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
우리 집은 세 자매가 한 컴퓨터를 썼다. 나는 고3, 동생은 고1, 막내가 초2였다. 질풍노도의 시기, 나는 야동이 정말 보고 싶었다. 그러나 큰 동생까지 완벽히 잠들기를 기다리기에 잠은 내가 제일 많았고 실은 다운로드할 곳도 몰랐다. 여러모로 야동은 볼래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조정래의 아리랑을 발견했다.
그 책에서 육봉이란 단어를 처음 보고 나는 충격에 빠졌다. 이런 말이 있었다니! 구한말의 사람들은 나라를 뺏길 때도 사랑을 할 때도 불끈불끈했다. 뜨거운 불기둥이 솟는 문학적인 정사 장면들에 나는 빠져들었다. 19금 장면들도 근현대사 속에 있으면 허락되었다. 어떤 장면이든간에 아리랑을 읽으면 아무도 나를 혼내지 않았다. 국사 선생님은 반 친구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했다. 불순한 동기였으나, 덕분에 근현대사는 어렵지 않았다.
이제 맘만 먹으면 성인영상 정도는 취향껏 찾아볼 수 있다. 재력도, 자격도 있다. 그러므로 추천 도서 목록 속에서 야한 장면을 애써 찾아, 아껴보고 돌려가며 읽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당연하게도, 어쩌다 야한 소설을 발견하면 더 열심히 더 빨리 재밌게 읽는다. 이번엔 그렇게 비아프라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다.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는 제목은 평범했다. 1,2권으로 나뉜 책의 두께도 둔기에 가까웠다. 그런데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라는 작가 이름이 왠지 맘에 들었다. 나이지리아 사람이라니, 나이지리아 소설은 어떤 내용일까. 기꺼이 책을 빌렸다. 영국 식민지 시절 나이지리아 사람들의 이야기는 구한말의 것처럼 익숙하면서도, 충분히 낯설었다. 내가 아는 이야기를 전혀 다른 피부와 눈동자와 정서를 가진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듣는 일은 무척 섹시한 일이었다.
태양이 노랗게 타오르는 땅, 나이지리아. 그곳의 대학도시 은수카. 까만 피부가 매끈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이 사는 곳. 오데니그보는 은수카 국립대학의 교수로 두꺼운 가슴팍에 털이 북슬북슬하고 잘생기지 않은 얼굴이 인상적인 남자다. 식민치하 나이지리아에서 이상주의적인 꿈을 갖고 살아가는 혁명가이기도 했다. 그는 비굴한 나이지리아 ‘신민’을 혼내다가 신의 황금이란 뜻의 이름을 지닌 미모의 여성 올란나를 만나게 된다. 둘은 사랑에 빠지는데, 오데니그보는 올란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어찌나 발기가 뺑뺑하게 됐던지 머리가 다 아팠다고 한다. 세상에.
올란나에게는 쌍둥이 자매가 있다. 둘은 영국에서 유학을 마친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이제 신이 무엇을 주실지 기다려보자'는 뜻의 이름, 카이네네. 올란나와 닮은 점이라곤 인중밖에 없는 못난 얼굴. 각진 어깨와 밋밋한 가슴. 그러나 가는 허리만큼은 낭창해서 카이네네의 빨간 입술을 바라보다 한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 그는 리처드 처칠. 처칠이란 이름이 암시하듯 그는 창백한 피부의 영국인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오데니그보의 집에 열세 살 으구우가 일꾼으로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나이지리아는 문명의 이기가 없는 순결한 야생의 땅이 아니었다. 라이온킹의 배경도, 부시맨이 뛰어다니는 곳도 아니었다.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낮에는 테니스를 치고 밤에는 와인파티를 즐기며 세계정세를 논하고, 롤스로이스를 몰고 다니며 석유 개발권에 대한 격렬한 협상을 벌일만큼 충분히 세련됐다. 동시에 주술사의 힘을 빌어 다른 부족 출신의 예비 며느리를 저주하고, 콜라나무 열매는 절대로 여자가 깰 수 없다는 규칙을 지닌 복잡한 주술의 동네이기도 했다. 어떤 면으로 봐도 매력적이었다. 치정극에 가까운 사건들이 벌어지고 주인공들이 서로를 배신하는 동안 나는 침을 꼴깍 꼴깍 몇 번이나 삼켜가며 이 관능적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날벼락을 맞았다. 전쟁이 터진 것이다.
전쟁은 언제 벌어지는 것일까.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생기는 걸까. 나라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일까. 국경선은 누가 긋는 것일까. 대한민국의 국경선이 38선을 따라 그어지게 된 까닭은 초등학생들도 안다. 할머니도, 아줌마도, 오빠들도 안다. 그럼 나이지리아의 국경선은? 왜 그런 모양이 됐지?
