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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Sep 12. 2017

상투적으로 독창적

<시인의 사랑>


"가장 상투적인 말로 가장 독창적인 사랑을 묘사하시오."

 

내가 처음으로 팔로잉한 카피라이터가 있는 회사. 내가 좋아하는 캠페인을 모두 만들어낸 회사. 5년 전에 나는 어떤 광고 회사의 대학생 멘토링 프로그램에 합격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저게 바로 카피라이터 필기시험 문제였다. 초조한 마음으로 시험지를 훑어보다 나는 빡이 쳤다. 문제가, 너무, 틀려먹었기 때문이다.


가장 독창적인 사람이 인정받는 세계, 그래서 광고쟁이들은 사랑에도 독창성이 있다고 생각한 걸까? 그래서 자신들은 제출자가 써낸 사랑 중 어떤 것이 독창적인지 채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어떤 사랑은 진부하고 어떤 사랑은 상투적이며, 또 어떤 사랑은 독창적이라고? 나는 그때 연애 중이었다. 평범한 대학생들의 연애. 신체 건강하고, 별다른 사연 없는 20대 남녀의 사랑. 그럼 나의 사랑은 전형적인 걸까? 출생의 비밀도 없고, 광기 어린 예술가도 아니고, 동성애도 아니며, 하다 못해 유별난 이벤트도 없으니까, 우리들은 상투적인 사랑일까? 그래서 하루하루 같이 살 날만을 기다리는 우리의 그 상투적인 말들도 모두 가치 없는 걸까?


나는 그렇게 출제자들에게 화를 냈다. 사랑 앞에 '독창적'이라는 말은 붙을 수 없다고. 그것이 사랑임이 분명한 이상, 모든 사랑은 그 자체로 유일하고 따라서 독창적이라고. 설령 그를 표현하는 말이 이천 년 전부터 있어온 "사랑해"라는 한 문장일지라도. 그러므로 문제는 "가장 상투적인 말로 사랑을 가장 독창적으로  묘사해보시오."가 되었어야 했다고.


보름 뒤에 나는 그 회사의 회의실에서 출제자의 해명을 들을 수 있었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덕분이었다. 그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캠페인의 메인 카피라이터이자 CD 셨던 분이 내게 사과를 하셨다. 내가 지금도 두고두고 정답처럼 새기는 카피를 쓰신 분이! 내 답지를 읽고 처음엔 기분이 나빴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다른 합격자가 쓴 이 문제의 모범 정답을 알려주셨다.


"보석 같은 두 눈, 앵두 같은 입술, 백옥 같은 피부 -

아무것도 없지만 당신을 사랑해."


CD님의 해명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저 모범 답안 만큼은 기억이 난다. 100%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시험장에 있던 다른 사람은, 내가 문제에 불평을 하는 동안 아주 훌륭하게, 가장 상투적인 말로 가장 독창적인 고백에 성공했구나. (물론 나는 저 답을 듣는 순간, 역시 내가 수정한 문제가 정확하다는 걸 확신했다.)




소년을 사랑한 배 나온 유부남 시인이라면, 그의 사랑은 독창적일까? 누구도 하지 않는 사랑이니까? 

가장 상투적인 말로 가장 독창적인 사랑을 묘사하시오. 잘못된 문제가 나는 <시인의 사랑>을 표현하는 주제 문장처럼 느껴졌다.


40대 시인. 그의 명예는 몇 년 전에 받은 천만 원짜리 문학상 하나뿐. 아픔이 없어서 그런가? 문장은 예쁜데, 깊이가 없어. 편하게 자라서 그렇지 뭐. 동료 시인들에게서 받는 평은 대체로 이렇다. 재능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정자는 없다. 정액 한 방울에 정자 두 마리 정도 있는데, 그나마도 잘 안 움직인다. 생산력을 잃은 남자. 그건 창작에 대한 은유처럼 들린다. 창작을 못하는 시인, 번식을 못하는 수컷. 의미를 잃은 것들. 생활력 강한 그의 아내는 그를 어떻게든 발기시켜 애를 가지려고 애쓴다. 근데 정자 두 마리로는 임신이 잘 안된다. 둘은 불임클리닉에 다닌다.


