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이다혜
한 사람이 무엇을 원하거나, 어떤 일을 시도하는 데 왜 거창한 이론이 필요할까.
이 생각 때문에 난 페미니즘이 어렵다. 2017년, 여자가 하고 싶은 걸 하는 데 왜 '이즘'씩이나 필요할까. 그냥 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지?
나는 엄마 혼자 돈을 버는 집의 세 딸 중 맏이였다. 거기에 여중여고여대 졸업. 내가 사는 세계에선, 그 어떤 중요한 일도 여자가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우리집의 중대사는 모두 엄마가 결정했고, 학생회장도 과대도, 하다못해 못을 박고, 사다리를 타고 무대 조명을 다는 것도 여자였다. 여자가 할 수 없는 일도, 하면 안 되는 일도 없었다.
사회에 나와보니 그게 아니었다, 하는 반전도 없었다. 나는 여자와 남자가 똑같은 시험을 치고 들어와, 여자 팀장이 남자 팀장만큼 많고, 육아휴직이 커리어에 영향을 주지 않는 직장을 가졌다. 내 직업 앞엔 단 한번도 ‘여’자가 붙은 적이 없다. 내 일상에, 내가 여자임을 의식하는 순간은 거의 없다. 화장은 할 줄 모르고 짧은 치마나 하이힐도 없다. 그런 건 여자라서 하는 게 아니라, 예뻐지고 싶으니까 하는 거다. 나를 보건대, 그렇게 한다고 크게 예뻐지진 않을 거라 관심 밖이다.
내 이야기에 욕을 할 수도 있다. 그런 직장이 몇이나 된다고, 니가 운이 좋은 거지. 그래, 운 좋았다. 하지만 마냥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여자인게 정말 싫었던 때도 물론 있다. 그렇다고 만화 속 악역처럼 나를 해코지한 남자는 없었다. 세상은 남녀로 나뉘듯 이분법적으로 똑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나를 괴롭게 한 건 여자들이었다.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 너 그러다가 차인다고 충고한 건 언니들이었다. 피부 관리도 하고, 옷도 여자답게 입으라고. 나의 못생긴 얼굴과 뚱뚱한 몸을 깨닫게 한 것도 여자들이었다. 왜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여자'가 되라고 할까. 왜 '여자'인 자신을 끝없이 의식해야 할까.
그 때만큼 여자인 게 번거로웠던 적은 없었다. 생리보다, 브라자보다, 남자에게 넘칠만큼 사랑을 받아야 가치있는 여자라는 개념이 내겐 훨씬 더 번거로웠다. 남자친구가 나를 ‘여자로 대접해주지 않으면’ 내 친구들은 나를 하자있는 여자로 취급했다. 나는 여자로서 남자의 사랑을 갈구한 게 아니었다. 남자로 태어났어도 그 사람이 좋은 사랑이고 싶었다. 데이트코스가 고작 김밥천국에, 손잡고 하염없이 강변을 걷는 것뿐이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린 돈이 없고 다른 건 더 필요치 않으니까. 그런데 친구들은 나의 연애가 잘못된 것처럼, 내가 마치 그의 '개념녀 여친'이 된 것처럼 말했다. 널 쉽게 보는 거야,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을 굳이 하게 했다. 그래서? 화장하고 살 뺐냐고? 안했다. 생긴대로 살았다. 두렵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게 더 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식의 삶을 선택했다. 남친은 여전히 나를 응원한다.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말한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소름이 돋았다고, 무서웠다고도 한다. 나는 무섭지 않았다. 평범한 르포였다.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김지영의 에피소드 한 꼭지쯤은 겪었을 법했다. 알고 있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은 소름돋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새삼스레 공포를 느끼는 나이브함이나, 여성친구들을 걱정하는 독후감을 올려 좋아요를 받는 남성 독자, 페미니즘을 지지하며 성상품화와 외모지상주의에 반대하다가도 자신의 어린 딸을 다이어트 시키는 엄마들, 페미니즘 글에 좋아요를 누르다가도 '잘 안되면 시집이나 가지' 하고 덜컥 말하는 친구들을 볼 때 소름이 돋는다. 정말이지 혼란스럽다.
여지껏 대부분의 시간을 남자에게 사랑받아야 가치있다는 프레임에서 살아온 탓으로, 여자들은 페미니즘을 외칠 때조차 보호받고 선택받는 여자라는 개념을 내려놓는 걸 망설인다. 그래서 정치적인 자아와 연애할 때의 자아가 대립한다. 사회적으로는 누구보다 독립적으로 굴다가도, 연애사나 가정에서는 갑자기 약한 여성성을 어필하며 남자가 리드해주길 바란다. 그게 합쳐진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여 소방관이나 여 경찰의 경우.
