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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Jul 23. 2017

나, 너, 우리

<덩케르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 너,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 초등학교 1학년,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배우는 첫 번째 가르침. 세상엔 나와 너가 있지만, 함께 우리를 이루자. 노래도 있다. "우리 집 너희 집 사이엔 울타리는 있지 ~ 서로서로 도와가며 형제처럼 지내자. 우리는 한겨레다, 단군의 자손이다." 이 노래는 우리 집과 너희 집을 아우르는 '우리' 개념을 가르친다. 그러나 노래가 끝나면 의문이 남는다. 단군의 자손이 아닌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내야 하지? 60억 명이나 살기엔 별이 너무 작아서일까. 교육의 목표는 나와 너를 넘어서는 우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되기가 참 어렵다.


전쟁. 나와 너가 만나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일. <덩케르크>는 전쟁 영화다. 그래서 딱 두 단어면 설명이 된다. '편 가르기'와 '생존'. 전쟁은 너와 내가 싸워,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 것이니까.


개인적으로 너무 무서웠던 시퀀스


멀리서 불길한 진동이 느껴진다. 처음엔 아주 예민한 한 명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두 명, 세명. 마침내 지척까지 다가오는 굉음. 불안은 삽시간에 전염된다. 어느 한순간, 화면 속 모든 얼굴이 일제히 고개를 돌린다. 겁에 질린 눈코입들. 전쟁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분명 이런 표정일 것이다. 아랑곳 않고 폭격은 시작된다. 해안가의 모두가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펑, 펑, 펑, 펑. 한차례 공습이 지나간다. 누가 탈락했을까. 일어설 수 있는 건 살아남은 사람뿐. 밤이 되었습니다. 마피아들은 눈을 떠주십시오. 이건 가장 잔인한 마피아 게임. 좀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체 속에서 사람들이 일어난다. 이들은 방금 죽음에서 돌아왔다.


하늘에선 툭하면 미사일이 떨어지고, 바다에선 어뢰가 출몰한다. 육지의 방어선은 나날이 좁아지고 있다.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온다. 어디로도 피할 틈이 없다. 선택지는 단 두 개뿐이다. 탈출하든가, 죽든가. 그래도 살고 싶다면 어떻게든 바다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군인들은 새로운 배를 찾아 몸을 싣고, 다시 해안으로 떠밀려 온다. 그리고 또다시 배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죽어나간다. 이것이 덩케르크의 상황이다.


적지에 고립된 40만의 군인들. 군인들을 파견한 정부도, 연합국도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그때 무장조차 하지 않은 민간인들이 그들을 구하러 온다. 그렇게, 당초 구출 계획인원이었던 3만 명을 넘어 40만 거의 전부를 구했다. 어떤 감독이라도 탐낼만한 드라마.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 어떤 프레임을 걸어야 좋을까.


인간이란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내 생각엔 사르트르의 이 문장이야말로, <덩케르크>를 가장 잘 설명한다. 놀란 감독은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보여줄지 보다,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 고민한 것 같다. 전쟁 영웅, 애국심, 이데올로기, 이런 것들은 최대한 덜어냈다. <덩케르크>에는 기승전결을 갖춘 완벽한 스토리라인이 없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단 한 명의 화자도 없다. 오로지 상황만이 존재한다. 그래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곧 주인공이 된다. 이 점은 우리 삶에 대한 강력한 은유로도 작용한다. 세상에 한 명의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시점만이 있을 뿐이다. <덩케르크>는 해안가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 세 가지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분리되었던 이야기들이 서로 얽히며 확장되는 동안, 등장인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살기 위해 애쓴다.


영화는 버려진 도시의 작은 골목에서 시작된다. 젊은 병사 한 명(핀 화이트헤드)이 동료들과 함께 물을 찾아 길거리를 헤맨다. 총격전 속에 운 좋게도 혼자 살아남아 해안으로 도망쳐 나온다. 그는 여전히 목이 마르고, 오줌도 마렵다. 해안가에서 그는 전우의 시체를 묻는 다른 병사(아뉴린 바나드)를 발견한다. 그의 발치에 있는 수통도 함께 발견한다. 화이트헤드는 그에 다가가 시체 묻는 것을 도와주곤, 물을 청한다. 병사는 수통을 건넨다. 그는 사실 프랑스 군인이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덩케르크 해안에 깔린 영국 군 시체 하나를 골라, 군복을 훔쳐 입고 영국 군인인 척하는 중이었다. 둘은 부상병을 데려가면 구축함에 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직 숨이 붙어있는 부상병을 발견 합심한다. 물 한 모금을 위해 시체를 묻어주고, 살아남기 위해 시체의 옷을 훔쳐 입는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이용한다.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 산 자는 생존을 위해 죽음까지도 이용한다.


