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지원
아, 저 새끼, 명치 한번, 진짜, 존나 세게 한번 때리고 시팓.
(욕 아님, ‘싶다’ 쓰다 오타난 거 안 고친 것뿐임)
세상엔 주기적으로 명치 맞을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2017년 9월 29일 금요일 오후에 수정 피드백을 주는 광고주. 참고로 2017년 10월 1,2,3,4,5,6,7,8,9,10은 “역대급 위치 선정”, “최대 열흘의 황금연휴” 등으로 수식되는, 앞으로 내가 차장 승진할 때까지 다시없을 최장기 추석 연휴다. 남들은 독일도 가고 다낭도 가고 하다못해 강원도도 간다는데, 나는 수정 파일을 만들고 언제 올지 모르는 재수정 피드백에 벌벌 떨며 골로 가게 생겼다. 아아, 협력사 대리 따위에겐 일면식을 허락 않는 당신의 명치를 있는 힘껏, 더도 덜도 말고 딱 한방만, 가격해 볼 수 있다면, 그러면 이 분함이 가실까, 10알?
이봐 학생. 그 따위로 지껄이면 비켜주고 싶겠나.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중
우리의 저자 이지원 교수님은 그리하여 이렇게 점잖게 꾸짖으신다. 이봐, 그러다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책을 성실히 잘 읽은 나는, 나의 광고주님을 이렇게 꾸짖어보고 싶다.
이봐, 그따위 스케줄로 일을 하고 싶겠나.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자기들 추수감사절은 땡스기빙이라 땡규땡규 놀면서, 한국 추석은 송편이라 꿀떡꿀떡 삼켜버리는 해외업체들. 나, 지하철 내릴 건데, 뻔히 내리는 사람들 있는데 어깨부터 들이미는 사람들. 붐비는 환승역에서 스마트폰에 눈을 고정하느라 길막하는 사람들. 묻지도 않은 충고를 늘어놓는 택시 기사님들. 오랜만에 만나 돌잔치 초대장부터 들이미는 친구들. 내가 광고주 회장님만큼 총알이 많았다면, 나는 이 셀 수 없는 이 세상 명치 가격 대상자들에게 이 책을 선물했을 것이다.
제목부터 호기로운 책. 내용은 더 대단하다. 가벼운 질감의 종이는 넘기는 맛도 좋고, 무엇보다 얇아서 출퇴근 길에 지니고 다니기에 부담스럽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묵직한 빅뻑휴가 페이지 곳곳에 숨어있어 숨통이 트인다. 이 자리를 빌려 외친다. 저자 이지원 교수님, 정말 존경합니다. 성낸 아저씨가 방귀까지 뀐다. 이 문장에 저는 6호선 전철에서 참던 방귀 터지듯 콧구멍으로 웃음을 뀌었습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뉴타운 출근객들은 너도나도 티머니 단말기에 카드를 내밀고 변비 똥처럼 꾸역꾸역 밖으로 밀려 나왔다.
-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중
매일 버스가 싼 변비 똥처럼 꾸역꾸역 출근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세상에 불만이 매우 많다. 그러나 그것을 ‘문장’과 ‘글’로 만들어 표현하는 건 또 다른 문제! 나는 기껏해야 어깨싸움에 패배해 “아오! 쫌!” 울부짖으며 불학무식한 자들을 흘겨볼 뿐이다. 이렇듯 세상엔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그것을 ‘언어’의 형태로 만드는 것에 곤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작가들이란, 바로 이 대리 기술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일 테다. “이런 말, 해보고 싶었죠? 이런 생각 해봤잖아요?” 문장력 없고 비범치 못한 우리를 대신해,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주는 사람들. 그런 면에서(이지원 교수님, 다시 한번 존경합니다) 이 책은 내게 없는 재기 발랄함과 연륜으로, 심지어 아주 고상하게 세상의 명치를 냅다 가격한다. (이 책의 출판사는 민음사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세계문학전집을 보유한 고상한 출한사다. 그러니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의 고상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제목: 불안하지 않아서 불안하네요
떠도는 분위기는 디자이너라면 모름지기 음악에 조예가 깊고, 신형 카메라로 사진 찍기를 사랑하며, 무인양품이나 애플에서 어떤 하얀 물체를 구입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단 하나에도 해당되지 않는 나는 지금 불안해야 할까.
