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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Sep 21. 2017

버스, 좋다

한 시간 반. 상하이, 오사카 정도는 넉넉히 갈 수 있는 시간. 

세 시간. 오키나와를 지나, 대만이나 홍콩도 갈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을 매일 출퇴근하는 데 쓴다. 나는 통근생활자다.


지난달, 원룸 생활을 청산하고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서울 생활도 함께 정리했다. 집은 넓어진 만큼 멀어졌다. 안 막히면 세 시간. 막히면 네 시간. 출퇴근 괜찮겠어? 넓은 집은 축하할 일이지만, 4배로 늘어난 출퇴근은 걱정거리. 잠은 잘 수 있는 한 많이 잔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켜온 나의 건강수칙. 나를 아는 친구들도, 나도 걱정이었다. 통학의 통자는 왔다 갔다 통자가 아니라, 고통의 통자가 아닐까. 왕복 4시간씩 통학하던 대학생 때 했던 생각. 그때도 힘들었던 걸 30대 직장인이 하면 얼마나 피곤할까.



어느 날의 퇴근길


아무렴, 피곤하다. 정말 무지무지 피곤하다. 7시 반에 버스를 타면 9시 반에 겨우 회사에 도착한다. 어떤 날은 똑같이 출발해서 8시 50분이면 도착한다. 시간을 지배하는 올림픽대로. 그나마 집 앞 정류장에선 백 프로 앉아갈 수 있다는 게 행운. 물론 퇴근할 땐 언제나 잔여좌석 0. 출입문 계단까지 가득 찬 사람들. 가까스로 탄 버스에서 옆사람과 닿지 않게 조심하며, 땀냄새가 날까 신경 쓰며, 무심코 옆사람 얼굴을 보다 놀란다. 지금, 내 얼굴도 저렇게 지쳤니.


그런데 이상하지, 그런 퇴근길 한복판에서 위로를 받는다. 어쨌거나 집에 가는 길이다. 30분 정도 늦어져도, 괜찮다. 다음 정거장은 집이니까. 바쁘게 보냈던, 잘했던, 못했던, 오늘 하루도 마무리. 지친 얼굴도, 이미 곯아떨어진 얼굴도, 화난 얼굴도, 우리는 모두 집에 가고 있다. 강변북로도 올림픽대로도, 집에 가는 길은 다정하다. 시속 90킬로를 넘지 말아요. 천천히 가요. 화려한 네온사인이나, 가지 말란 신호등도 없다. 모두가 꼬리 등을 켰다가, 껐다가 하면서 집으로 간다. 퇴근길 나의 고민은 모두의 고민과 같이 오로지 하나다. 


아, 집에 가면 뭐하지.


오늘은 집에 가서, 오랜만에 일기를 써야지. 악기 연습도 해야지. 검도장에 가면 검을 이렇게 휘둘러봐야지. 알로카시아에 이파리는 펴졌을까. 내일쯤 물을 더 줘야겠다. 남의 일을 해주는 사람에서, 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버스에서 나는 모드가 바뀐다. 


1시간 반. 짧지 않은 시간. 안 읽을 게 뻔한 책도 한 권 챙기고, 영어 팟캐스트도 넣고, 라디오 주파수도 맞춰보고, 인문 강좌도 받고. 버스 안에서 나는 잘 익어간다. 때론 폰도 이어폰도 가방에 넣고, 본격적으로 멍 때리기.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보인다. 오늘 어땠어? 내일은 어떨까. 하루 종일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들리는 대로 말하다가, 비로소 떠밀리지 않는 시간. 이 시간 밖의 일상에선 계속 생각하게 ‘되던’ 내가, 드디어 생각을 ‘한다’.


운이 좋은 출근길


매일매일 한강 드라이브. 출근길에 해는 버스 왼쪽에 있으니까, 오른쪽에 앉기. 글자 스티커가 없는 창문을 골라, 가장 맘에 드는 자리로. 광역버스가 우리 동네를 빠져나가 고가를 올라타면, 별안간 한강이 펼쳐진다. 미세먼지가 없는 날은 북한산의 암벽들이 또렷하게 보인다. 미세먼지가 뿌열 때는 기분이 별로지만. 그런 날들이 많은 만큼, ‘이런 날은 흔치 않잖아’ 깨끗한 하늘만으로도 보너스가 되는 아침도 있다. 삭막한 공장지대와 평범한 논밭들을 지나, 뜬금없이 산이 툭 솟는다. 내가 매일 봐온 녹색. 나랑 가장 가까운 나무들. 나랑 가장 친한 하늘들. 한국에 처음 온 외국인들도 이 길을 따라 서울로 가겠지. 매일 처음 보는 한강을 시속 30km도 안 되는 통근버스에서 혼자 즐긴다.


그래서 나는 버스가 좋다. 돈을 내는 탈 것 중엔 버스가 제일 좋다. 몸이 파묻히는 좌석도, 시야가 높은 것도, 그래서 바깥이 잘 보이는 것도, 부대 앞, 성미슈퍼 앞, 정류장 이름이 재밌는 것도, 가끔 다들 서 있는데 나는 무사히 앉아갈 수 있는 것도. 빗방울이 우다다 쏟아지는 버스도, 창틀에 눈송이가 끼어 녹는 겨울 버스도, 모두가 곯아떨어진 막차도, 어스름 길의 첫차도 모두 모두 좋다. 무엇보다, 긴 긴 길의 끝에 무사히 내릴 때 좋다. 그럴 땐 쑥스럼 타는 나도, 기사님께 자연스럽게 인사하게 된다. 이 먼 길, 고생하셨어요. 오늘도 안전하게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수도권에서 운행하는 광역버스는 16년 기준 대수로만 2200대. 출퇴근 1시간 반을 서서 버텨야 하는 입석 이용자만 만 4천 명. 오늘 퇴근길도, 내일 퇴근길도 보나 마나 못 앉아가겠지. 그래도 준비 완료. 50분을 서서 갈 각오, 이어폰, 생각거리들. 


그러니까, 경부고속도로도, 올림픽대로도, 강변북로도, 내부순환로도 모두 모두, 

괜찮은 출퇴근길이 되었으면. 우리들, 오늘도 참 고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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