백인들은 ‘아프리카’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이 무궁한 대륙에는 원래 이름이 없었다. 다양한 부족들이 서로 다른 역사를 지니고 서로 다른 문화를 키워왔다. 이 대륙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만 인식했다. 어느 부족에 속하든 우리는 코이코이, 인간이다. 그런데 유럽인들은 ‘역사가 없는 암흑의 땅을 발견하’고 거기에 ‘아프리카’라 이름을 내렸다. 그들의 하나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자기들끼리 자를 대고 땅을 나눠 가졌다. 아프리카의 국경선은 다른 대륙보다 유난히 자로 잰 듯 반듯반듯한 경우가 많은데, 그 때문이다. 그렇게 구분한 땅들을 나라라고 불렀다. 전혀 다른 전통과 믿음을 지닌 두 부족이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 그럼 어느 부족이 그 나라를 대표해야 할까. 백인들이 떠난 뒤에도, 아프리카에는 안타까운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나이지리아도 바로 그런 나라였다. 하우사, 요루바, 이보족들이 하나의 나라를 이루게 되었고 영국이 통치하는 동안 무슬림 신도들이 많은 북부와 남부 이보족들 간에는 균열이 생겼다. 당연한 일이었다. 억지로 기운 누더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영국이 마침내 나이지리아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했을 때, 북부 군인들은 대규모 남부 숙청작업을 벌인다. 마침내 남부 이보족들은 나이지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비아프라라는 나라를 만든다. 그리고 비아프라는 나이지리아에 맞서 싸우기로 했던 것이다.
나이지리아는 기아를 전쟁 무기로 사용했다. 기아는 비아프라를 비참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 기아는 전 세계 사람들이 비아프라의 현실에 주목하도록 했으며, ~ 또한 전 세계 부모들은 자녀들이 음식을 조금도 남기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기아는 사진 기자의 경력을 부풀려 주었으며, 국제 적십자회로 하여금 비아프라를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참혹하게 고통받는 지역으로 선포하게 했다.
-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중
우리의 1960년대보다 훨씬 세련됐던 오데니그보와 올란나의 삶은 당연하게도 전쟁 이후 모든 것이 바뀐다. 매일 밤 있던 파티도, 깨끗한 오븐도, 잘 정돈된 욕실도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딸의 단백질 부족증을 걱정하며, 공동 화장실의 역겨운 냄새를 참아가며, 폭탄 파편에 하인의 머리가 몸에서 깨끗하게 잘려나가는 것을 보며, 짝사랑하는 여자가 낯선 군인과 동침하고 귀한 음식들을 얻었다며 해맑게 웃는 것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때로는 천박해지고, 때로는 상스러워지면서. 너무 큰 비극 앞에서, 일상적인 죽음 앞에서 어떤 인류애적인 사랑마저 싹트는 것을, 사사로운 미움은 사라진다는 것을 느끼면서.
책 표지에 쓰여있는 대로, 참혹한 전쟁 속에서 태어난 위대한 용서라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그런 상투적인 광고 문구로 설명하기엔 ‘위대하다’는 표현이 너무 무책임하다. 나이지리아의 완전한 해방을 꿈꾸면서도 끝끝내 영어를 쓰는 주인어른과 비아프라의 위대한 이념을 존경하던 꼬마 으구우가 종전의 순간 이렇게 말하듯이.
"수상 각하 연설을 듣고 싶지 않아?"
"음바, 싫어요."
해리슨 아저씨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주 위대한 연설일 거야."
"위대한 건 어디에도 없어요."
-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중
나는 비아프라가 소설적 허구이길 간절히 바라며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았다. biafra. 존재하는 나라였다. 책에서 설명한 모양의 국기도, 책에 있던 노랫말도, 이보족도 하우사족도, 요루바 족도 모두 실재했다. 굶어 죽은 수십만 명의 아이들도, 나와 같이 사랑하고 일을 하고 욕심내고 질투하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전쟁 속에 죽어버린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도, 다 있었다. 내 눈앞에 없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없는 줄 알고 살아왔다니, 나는 문득 세계가 버겁게 느껴졌다.
내가 살던 마을은 강 건너에 통일전망대가 있고, 툭하면 삐라 풍선이 터졌고 대남방송이 왕왕 울렸다. 동네 아저씨들은 저 강을 넘어 무장공비가 침투했는데, 저 수문 아래서 사살 당했노란 얘기를 훈장처럼 늘어놨다. 큰엄마네 집 뒤엔 부대가 있었고, 훈련이라도 있으면 총소리에 놀란 우리 집 소들은 곧잘 유산을 했다. 6.25 전쟁을 배운 이후로는 학교 가는 길에 있는 대피소를 매일 살펴보며 다녔는데도, 꿈에서는 대피소로 가는 길을 잃어 허둥댔다. 그런 꿈을 1999년의 초등학교 5학년은 매일매일 꿨다. 나는 아마도 89년생 중 가장 전쟁을 피부로 느끼며 자란 여자아이일 것이다. 운동신경도 독한 성격도 없는 나는 핵폭탄이 터지는 순간, 어? 뭐지? 할 새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 후에 이어질 잔인한 세계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만약 살아남게 된다면?