한편,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우리 편과 너희 편을 확인한다. 전투기가 날아갈 때마다 민간인 구조대 도슨 부자는 적군인지 아군인지를 확인한다. 전쟁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영화 속 인물들은 계속해서 더 디테일하게 편을 가른다.


여긴 척탄병 줄이야


화이트헤드가 아무 생각 없이 해안가에서 구조 탑승 줄을 섰을 때 듣는 말이다. 그 순간 그 줄의 사람은 척탄병과 아닌 사람으로 나뉜다. 영화 초반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은 '잉글리시 온리'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구조선에 탈 수 없다. 좌초된 어선을 타고 탈출 계획을 세우던 군인들은, 물이 쏟아져 들어오자 무게를 줄이기 위해 '깁슨'으로 위장한 프랑스 군인을 독일 스파이로 몰아 내보내려 한다. 프랑스군은 전장에서 같이 싸우는 '우리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음 타깃은 그를 보호했던, 같은 부대원이 아닌 화이트헤드다. 영국에 무사귀환했을 때도 편 가르기는 끝나지 않는다. 공군 조종사 콜린스가 영국 상륙 후 가장 처음 듣는 말은 "너희 공군은 뭐했냐"는 비난이다. 우리를 공격하는 거대한 적만이 우리의 적은 아니다. 우리의 생존을 방해하는 것은 모두 '너'이고, '적'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편을 나눠야 한다. '우리'를 위해 '너희'들은 먼저 죽어도 괜찮다. 영화 속 민간인 요트 함대 도슨이 제일 먼저 구 것은 킬리언 머피다. 그는 유보트의 공격을 받았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킬리언은 도슨 일행이 총 한 자루 없이 덩케르크로 향하는 것을 알고는, 미쳤냐며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 과정에서 도슨의 친구 피터를 실수로 죽게 만든다. 그런데 교차되는 시간 속에서 킬리언 머피의 과거가 나온다. 그는 처음 배가 좌초되었을 때 구명보트에 타려는 화이트헤드 일행을 막았었다. 더 사람을 태우면 보트가 가라앉고, 다시 보트를 몰고 올 테니 바다에 떠있으라며. 다른 사람에겐 다음번 배를 타라고 하지만, 지금 내가 탄 이 배는 반드시 지금 당장 집으로 가야 한다. 그렇게 살아남은 그는, 결국 목숨을 내놓고 나온 타인에게 빚을 진다. 어떻게 살아남을까에 대한 문제는 그렇게 돌고 돌아 나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살아남는 것은 부끄러운 것일까. 프랑스인으로서의 진짜 이름 알려지지 않은 '깁슨'은 끝까지 어선의 구멍을 막다가 탈출 시기를 놓쳐 죽고 만다. 그를 가장 먼저 독일 스파이로 몰았던 해리 스타일스는 살아 돌아온 뒤 극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한편, 돌아온 군인들을 맞아주는 한 노인은 그들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한다.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 사람들을 구하러 가지 못했다는 죄책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깁슨'은 영국군 해리 스타일스가 어서 도망치라고 허락해 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탈출할 때까지 구멍을 막는 것이 어쩌면 그 나름의 사죄 표시였을 것이다. 자신이 훔친 진짜 '깁슨'에 대한.


