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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Jul 20. 2017

우연의 얼굴

어쩌면 필름 카메라 초보를 위한 가이드

나는 돈 쓰는 게 너무 싫다. 내일 점심 메뉴를 생각하며 잠드는 먹쟁인데도, 혼자 있을 땐 군것질에 돈을 쓰지 않는다. 닭다리가 주는 기쁨보다 만구천 원을 잃는 슬픔이 훨씬 크다. 그런데 필름 카메라를 샀다. 아무 이유 없이.


나는 사진을 잘 못 찍는다. 모임에서 사진 찍을 사람이 필요할 때, 나는 항상 마지막 선택지였다. 어째서 내가 찍으면 사진이 항상 흔들릴까. 인물을 찍으려면 가슴까지 담아야 할까, 배꼽일까, 발목일까. 친했던 사진부 언니는 내 사진을 볼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제발, 수평만 맞춰줘."  관광지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저기, 사진 좀" 하면 나는 항상 동행들의 뒤로 숨었다. 그런데 필름 카메라를 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 나?


1. 조카가 태어났다. 가족들이 모이면 자꾸 옛날 앨범을 꺼내봤다. 조카에게도 그런 걸 만들어주고 싶었다.

2. 마침, 아빠가 쓰던 니콘 필름 카메라가 있었다. 내 나이보다 오래된. 그걸 고쳐서, 가족들한테 자랑하고 싶었다. 아빠에게 사진 찍던 젊은 아빠를 떠올려주고 싶었다.

3. 세운스퀘어 필카 수리점에 갔다. 필름 카메라 속 건전지 누액이 심해 아빠의 카메라는 완전 폐기.

4. 새로 하나 사? 말아? 그날따라 수리상에서 파는 중고 필름 카메라들도 몽땅 고장.

5. 모든 상황이 다 카메라를 사지 말라고 하니까, 갑자기 카메라를 반드시, 꼭, 갖고 싶어 졌다.

6. 가게들을 배회하던 중, 눈에 딱 들어오는 너무 예쁜 카메라 발견. 심지어 태양열 충전지. 가격 7만 원

7. 야, 너 안 사면 내가 사도 돼? 같이 갔던 친구의 한마디.

8. 어? 아니, 살 거야.

9. 첫 카메라가 생겼다.


올림푸스 트립 35. 완전 수동 카메라. 렌즈를 돌려서 ISO 감도와 초점을 조절할 수 있다. 일회용 카메라처럼 다이얼을 돌리면 찍을 준비가 되고,  셔터가 톡- 가볍게 눌린다


올림푸스 트립 35는 건전지가 필요 없다. 렌즈를 감싼 부분이 셀레늄 전지인데, 빛에 노출되면 그 강약에 따라 전류를 흘려보낸다고 한다. 그래서 따로 건전지가 없어도, 셀레늄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충분한 빛만 있으면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필름 아저씨에게 배운 대로 조리개를 돌려가며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댔다. 어두운 곳에서는 정말 뷰파인더로 빨간 혓바닥이 날름 올라왔다. 셔터는 눌리지 않았다. 찍은 화면을 알 수 없는 게 재밌어서, 다이얼이 또록또록 돌아가는 촉감이 낯설어서 나는 아무 데나 대고 셔터를 눌렀다.


나는 그렇게 호구가 되었다. 인터넷에선 같은 제품을 플래시에 택배비 포함 5만 원에도 팔았다. 괜찮아, 괜찮아. 사진 찍어서 책 내면 돼, 친구는 장담했다. 야아- 김 작가. 그러는 걸 찍었다. 어떻게 찍혔는지 모르니 작가가 되겠는지 아니겠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거리에 나왔더니 종로 거리에 차가 한 대도 없다. 나랑 걔가 까먹은 게 있는데, 그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의 종로


종로 1가부터 6가까지, 연등을 단 택시들을 빼곤 차도가 텅 비었다. 소거 명령이 내려진 것 같다. 노을을 받은 사람들의 얼굴이 신비롭다. 카메라가 있으니까 괜히 설렌다. 나는 오늘 서울 사람이 아니라, 제대로 된 관광객이다.



밤이 되자, 종로 거리에 관세음보살이 내려왔다. 하얀 코끼리도, 봉황도, 부처님도 걸어 다녔다. 카메라를 샀더니 찍을 게 생기네. 첫 카메라 선물은 낯선 종로구나.
 

2주 뒤엔 후쿠오카에 갔다. 필름은 따로 챙겨가지 않았다. 후지의 고장! 일본! 일본의 전자매장 빅카메라에서 원조 후지를 살 거니까. 물어 물어 필름 매대를 찾았다. 한국에 없을 것 같은 노란색 포장의 필름을 샀다. ISO 400. 숫자는 큰 게 좋은 거겠지. 평소라면 철저히 알아보고 제일 싼 필름으로 샀을 텐데, 신이 나니까 그냥 샀다. 원래 여행은 이런 거지. 뭐가 나올지 모르면서 일단 셔터를 누르는 것.


