람들이 참 많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치고, 외국 잡지와 인터뷰도 하고, 부업으로 돈도 잘 벌고, 그러다가 회사를 떠난다. 진짜 재미있는 일을 하러 떠난다. 그러고 보니 정말, 회사에 남은 사람들은 다들 평범한 것 같다. (대표적으로 내가 아직 회사에 있지 않은가!) 회사를 벗어나려면 재능이 필요하고, 내겐 그게 없다. 들어올 때도 어마어마한 자격을 요구하더니, 벗어날 땐 그 이상이어야 한다. 매일 출근이나 하며 시시하게 살아갈 생각을 하면, 그나마 회사라도 다니는 날 누군가는 부러워하겠지 생각을 하면 참을 수 없이 답답해진다. 나는 그래서 천재라는 말이 싫다. 그 앞에서 보잘것 없어지는 내가 싫으니까.


되지 못한 나가 나를 건드립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꿈이 나를 잠 못 이루게 합니다.

- <사생활의 천재들> 중


직장인 5년 차, 나는 지금 무엇이 되고 있는 걸까. 되지 못한 내가 자꾸 나를 건드린다. 너, 그거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남 눈치나 보는 건 아니고? 아직 내가 가닿지 못한 꿈들이 밤마다 소란스럽다. 하지만 묵혀둔 꿈들을 꺼내 보는 건 실로 괴로운 일이다. 없는 재능과 그만큼 별 볼 일 없는 내 환경이, 묵혀둔 꿈들과 함께 주렁주렁 딸려오기 때문이다. 왜 나는 천재가 아닐까? 천재였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내 미래가 조금은 더 기대될 텐데. 별거 없을 게 뻔한 미래를 사랑하려면 큰 각오가 필요했다. 앞으로 무엇이 되지 않아도 어떻게든 나를 사랑하겠다는 건 속 편한 거짓말이나 막연한 다짐이 되기 쉬우니까. 나는 아무것도 없을 내 미래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사생활의 천재들



내 손으론 절대 고르지 않았을 제목. 사소한 일상을 살아내는 것도 천재적인 일이에요! 이런 가짜 위로는 절대 받고 싶지 않은데. 천재들의 이야기를 가공한 자기 계발 인터뷰라면 더더욱 보고 싶지 않은데. 심지어 사생활의 천재 목록엔 윤태호가 있었다. 윤태호라니, 윤태호는 대표적인 천재 만화가잖아. 책의 첫인상은 별로였다. 현학적인 서문도 잘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선물하며 친구가 함께 써준 쪽지가 참 따뜻했다. 그 친구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내게도 분명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꾸역꾸역 읽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 박수용의 이야기부터는 책을 고쳐 잡았다.


나는 죽은 사슴의 뼈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사슴 뼈를 보면서 숲과 사슴의 역사를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살아생전 지녔을 사슴의 감성과 살아있을 동안의 투쟁과 생애 마지막 순간의 고뇌를 느꼈습니다. 그 뼈를 보면서, 숲 속에 자신의 역사를 외로운 유적처럼 뼈로 남겨놓은 한 생명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그보다는 인생 전체가 중요하다는 것, 매일매일 불행하다가 어느 한순간 찬란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 나는 뼈 한 조각을 보면서 보람이란 것을 어떤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사생활의 천재들> 중


그보다는 인생 전체가 중요하다는 것, 매일매일 불행하다가 어느 한순간 찬란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 그래, 내겐 하늘이 내린 재능 같은 건 없다. 애초에 그렇게 태어나질 않았다. 나를 당장 죽인대도 글쓰기의 천재나 광고 천재가 될 순 없다. 그리고 하나 더. 기적적으로 내일부터 천재가 된다 해도, 갑자기 삶이 찬란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물론 아니었다.


제목은 '천재들'이라지만, 사실 이 책엔 내 고정관념 속 천재에 가까운 인물이 없었다. 심지어 그 윤태호 작가조차도 그렇게 천재적이지 않았다. 부끄러워 심장이 따끔거릴 만큼 못났었다. 실패했고, 좌절했다. 그럼에도 끝없이 대답했다. 난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제발 이번 영화 보지 말라고, 다음번에 더 잘하겠다고 맹세하는 영화감독, 절대로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야생 영장류 학자, 우주적인 대발견을 하지 않는 천문학자. 그 누구도 천재적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삶이 던지는 질문 앞에 똑바로 섰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도록 살아냈다.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치 않았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의문이 풀릴 때까지 그저 밀고 나아갔다. 동물학자는 긴팔원숭이들이 있는 숲으로,  사회활동가는 청년들의 삶 속으로.