"우리는 죽는다는 생각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야.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죽어."
-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중
재작년 겨울, 파리에 연쇄 테러가 있었을 때 사람들은 페이스북 프사에 다들 프랑스 국기 필터를 입혔다. 시리아에선 매일 수많은 사상자들이 생긴다. 지난주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나는 그때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가르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전쟁이 나도 되는 곳과 전쟁이 나서는 안 되는 곳은 따로 정해져 있었다. 파리 테러는 그 비참의 세계를 이곳으로 가져온다는 상징이었다. 이곳 역시 언제든 공격받을 수도 있단 뜻이었다. 전쟁은 이 곳의 이야기가 되면 안 되었다. 그런 마음을 가진 모두가 SNS엔 있었고, 다들 쉽게 프랑스 국기를 올렸다. 911 테러도 마찬가지였다. 악의 축 시리아에 사는 민간인들이 몇이나 죽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자유의 나라 미국인들이 어떤 공격을 받았는가다.
내일 서울에서 전쟁이 터진다면, 그땐 누가 대한민국의 국기를 프사로 바꿔줄까. 나의 죽음과 엉망이 된 삶을 누가 기억할까. 뭐라고 우리를 기억할까.
우리는 파리가 아니다. 뉴욕도, 런던도 아니다. 분단국가 속 작은 도시일 뿐이다. 언제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이곳의 전쟁은 런던이나 뉴욕의 이야기가 되진 않을 것이고, 그곳의 사람들은 안전하게 프사를 바꾸고 R.I.P 댓글을 달고 검정 리본 이모티콘을 달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아무리 시리아 난민들을 애도해도 매일매일 죽을 걱정으로 불안해하지는 않듯이. 나는 잠재적 시리아인데 정작 시리아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본 웃긴 썰에선 자신이 겪은 나이지리아인 하우스메이트를 이렇게 표현했다. ‘흙이나 퍼먹는 나라에서 온 게’라고. 웃기려고 쓴 글이겠지만, 그래 이게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아프리카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도 역사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다. 지식인도 있고, 이데올로기도 있고, 아름다운 작품도 있다. 또한 당연한 이야기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그곳은 역사도 발전도 없는 곳이 되었다. 원래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고, 그곳의 비참은 그렇게 이해된다. 하필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불운쯤으로. 하지만 아프리카는 타고나길 불운하게 태어난 땅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이용당한 비아프라처럼, 그렇게 기획된 땅이다.
그래,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보지 않는 동안은 없는 것이라고 쉽게 믿을 수 있다. 세계는 그런 곳이 아니라고, 전쟁은 없다고 믿을 수 있다. 우리의 세계엔 평화가 있으니까. 살얼음 같은 것일지라도 아직 우리는 그 위에 있으니까. 그래서 기억해야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서로의 죽음을 기억해주어야 한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이 멈춘 게 아직 100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살고 있다.
"다른 사람도 너한테 이렇게 하길 바란다. 다른 사람도 너한테 이렇게 했으면 해."
-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중
이보족 사람들은 도움을 받으면 이렇게 인사한다. 다른 사람도 너한테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나는 비아프라를 기억하려고 한다. 내가 죽을 때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길 바라듯 내가 그들을 기억하려고 한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올란나와 카이네네의 이야기를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이들의 이야기는 심지어 야하니까. 졸라 섹시하니까. 재미도 있으니까. 그 섹시한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 비아프라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비아프라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알게 된다. 세상 어딘가엔 너무나 기묘한 방식으로, 너무나 맥없이 죽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이런 무의식들이 모이고 모여 세상에 더 이상의 비아프라를 만들지 않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당장 인류평화와 우주행복 따위가 실현되는 건 아닐지라도. 비아프라를 기억하는 것이, 내 나름의 조그만 반전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 마음으로, 내가 받고 싶은 것을 남에게 먼저 나눠주는 마음으로. 우리가 죽을 때 세상이 침묵하지 않도록. 책 속의 리처드 처칠이 끈질기게 남기려고 했던 그 책의 제목처럼.
'고통은 날 죽이지 않아, 날 지혜롭게 하지.' 오 그부로 음 에그부, 오 메에 카음 말루 이페.
-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중
가능하면 오래, 행복하게,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부대끼며 살 수 있기를.
*중간 아프리카에 대한 설명은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에서 알게된 내용들입니다. 이 책도 재밌어요, 추천합니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 야한 소설, 묘한 긴장감이 있는 소설 읽고 싶다면 정말 이 책 딱입니다. 너무 재밌어요. 적나라하진 않지만 머뭇거리지 않는 표현에 무릎을 탁치게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