우리는 모르는 골목을 자꾸만 쏘다니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가게들에 들어갔다. 말마 자가 크게 쓰여있는 말고기 가게에서 회식하는 일본인들 옆에서 말고기를 먹고, 진짜 참치 대가리를  전시해놓은 가게에서 생전 처음 보는 메뉴를 시켰다. 일본인 대학생들 사이에선 교자를 먹었다. 우리가 가는 곳엔 한국인도 한국어 메뉴도 영어 메뉴도 아무것도 없었다. 사진도, 음식도 스마트폰은 항상 '미리보기'를 제공한다. 이 집은 어떨 거야, 어떤 사람들이 있을 거야, 무엇을 보게 될 거야. 그래서 우리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간판 모양과 느낌만 보고 새로운 가게에 도전했다. 찍고 싶은 건 필름 카메라로 찍었다. '미리보기'가 없는 여행은 두근두근했다.


돌아왔다. 필름을 맡기려고 15년 만에 사진관에 갔다. 나는 필름 카메라 초짜인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쓴다.


"사장님, 현상하는데 얼마예요?"
“현상만? 인화는?”


헉, 헷갈린다. 현상이 필름이냐, 인화가 필름이냐. 아니, 분명 필름 카메라 블로거들은 현상하고 스캔을 공짜로 해줬다는데. 사진이 없는데 어떻게 스캔을 한 거지. 머리가 복잡해진다. 내가 생각했던 네모 사진은 ‘인화’, 사진관에서 항상 같이 들어있던 갈색 필름은 ‘현상’.  인화는 장당 300원. 내 필름이 두롤. 최소 60방으로 치면 만 팔천 원. 기본 현상비가 또 6천 원? 필름 두 개 값이 만이천원었지. 잠깐, 카메라가 7만 원이었는데? 쉼 없이 계산기를 두드리는데 사진관 아줌마의 한방.


“어? 이거 흑백이네? 흑백이지?”

“네?????????”


전혀 몰랐다. 흑백 필름 같은 게 따로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아는 척 실패. 기가 죽어서 필름을 가지고 다시 나왔다. 카메라보다 비싼 사진이라니, 괜한 짓을 했나. 안 하던 짓, 하지 말 걸.


슬픔에 잠겨 현상소들을 찾아보았다. 대개 현상을 하면, 필름 스캐너로 스캔한 이미지를 jpg로 보내주고, 그중 원하는 게 있으면 따로 인화를 하는 시스템이었다. 우편으로 필름을 보내면 현상해서 보내주는 곳도 있었고, 20분만 기다리면 현상을 해주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흑백 필름은 취급을 않는 곳도 많았다. 겨우겨우 가격대도 적당하고 리뷰도 좋고, 흑백 필름도 현상해주는 곳을 찾았다.


3일 만에 사진을 받았다.


아아, 이것은 내가 보았지만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이다.


내 기억 속엔 나카스 강변의 모든 순간이 생생한데, 흑백으로 돌리는 것만으로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오호리 공원의 오후
사람의 등은 얼굴만큼 많은 말을 한다
사진 고자의 흔한 음식 사진
사실은 김초밥 위에 참치 다진 것을 올리고, 우니와 이꾸라 토핑을 뿌린 참치회


36칸의 필름, 한 방, 한 방, 끝이 있으니까 소중하게 선택한다. 현상이 될 때까진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모른다. 실패한 그림도 선물이 된다. 아, 너무 좋잖아, 필름 카메라.


아주 독특한 뭔가가 있어야 하죠. 찍는 사람이 그 사람만의 도장을, 자신의 사진에 찍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신만의 비전일 수도 있고, 증명일 수도 있어요. 무엇이든 좋습니다. 다만 그건 한 번도 본 적 없고 또한 다시는 보지 못할 무언가 여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성공한 사진가들은 모두 특별한 순간을 발견한, 그 순간들이 만들어낸 어떤 의외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콘스탄틴 마노스


어떤 사람이 매그넘 사진가가 되냐는 질문에 사진가 콘스탄틴 마노스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사진가란 '의외성의 도장'을 찍는 사람들일까. 사실, 내가 찍은 사진들은 뻔한 들이다.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사진. 하지만 내 인생엔 처음 있는 순간들. 나는 그 의외성의 순간들을 도장을 찍듯 꾹 눌러 남겼다. 미리 알아본 게 아니라면, 확실한 이득이 없다면 돈 쓰지 않는 평소의 나는 절대로 안 했을 일들.  우연히 카메라를 샀더니, 종로에 부처님이 왔다. 모르는 필름을 샀더니, 영화 같은 사진이 생겼다. 우연히 들어간 가게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나왔다. 안 하던 짓을 했더니, 없었을 기억이 인생에 담겼다.


우연에게 얼굴이 있다면 이런 사진이 나왔을 테지.

나의 첫 번째 롤. 나는 우연의 얼굴을 본다. 





필름 카메라 처음 쓰는 분들, 저와 같은 뻘짓을 하지 마세요.

1. 사진관에서 당황하지 마세요. 인화와 현상은 다르답니다.
2. 필름을 살 때는 내 카메라에 맞는 ISO와 흑백/컬러를 확인하세요.

3. 올림푸스 트립 35를 쓴다면, 안 쓸 땐 카메라 렌즈부를 꼭 닫아주세요. 빛을 쐬면 쐴수록 전지가 빨리 닳는대요.
4. 현상소는 찾으면 나오는데, 저는 서울역 근처 미미 현상소에서.


 5. 카메라를 산 날의 또 다른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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