그들은 진부하고 시시하지 않게 살려고 애쓰는 데서 천재다. 그들은 자기 삶에 던져진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 삶의 문제를 직면하는 데, 그것을 푸는 데, 그것에서 보편성을 보는 데 천재적이다. 그들은 삶의 태도에서 천재다.

- <사생활의 천재들> 중


나는 내 삶에 대답으로 존재했던 적이 있었나. 나는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에만 집착했다. 한계선부터 그었다. 어차피 대단한 일은 하지 못할 거라고, 저렇게 골 때리는 카피, 죽어도 나는 못 쓸 거라고. 나의 오늘은 임기응변과 우연한 결과에 불과했다. 이게 내가 찾아낸 답이에요,라고 할만한 떳떳한 하루는 아직 내 인생에 없었다. 그래서 변명만 했다. 무언갈 잘 해냈을 때도 그랬다. 원하던 회사에 합격해서 축하를 받았을 땐 "운이 좋았죠"라고, 어쩌다 좋은 아이디어를 냈을 땐 "타이밍이 좋았죠"라고.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힘이 내게 있다는 게 무서웠다. 나는 등 떠밀리듯 답지를 골라냈고, 그러므로 항상 남들의 평가가 필요했다. 천재라는 칭찬이, 잘 한다는 칭찬이. 내가 천재라는 말을 싫어하는 건,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잘하고 싶으면서도, 그럴 용기가 없어서였다.


저는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잠깐 숨을 곳, 잠깐 쉴 곳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비가 오면 잠시 피해갈 처마 밑 같은 곳입니다. 지렁이 수준의 숨어있을 만한 곳도 있고, 새 수준, 고양이 수준의 숨어있을 곳도 잇습니다. 인간 한 명 한 명에게도 이 도시에 잠깐 쉬어갈 곳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마이크로 하비타트(미소 서식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사생활의 천재들> 중


숨어있을 만한 곳. 새라면 안심하고 알을 품을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한 곳. 미소 서식지. 내게도 그런 공간이 필요했다. 제작팀의 하루는 평가로 시작해 평가로 끝난다. 이 아이디어 좋아, 나빠. 매일매일 이 문장을 말하거나 듣는다. 다른 회사들도 사정은 비슷할 거라 생각한다. 직장인은 매일매일 평가당한다. 영업실적으로, 제안서 한 장으로, 결국 내가 벌어올 수 있는 돈으로. 회사를 다니면 내가 어떤 인간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회사에 있는 내내 남들이 좋아할 만한 것만 신경 쓰다가, 퇴근을 해서는 빨래, 설거지, 곰팡이 지우기 등등 생활에 떠밀리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이 되면 SNS를 훔쳐본다. 나만을 위한 시간이라고 착각했던 순간에도, 나는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남의 시선 안에 갇혀있었다. 이렇게 쓰면 어떻게 생각할까, 잘 썼다고 할까, 어쩜 이런 생각을 했냐고 할까. 그랬다, 나는 어디서도 편하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허허벌판에서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초식동물처럼 곤두서 있었다. 일단 모든 것으로부터 좀 숨어야 했다. 잘 하고 싶단 압박에서도, 자취생활에서도. 찾아야 했다. 나만의 미소 서식지를.


제겐 제 자신을 키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에게 과제를 부여하는 겁니다. 어떤 과제냐면 하나의 동물을 관찰하듯 자기를 관찰한다는 겁니다. ~ 자기의 원래 관심사에 집중해보는 것입니다.


저는 자신을 키우려는 자는 동물의 장점과 인간의 장점을 다 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동물들도 생존에 관한 문제는 빨리 해치우고 삶을 즐기고 싶어 합니다. 동물들은 자기 세계를 향유함에 있어 당당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당당합니다. ~ 동물들은 미학적으로 나름의 스타일로 완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완성'이란 자기가 속한 곳에 딱 맞게 되어있단 겁니다.