여배우, 여기자 등 직업 앞에 '여'자를 붙이지 말자는 지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기자나 배우의 능력엔 성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그런데 '여'소방관이나 '여'경찰을 생각해보자. 소방관이나 경찰은 사람을 구하거나, 규율하는 일에 본질이 있다. 그런데 여직원의 체력기준은 남직원보다 훨씬 낮다. 만약, 어떤 소방관이 힘이 약해 불을 끄지 못한다면, 사다리 하나 제대로 나르지 못하고, 구조자를 옮길 때마다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야 한다면, 그건 소방관일까? 어떤 경찰이 주취자를 제압할 수 없다면, 덜덜 떨며 다른 남자 선배를 부른다면, 그게 경찰일까? 왜 여자 소방관과 경찰들의 체력 시험 등급은 남자보다 낮게 책정되어 있을까? 왜 여경들은 작은 선행 하나로도 쉽게 표창을 받을까? 왜 남녀공학 대학엔 여학생회가 따로 필요할까? 왜 여성배려 주차장이 필요할까? 왜 여자들을 2등시민으로 만드는 것에 페미니즘이 가장 앞장설까? 나는 페미니즘 단체가 이런 주장을 했으면 좋겠다. 우리를 어떤 일에든 똑같은 기준으로 뽑고, 똑같이 막굴리라고. 대신에 절대로, 기회조차 주지 않고 여자들을 한심해하지는 말라고.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배경이나 조건, 그 자신이 선택한 적 없는 피부색이나 성별로 임금에 차등을 두어서는 안된다.
-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중
페미니즘은 남자와 여자가 같아지려는 것도, 여자를 남자보다 우위에 놓으려는 것도 아니다. 페미니즘은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을 이유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믿음이다. 페미니즘은 억압받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오늘날, 남성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남성 중심의 사회라 특별히 개념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권리는 잘 보호받고 있고, 현존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남자의 심리, 사랑,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 여성 인권의 수준이 남성들 수준으로 올라오면, 페미니즘은 임무를 마치고 퀴어나 제3의 성 등 또다른 소수들을 위한 권리들에 더욱 골몰할 것이다. 결국 성공한 페미니즘은 소멸한 페미니즘일 것이다. 페미니즘이 꿈꾸는 세상은 페미니즘이 필요없는 곳이니까.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비난으로 사용할 때, 그 자리에서 대응하는 게 어렵다면 그냥 침묵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분위기를 위해 상대방이 원하는 반응을 해주고 싶다는, 비록 그것이 나의 존엄을 해치더라도 상대가 원하는 나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도 저는 그런 당신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부당한 비난에 저항하고,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비난을 무시하는 법을 익히는 것은 여성으로서 살아가게 될 수많은 나날에 가장 중요한 생존 기술이 됩니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아주 작은 것부터 천천히.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인격체입니다. 그 사실을 어떤 순간에라도 기억하세요.
-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중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방향이다. 공부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개념의 싸움이 아니라 일상의 싸움이다. 직장에서, 집에서, 그 어느 곳에서건. 그래서 이다혜 기자는 이 책을 썼다. 미디어를 다루는 것이 작가의 삶이었으므로, 남성 중심의 미디어 사회에서 여자가 어떻게 보고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썼다. 이 책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 페미니즘에 관한 어려운 얘기는 하나도 없다.
어느새 저와 제 주변인들은 서로의 역할모델이 되어주면서 이전 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이 나이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 저는 여러분이 서로의 역할 모델이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함께 더, 더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중
나의 일상도 크고 작은 싸움 투성이였다. 돈을 벌어오는 엄마는 집안일을 안했다. 아빠가 빨래를 개고, 밥을 차렸다. 그리고 그 열등감에 좀 먹었다. 술이라도 마시는 날은 끔찍했다. 전통적인 남녀 서열이 바뀐 탓으로 내게 화목한 가정은 없었다. 나는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라 했다. 개선의 노력도 안 한다 했다. 그래서 남녀혼성의 모임에서 들러리가 되는 일이 잦았다. 여대라서 모든 궂은 일을 스스로 다 했다고 했다. 자기는 예뻐서 남 선배들이 힘든 일 다 해준단 친구의 비아냥도, 여대애들 기쎄다는 괜한 호들갑도 들어봤다. 원하는 대로 사는 게 상처 하나 없는 비단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가장 되고 싶은 여자의 모습으로, 잘 살고 있다.
남자들이 바뀌길, 여자들의 고통을 알아주길, 세상이 바뀔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무언가 역겹다면 지금 당장 안 하면 된다. 화장도, 다이어트도, 애 낳는 것도, 집안일도, 회식도. 남녀노소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자. 예쁨 받으려는 노력도 하지 말자. 사랑받으려는 노력을 포기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서로를 위한 썅년이 되자. 여자들이 원하는 삶을 사는 데 필요한건 페미니즘의 이론이 아니다. 필요한 건 내가 원하는 삶을 아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는 용기. 욕을 먹을 지라도. 싸우게 되더라도.
여성을 대표하는 단 한명의 여성은 있을 수 없다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자신이 전형적인 여자가 아님을 어필하는 전형적인 소개말이 있다. 전 어렸을 때 인형을 갖고 놀지 않았어요, 공룡이나 자동차를 더 좋아했고, 핑크색보다는 파랑색이나 녹색을 더 좋아했어요. 나는 이 말 속의 은근한 자랑스러움이 싫다. 나는 여자 같은 여자 아냐. 핑크색을 좋아하면 어때서, 인형갖고 놀았으면 어때서.