-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중
나는 카피라이터답게 세상만사 의미를 자꾸 찾아내 보려 한다. 똥을 싸는 것의 의미, 잘 못 싸는 것의 의미, 출근길의 의미, 꼰대들의 의미, 기타 등등. 카피라이터라면, 크리에이터라면, 응당 세상을 긍정하고, 길바닥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편의점 매대에서도 낭만을 발견해야 하거늘. 따뜻하고 풍부한 시선은 필요충분조건이거늘, 나는 곱디 고운 글들을 쓰거나 볼 때면 이 단어 한마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쩌자고?
우리의 이지원 교수님은 이것을 이렇게 고쳐 말씀하신다.
뭘 그렇게 대단하게 깨닫고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지…
-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중
이 문장이 무능력한 카피라이터를 구한다. 그렇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해서 불안해할 필요는 없지. 떠도는 분위기는 카피라이터라면 응당 사진에도 조예가 깊어야 하고, 먹다 버린 사과가 새겨진 하얀 물체를 구입하며, 때가 되면 남미로 훌쩍, 술 한잔엔 낭만과 어머니, 아니, 어머니는 아니고…
그러나 세상에 이렇게 명치 맞을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예쁘고 착한 글들만 읽을 수 있을까. 사실 우리는 누구를 칭찬할 때보다, 욕할 때 더 많은 힘을 내지 않는가. 무기력한 직장인들도 이때만큼은 에너지가 넘쳐난다. 그렇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욕이다. 잘 쓰인 욕.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욕. 국밥을 먹어도 욕쟁이 할머니를 기어이 찾아가 문디자슥 소릴 듣는 건, 마이너스 에너지의 폭발력에 본능적으로 끌려서는 아닐까. 요새 아름다운 에세이집들은 저자들이 발견한 일상의 의미와, 그 나름의 서정성을 빳빳하게 코팅된 종이와 시원한 여백에 담아 만원 이상씩 받는다. 그런 아름다운 에세이들을 읽고 나면 어쩐지 헛헛해진다. 당신의 관찰력과 감수성에 감복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박탈감마저 든다. 저 사람은 저렇게 글을 잘 쓰는데, 난 뭐지. 하지만, 불평의 에세이는 다르다. 시발, 말 하는 건 쉽지만, 이게 대체 왜 시발 소릴 들을 일인지 설명하는 것은 어렵고, 그 사유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속이 뻥뻥 뚫린다. 아, 내가 이래서 답답했던 거구나!
7500원으로 맥도널드 상하이 버거 세트를 먹으면, 맛있게 먹어도, 젠장, 이렇게 아무것도 안 남기고 다 먹어도 되는가, 괜한 후회와 자책이 든다. 이 책은 단돈 7500원이다. 서점에 들러 책 한 권 사는 건 너무나 멋스럽다. 심지어 책을 다 읽고 중고서점에 되팔아 돈을 돌려받을 수도 있다. 이것은 고급 인간의 삶이다.
그러니, 추석의 귀성객들이여, 7500원으로 이 책을 읽어보자. 그곳이 고속버스든, 자동차 뒷자리든, 무궁화열차든 시간은 금방 흐를 것이다. 더군다나 이백 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저자의 탁월한 비판적 시각을 전수받을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 추석에도 한반도 전역엔 명치 맞을 사람들이 넘쳐날 것이다. 이 책이 훌륭한 예방 접종이 될 것이다. 꽃으로도 때릴 수 없는 각종 친지, 어르신, 친구들에게, 이 책의 문장들로 멘탈의 명치를 폭행하자.
아, 다시 한번, 나는 이지원 교수님과는 1도 상관없는 독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