- <사생활의 천재들> 중


사생활의 천재들은 다들 당당했다. 책에 소개될 만큼 화려한 타이틀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못난 점도, 모난 점도, 또 잘난 점도. 제각각 나름의 스타일로 '완성'되어 있었다. 그 결과물이 다큐멘터리고, 영화고, 청년 유니온이고, 천문 마을이었을 뿐이다. 이들은 일상에 휩쓸려가지 않았다. 생존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면 끊임없이 내가 나로 온전하게 설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고, 자신에게 끝없이 물었다. 너는 뭘 좋아하니, 지금 어떻게 하고 싶니, 왜 그렇게 걷고 있니. 동물학자가 영장류를 관찰하듯이. 그들을 길러낸 건 그 시선이었다. 모두에게서 해방되어, 자신만을 집요하게 들여다본 그 시선. 이 책은 결국 천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미소 서식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실 나를 가장 초조하게 한 건 멋진 '직장인'이 되고 싶단 욕심이었다. 끝내주는 '카피라이터', 잘 나가는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다는. 그러려면 요구하는 재능도, 해야만 하는 일도 너무 많았다. 책도 읽어야지, 글도 써야지, 영어도 공부해야지, 살도 빼야지, 나만의 스타일도 찾아야지.


지렁이 수준의 숨어있을 만한 곳. 

이 문장을 읽고 비로소 나는 출구를 찾았다. 나를 작은 지렁이라고 상상해보았다. 작은 지렁이. 어디서나 꾸물거리며 기어 다니고 특별할 것 없는 지렁이. 지렁이를 애써 갖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지렁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밭에선 열매가 많이 열린다. 콩을 심으면 콩이 쑥쑥 자라고, 꽃을 심으면 꽃이 활짝 필 것이다. 지렁이가 건강한 땅에선 풀들도 건강하다. 무엇보다 지렁이를 잘 보살피는 건 멋진 직장인을 만드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지렁이가 좋아하는 촉촉한 흙밭에 잘 풀어두고, 혹시나 아스팔트를 기어가는 동안 땡볕에 말라죽지 않도록, 적당히 물을 뿌려주면 되었다. 풀잎 그늘이 필요하면 얼른 나뭇가지로 옮겨주면 된다. 나는 이 지렁이에게 미소 서식지를 찾아주기로 했다. 그건 수영 시간도 되었고, 검도를 배우다 혼나는 시간도 되었다. 중요한 건 그 시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나 혼자라는 것이었다.


출퇴근을 하고, 회의를 하고 남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이쪽 화단에서 저쪽 화단으로 옮겨가는 아스팔트 길이라면, 나는 아스팔트 길을 건너는 동안 메마른 몸이 다시 촉촉해질 수 있도는 시간도 꼭 그만큼 가져야 했다. 그건 내가 게으르거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지렁이는 그렇게 해야 살 수 있다. 지렁이는 누구의 딸, 어느 팀 대리, 자취방의 주인, 한 사람의 연인도 아니었다. 그냥 작은 지렁이다. 푹 쉬어야 다음날 또 먼 땅까지 기어갈 수 있다. 그렇게 그 작은 지렁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원래의 나에 집중하는 시간을 하루에 단 몇 분 가져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치유가 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미래를 사랑하기 시작했단 것은 뭔가를, 

특히 사랑할 만한 것을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말과도 같아.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포함해서. 

- <사생활의 천재들> 중


어떻게 하면 앞으로도 직장인일 평범한 나를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무능력자라고 비웃지 않을 수 있을까. 미래를 사랑하기 시작했단 것은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말과도 같다고 했다. 직장인이니까, 남의 돈을 받으며 사니까, 우리에겐 나를 다시 볼 공간이 필요하다. 나만 생각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그건 스스로 가지려고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냥 스마트폰을 보며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생각하고 나를 실험하는 시간. 어떤 때 내가 가장 불붙는지 이기적으로 굴 수 있는 시간. 마음 놓고 알을 품고, 알이 깨길 기다릴 수 있는 장소. 나는 그것을 미소 서식지라고 이해했다. 직장인이 끝까지 웃을 수 있게 하는 미소 서식지. 몇십 년 출퇴근을 반복해도 '나'로 살아있을 수 있게 하는.


책을 덮을 때쯤엔 천재라는 말이 쑥스럽게 느껴졌다. 왜 제목을 천재라고 지었을까. 안 그래도 좋았을 텐데. 

그래도, 하지만 역시, 다들 천재는 좋아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들의 이야긴 참 부럽지.


지렁이 중엔 가장 특별한 나, 예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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