대학생 때 한 교수가 했던 말도 떠오른다. 너는 20대 여대생 같지가 않아. 정작 나는 한번도 왜 난 보통 여자 같지 않을까, 고민한 적이 없는데. 나 같은 것도 20대 여자 맞으니까. 여성을 대표하는 단 한명의 여성은 있을 수 없다. 공룡을 좋아하는 여자애도 핑크색을 좋아하는 여자애도 여자애다. 전형적인 여자는 더 나쁘고, 평범하지 않은 여자가 더 좋은 건 아니다. '여성스러운' 여자로 살든, '여자같지 않은' 여자로 살든, 여기엔 옳고 그름이 없다. 그냥, 그런 거다.
그와 그녀로 불리우는 세계. 나는 나로 살아가고 싶다.
생각보다 더 많은 분들이 걱정의 댓글을 달아주시는군요.
기껏 싹이 돋고 뿌리 내리기 시작한 페미니즘이 제대로 꽃도 피우기 전에 얼토당토 않는 비난과 자기 부정으로 사그라들까 걱정하시는 부분 이해합니다. 무엇보다 '오빠들이 허락한 페미니즘' 안에서 이번에도 또 짝퉁 페미니즘에 그칠까 분노하시는 것이겠지요. 너만의 경험으로 일반화 하지마라, 구조의 잘못을 보지 못하고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지 마라, 함부로 피해를 감수하라고 하지마라, 객관적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 평등의 문제다. 모두 지적 받으리라 각오하고 썼던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런 생각 또한 이 시대의 페미니즘이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야가 좁고 오만했던 글인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부족한 글솜씨로 몇가지 오해받는 부분이 있어 그 부분은 정확히 해두고 싶습니다.
1. 저는 페미니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페미니즘의 수혜자입니다. 여성도 교육받아야 한다는 여성해방운동이 없었다면 여대를 다닐 수 없었고, 지금처럼 누군가에겐 오만으로 보일 정도의 글을 쓸 수도 없었을 겁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보다 앞서 회사를 다녔던 여자 선배들이 피해를 감수하고 육아휴직을 내지 않았다면, 누군가 먼저 개선해줄 때까지 그저 수그리고 있었다면 제가 이렇게 속편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테죠. 인터넷에서 쉽게 이런 글이나 싸지르는 저 대신 실제 여성운동의 가장 앞자리에서 싸워주시는 분들께는 항상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목소리를 낼 기회가 있을 때 그저 가만히 있지도 않습니다. 이 글은 페미니즘을 부정하는 글이 아닙니다. 이 글은 '관념적' 페미니즘을 경계하는 글입니다. 말을 보지 말고 행동을 보십시오. 저희 어머니는 페미니즘의 ㅍ도 모르시지만, 누구보다 페미니스트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저 페미니즘이라는 워딩만 뒤쫓느라 실제의 삶이 유리되지 않기를 바랐으면 하는 마음에 쓴 것입니다.
2. 페미니즘은 방향입니다. 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주는 거대한 흐름.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고,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부터 페미니즘의 세상이 되었다고 우리의 삶이 한 방에 다른 것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에 자신의 삶을 구할 수 있는 건 자신입니다. 페미니즘을 메시아처럼 대하는 건 위험합니다. 페미니즘은 당연히 실현되어야 하지만, 세상에 어떤 반박의 여지도 없는 정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맑시즘이 동구권에서 어떻게 무너졌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또한, 가장 불행한 사람에게 가장 많은 발언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3. 여자 소방관과 경찰 문제에 대하여
실질적 평등과 객관적 평등은 다릅니다. 소방관이나 경찰은 '슈퍼 남성 콘테스트'가 아닙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돌발 사태를 제압할 수 있는 기본적인 체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직원 채용시 체력기준은 최하위권 남성의 체력점수보다 더 낮아야 합니까? 여 소방관과 여 경찰은 그럼 부차적인 업무만 하면 되는 겁니까? 남녀 사이엔 물리적 차이가 분명 존재합니다. 그래서 소방관이나 경찰 채용시 여직원과 남직원은 서로 다른 TO를 두고 경쟁합니다. 체력이 필요한 일이니만큼 여직원의 체력 기준 또한 평균적인 남성만큼은 올리고, 그 대신 구조대를 원하는 여성도, 구조차나 경찰차를 몰고 싶은 여성도, 범인 검거에 직접 나서고 싶은 여성도 모두 평등하게 기회를 받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놈의 물리적 차이 때문에 지금은 도로경찰이나 사무실 근무 등, 능력이 되는 여성도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남자들에게 쉬운 핑계를 하나 더 주니까요.
4. 이 계정은 가뭄에 콩나듯 구독자가 생기는데, '페미니즘'을 화두에 올린 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댓글이 달리다니, 정말 우리 사회가 변하고 있구나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 글 하나로 페미니즘이 운동을 그르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글의 위험함을 인지하시는 분들이 많은 만큼, 우리가 더 바른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