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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Apr 19. 2017

23. 나의 사노 요코 씨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정말로 다들 훌륭하다. 화창한 날씨에 읽고 있자니 우울해졌다. 어째서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기분이 가라앉는 것일까. 우울해하는 것도 질려서 참았던 오줌을 누러 화장실에 갔다. ~ 졸졸졸졸이라도 오줌이 나오니 다행이다. 한 번에 어느 정도 나오는지 재보고 싶다.

- <사는 게 뭐라고> 중


타고난 성격만으로도 부러운 친구들이 있다. 낯도 안 가리고, 어려운 사람에게도 스스럼없고, 같이 있으면 웃을 일이 많은 친구들. 저 애들은 누구에게나 예쁨 받겠지. 저 애들이 부탁하면 누구라도 나서겠지. 회사를 5년이나 다녔어도 인사하는 게 쑥스러워 가끔 눈이 잘 안 보이는 척하는 나와는 달리.


친구들의 청춘다운 건전함 앞에서 나는 항상 의욕을 잃는다. 하지만, 사실 건전함은 언제든 얻을 수 있다. '척'을 한다면. 낯선 술자리도 힘들지 않은 척, 밥 숟가락 한번 섞을 사이 아니지만  반가운 척, 우리 관계는 밝고 맑고 명랑한 척, 품을 좀 들이면 언제든 만들 수 있다. 힘들어서 그렇지.


척할 수도 없어, 마냥 부러운 건 뾰족한 친구들이다. 쉽게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 거창한 건 아니다. 안 웃기면 안 웃고, 안 슬프면 안 우는 것. 인간관계에서 삐딱하게 굴어봤자 돌아오는 이득도 없는데, 그럴수록 싫어하는 사람만 늘어날 텐데, 그래도 아랑곳 않는 친구들. 이거야말로 타고나야 되는 일이다. 노력한다고 될 게 아니다.


그렇게 뻗대는 게 일관되면 그 성격은 예술적인 게 된다. 한 때 소설가를 꿈꿨던 사람으로서 그게 참 부러웠다. 나는 왜 이렇게 소심하고 유순할까. 재능이 없으려거든, 소설적인 사연도 그럴듯한 시련도 없으려거든, 뾰족한 캐릭터라도 있을 것이지, 나는 왜 이토록 성격마저 평범하고 내성적일까. 그래서 나는 할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때론 드잡이도 마다않는 사람들을 동경했다.


어느 책을 보더라도 스스로를 좋아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런 문장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스스로를 좋아하다니 바보 같군. 그랬다가는 점점 멍청해질 게 뻔하지. 자기한테 반한 사람은 발전이 없으니까.' 책을 읽을 때조차 반대편으로 휙 날아가는 것이다.

- <사는 게 뭐라고> 중


내 친구 L모는 그런 점에서 최고다. 항상 삐딱하다. 자기 돈을 주고 사서 책을 봐도 뭐라고 태클을 걸고야 만다. 다들 A라고 보는 글자도 뒤집어서 V로 한번 더 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또 좀 어설프다. 완전히 삐딱하지는 않고, 항상 반만큼만 삐딱하다. 때로는 엉뚱한 포인트에서 삐딱해진다. 가끔은 삐딱한 자신에게도 삐딱해진다. 그래서 사랑스럽다.


사노 요코의 에세이는 그 친구가 추천해줬다. 사노 요코는 무려 아동문학가인데, 마냥 따뜻한 사람이 아니다. 아동문학가 하면 이오덕 선생님처럼, 아이들의 미숙한 면도 무조건 다 감싸주고, 사랑하고, 다정할 것 같은데! 사노 요코 할머니는 동화를 쓰는데 마음이 검다. 독일 유학 시절, 하숙집의 무뚝뚝한 독일인 아줌마마저 "당신도, 나도, 블랙 하트야"라고 할 정도의 무채색. 평생 글 몰라도 잘 살았구만 한글 공부를 시키니 미음이 왜 이렇게 안도ㅑ,시브랄거, 했던 양옥순 할머니 같은 시니컬함. 나는 아무 데나 시발을 쓰면 안 된다고 배웠다. 그래선지 예상치 못한 데서 시발을 발견하면 아주 짜릿하다. 사노 요코의 글을 읽는 건 뜻밖의 시발을 발견하는 느낌이었다.


왜 어린이 그림책을 그리는가. 내 결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

나는 어김없이 내 속에 있는 어린 시절의 나를 향해 얘기하고 있다.

~ 내가 어린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어린이 속에서 어린 나를 발견했을 때뿐이다.

~ 나는 평범한 아이였으니, 어느 아이의 마음속에나 나와 똑같은 평범함이 있을 거라고.