시인인데, 불임클리닉에서 딸을 친다. 시인은 종이컵 반도 안 차는 정액을 간호사에게 가져다준다. 시인인데, 피파 온라인을 한다. 시인인데, 살이 쪘다. 시인인데, 아픔이 없다. 가난한 것만 빼면 교과서에서 우리가 배운 시인들과 일치하는 면모가 한 구석도 없다. 그럼 대체 시인은 뭐하는 사람이지? 그의 답은 이렇다.


"시인은 대신 아파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그는 대신 아파해줄 한 사람을 만났다. 하필 아내가 아니었다. 아내는 너무 세서, 대신 아파해줄 필요가 없다. 그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이제 갓 어른의 문턱에 진입한 남자아이에게 매혹당한다. 그는 이전에도 어려운 사랑에 끌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여자였다. 이젠 자신만이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 위태로운 남자에게 빠져든다.




그의 사랑은 상투적으로 시작됐다. 어느 날 갑자기, 삶에 빛나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빛처럼 멀리서. 시인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매일 같이 도넛을 사 먹는다. 도넛 가게엔 그가 있으니까. 그러다 그의 아픔을 알게 된다. 돈만 생각하는 억척스러운 어머니. 목에선 바람소리만 나는 송장 같은 아버지. 그렇게 섬에 갇힌 아름다운 소년.


"난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겠죠?"


이 상투적인 섬소년의 말이 시인의 가슴을 뒤흔든다. 시인은 소년이 망가지지 않게 그를 지켜줄 단 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다짐은 여느 불륜처럼 상투적으로 단념된다. 아내는 노력 끝에 임신했고, 소년은 시인의 사랑이 부끄러워 친구들 앞에서 그의 멱살을 잡는다. 소년과의 도주는 물거품이 되고 시인은 아버지가 된다. 억지로 현실에 발붙인 그는, 다만 눈물을 참거나, 흘릴 뿐이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 기형도, <희망>


이제 시인이 쓰는 말은 더 이상 그저 예쁘지 않다. 그의 상투적인 말들은 특별해졌다. 결코 상투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 남자애를 사랑하고 나서, 그는 드디어 박수받는다. 그의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시인은 소년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는다. 고백이 필요할 땐 내레이션이 흐른다. 기형도의 나, 김소연의 시다.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 김소연, <그래서>


어쩌면 시인들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은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아닐까. 그래서 그만큼 많이 버림받는 사람 아닐까. 그렇게 사랑이란 감정의 수많은 맥락을 새롭게 발견해낸 사람 아닐까. 특별함은 맥락에서 오니까. 카피라이터 시험 문제의 저 모범정답처럼.


상투적인 말은 사실 가장 편안한 말이다. 매일 듣는 말, 매일 하는 말. 그런데 그 편안한 말이,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지에 따라 아주 절박해진다. 시인이 쓰면, 가장 상투적인 말이 가장 날카로운 말이 된다. 담담한 상황 표현 한 줄이 가슴을 애린다. 사랑했다는 말 없이, 당신 없이 죽은 것처럼 지낸다는 말을 더 먹먹하게 남긴다. 시인의 사랑은 말도 육체적인 감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독창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사랑 자체만큼은, 우리가 매일 하는 사랑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말인지 몰라도, 시인들의 말에 공감할 있다. 같이 아파할 있다.


<시인의 사랑>엔 수많은 진부한 장치가 있다. 죽어가는 아버지와 돈만 밝히는 어머니. 무능한 예술가와 억척스러운 아내. 고립된 젊은이와 그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늙은이. 동시에 <시인의 사랑>엔 특이한 소재가 있다. 찌질한 아저씨가 아름다운 소년을 사랑한다. '상투적인 말'로 '독창적인 사랑'을 표현해보란 문장에 완벽히 부합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특별해지는 건, 아저씨 시인이 소년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사랑이 희귀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상투적인 말이 언제 독창적으로 변하는지, 그 짧은 순간을 잡아내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도 어설프게나마 이미 하고 있는 일이다. 시인이 아닌 우리도, 멋진 말을 할 줄 모르는 우리도, 사랑을 할 때만큼은 시인이 된다. 그 사람만을 위해 온갖 상투적인 문장을 다 쓴다. 오직 그 사람만을 위해.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얼마나 반짝거리는지. 찌질하기도 하고, 답답할 때도 있지만.




 말이 길었다. 이 긴 글은 이렇게 줄일 수 있다.

<시인의 사랑>은 시인들이 쓴 사랑이다. 사실, 나는 문장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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