여기서 영화는 나와 너의 세계를 뛰어넘는다. 의무도 없고, 무기도 없이 왜 전쟁터로 가냐는 킬리언 머피의 질문에 도슨은 이렇게 답한다. "어른들이 벌인 일에 아이들이 죽게 할 순 없어." 그 자신이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사람으로서, 그에게 다친 병사들은 '우리 아들'로 확장된다. 아마 그는 낙오된 독일 군인을 봤더라도 살려줬을 것이다. 전투기를 모는 파리어(톰 하디)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독일군의 포로가 될 것을 각오해, 비상탈출을 시도하지 않고  2차 피해가 없을 안전한 곳으로 전투기를 몰아 착륙한다. 그뿐만 아니라 구축함에 타있는 여자 간호병들, 빵을 나눠주는 사람들, 민간인 어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했으면  절대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는 분명 나와 네가 아닌 '우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 나처럼 약한 개체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감독은 관객을 <덩케르크> 안으로 데려오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마치 종군기자가 되지 못한 스스로를 안타까워하듯 덩케르크를 구현한다. 카메라는 일정 거리 이상으로 인물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오히려 멀어지는 방식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깁슨이 마지막 순간 탈출의 기회를 놓칠 때,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담지 않는다. 마지막 탈출구인 사다리에서 점점 멀어지는 손을 보여줄 뿐이다. 또한 병사들을 잔뜩 태운 구축함 한대를 포격으로 잃고 난 뒤의 제독을 보여줄 때도 마찬가지다. 분노로 떨리는 주먹이나, 꽉 깨문 입술 같은 것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광막한 덩케르크 바다를 배경으로 무력하게 서있는 제독의 모습을 객관적인 거리에서 보여준다. 대사도 최소한으로 운영된다. (대사가 없는 만큼, 반드시 전달되어야 하는 메시지는 작위적인 방법으로 말해진다. 생존은 공포이자 탐욕이야 라는 말은 인물과 어울리지 못했고, 처칠의 연설을 읊는 것은 남사스러웠다.)


사실 나는 대사가 거의 없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소리가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소리는 청각이 아니라 촉각에 가깝다. 인디언들이 멀리 있는 적들의 존재를 대지의 진동으로 느꼈듯이, 전투기가 출현할 때마다 중저음의 소리가 가슴을 쿵쿵 쿵쿵 울렸다. 굳이 4D로 보지 않아도, 좌석이 덜덜덜 떨릴 정도의 무거운 소리가 상영시간 내내 온몸의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더욱이 시계 소리, 혹은 심장박동을 떠올리게 하는 BGM은 도대체 이 상황이 언제 끝날까에 대한,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은 절박함을 아주 능숙하게 담아낸다.


이 영화에서 고요 두 번 찾아온다. 마침내 파리어의 전투기에 연료가 떨어지는 순간. 그 순간 모든 소음과 BGM이 사라진다. 파리어는 아주 잠시 동안 전투기 헤드를 열고 비행을 만끽한다.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 잠깐 동안만은 전쟁에서 모두 해방된 것처럼,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도, 앞으로 닥쳐올 일들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 보인다. 지상의 일들과 무관한 것처럼 파리어는 비행을 이어나간다.


그 다음번의 고요는 마지막 장면에서 찾아온다. 마침내 아이들이 기찻길에서 놀 수 있는 '집'에 돌아온 화이트 헤드의 모습에서.


“수고했네.” “그냥 살아서 돌아온 것뿐인데요?” “그거면 충분해!”


이 영화엔 적은 수의 부대원을 이끌고 마침내 승리를 이끌어내는 영웅은 없다. 영웅의 고뇌도, 전우애나 기적도 없다. 오로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분투 끝에 얻은 잠깐의 고요함과, 그것을 죄스럽게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내겐 지루할 틈 없이 밀도 높은 영화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프리모 레비의 글이 떠올랐다.


그녀는 또 작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화장터의 폐허를 가리켰다. 당시에는 굴뚝 위로 불꽃이 보였다고 했다. 그녀는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 물었다. "저 불길은 뭐지요?" 그러자 여자들이 대답해주었다. "저기서 타고 있는 건 바로 우리야."

-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세계 대전을 겪으며 브레히트가 썼던 이 시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과연 home은 조국일까? 조국이란 단어는 다른 나라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외부에 맞서, 싸우고 지켜야 할 장소를 의미하니까. 구세계를 몰아내고 세상을 해방시킬 신세계가 "영국과 연합군"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건 여전한 너와 나의 세계다. 나의 생존에 너의 죽음을 동원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속에 살고 싶다.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처럼,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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