- <아침에 눈을 뜨면 바람이 부는 대로> 중


<아침에 눈을 뜨면 바람이 부는 대로>,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요코 씨의 중년, 말년, 죽기 직전의 생각들을 담은 에세이. 이 세 권을 연달아 읽자 사노 요코 씨 본인의 부끄러운 일들은 물론 요코 씨 어머니의 엉덩이 주름까지 다 알게 됐다. 요코 씨는 앓던 암이 전이돼 2년 시한부를 선고받자,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잉글리시 그린의 재규어를 질러버린다. 일생동안 외제차 모는 건 부끄럽고 잘못된 일이라고 여겼던 요코 씨였다. 죽음을 미리 아는 건 자유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할머니 요코는 죽음 앞에서도 거침없고 대범하다. 오히려 암은 행복한 병이라고까지 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모두가 피하지만, 암이 걸리면 모두가 천사 같은 눈을 하고 환자를 대하니까. 이런 스케일의 삐딱함이라니!


내 친구 L모는 보기 드물게 책임감이 강한 친구다. 맡은 일을 잘하려는 욕심도 보기 좋다. 그런데 운도 없지, 하필 그녀의 경력은 고작 2년째다. 팀장이 후려치기 딱 좋은 연차. 팀장은 하나밖에 없는 팀원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아니내가팀장인데그정도도결정못하냐 일갈하며, 친구가 다 해놓은 일을, 친구가 제안했던 대로, 친구만 쏙 빼놓고 협력팀 사람들과 결정한다. 아니 그러시면 팀장도 팀원도 혼자서 다하시지 왜. 당연히 친구는 열받았다. 팀을 바꾸고, 그 김에 내가 맡은 건도 가지고 나와야겠다고 한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2년차 회사원의 스케일이 아니다. 친구가 당장 그렇게 따지겠다는 걸 나는 뜯어말렸다. 팀장 말이 맞긴 맞아, 결정권은 다 그 사람한테 있지, 더럽지만 회사 생활이, 한국 회사 생활이 다 그래, 하고 직장인 선배 행세를 했다. 우웩. 그런데 친구는 또 따뜻해서 내 말을 듣고 반성한다. 그래, 내가 좀 침착해야겠지.


나는 사실 그녀가 부러웠다. 칭찬하고 싶었다. 분수를 모르는 태도와 주제를 파악하지 않는 정신을. 나는 왜 분수부터 알고, 주제부터 파악할까. 어차피 질 싸움은 절대 걸지 않는 나에 비해, 그녀의 비분강개는  반짝반짝 빛났다. 딱 그만큼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은 비루해졌다. 회사에서 딜을 할 땐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반드시 있어. 그러다가, 사내 평판만 나빠질까 걱정이야. 그러면서 나는 생각한다. 요코 씨였다면 이 작은 요코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에에- 정말 이상하네 그 사람, 이겨버려! 받아버려! 했을까?


나는 L모를 내 방식으로 걱정하며 L모의 추천 책을 열심히 읽는 수뿐이 없다. 그리고 L모에게 가장 위험하지 않은 길을, 그렇기 때문에 L모가 절대 택하지 않을 길을 한번 더 주절거리는 수밖에 없다. 그녀의 연차 가리지 않는 성질머리가, 팀장이든 사장이든 틀린 건 틀렸다고 증명하고 싶은 고집이 오래갔으면 좋겠다고 빌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은 사람이다. 나는 알고 싶다. 죽은 뒤에도 미워하고픈 사람이 나타날까.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죽으면 용서하게 될까.

나도 죽으면 모두들 "좋은 사람이었지"라고 추억해줄까.

죽으면 그런지 아닌지도 모를 테니 시시하다.

- <죽는 게 뭐라고> 중


사노 요코 씨는 이제 죽고 없다. 며칠간 그녀의 글만 읽었더니,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의 부고처럼 어쩐지 허망했다. 죽은 뒤에 요코 씨는 아무래도 싫은 사람을 용서하게 됐을까? 대지진을 겪은 친구에게 전화 걸어 소스 만드는 법 좀 알려달라고 했던 자신을 사과했을까? 나는 아직 그 답을 몰라 사는 게 재밌다.

요코 씨를 생각하며 나는 나의 요코 씨를 떠올린다. 내 곁의 사노 요코가 변하지 않기를, 죽는 날까지 좋아하는 것, 믿고 싶은 것 그대로 지켜갈 수 있기를.






사실 사노 요코 씨의 책엔 주옥 같은 말들이 너무 많아서 다 이 지면에 옮기지 못한 게 아쉬워요.

에세이의 미덕을 그대로 갖춘 책입니다.

쉽게 읽히고, 내가 감히 못해본 말을 먼저 써놓았고, 무엇보다 남의 일기 훔쳐보는 맛도 있어요.

재밌을 겁니다.


*표지그림은 사노 요코의 동화, 백만번 산 고양이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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